

중동부유럽의 원자력 에너지 발전 현황과 각국의 전략적 접근 방식
유럽이 에너지 안보 확보와 탄소 중립 목표 달성이라는 두 가지 과제에 직면한 가운데, 폴란드, 리투아니아, 헝가리를 중심으로 한 중동부유럽 국가들이 원자력 에너지 도입 및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대형 원전 건설 프로젝트가 구체화되는 동시에, 차세대 기술로 주목받는 소형 모듈 원자로(SMR)가 새로운 게임 체인저로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기후 변화가 기존 원자력 발전소에 미치는 영향은 원자력의 역할을 재평가하게 만드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폴란드의 원자력 에너지 도입과 미국과의 협력
폴란드, 첫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위한 미국과의 협정 체결
폴란드가 국가 에너지 전환의 핵심 과제로 추진해온 첫 원자력 발전소 건설 사업이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본격화되고 있다. 폴란드 정부는 최근 미국의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와 벡텔(Bechtel) 컨소시엄과 엔지니어링 개발 협정(EDA: Engineering Development Agreement)을 체결하며 원전 건설을 위한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도날드 투스크(Donald Tusk) 폴란드 총리는 이번 협정이 "폴란드의 이익 관점에서 더 나은 합의"라고 평가하며, 프로젝트의 확실성과 보장이 강화되었다고 강조했다. 이를 바탕으로 2025년 9월 현재, 양측은 최종 건설 계약(EPC: Engineering, Procurement, and Construction) 체결을 위한 막바지 협상을 진행 중이다.
이번 협정에 따르면, 폴란드의 첫 원자력 발전소는 발트해 연안의 루비아토보 코팔리노(Lubiatowo Kopalino) 부지에 건설될 예정이다. 폴란드 정부는 이 프로젝트에 약 600억 즐로티(약 140억 유로)의 예산을 배정했으며, 향후 3년 내에 건설을 시작하여 2036년까지 상업 운전을 개시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폴란드 정부는 예정대로 2026년 첫 콘크리트 타설을 시작하여 2036년까지 1호기를 상업 운전한다는 목표를 재확인했다. 이는 폴란드의 에너지 안보 강화와 탄소 배출 감축을 위한 장기적인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미국과 폴란드 간의 원자력 협력은 최근 크리스 라이트(Chris Wright) 미국 에너지부 장관의 바르샤바 방문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라이트 장관은 안제이 두다(Andrzej Duda) 폴란드 대통령 및 투스크 총리와 연이어 회담을 가지며, 양국 간 민간 원자력 협력 증진 방안을 논의했다. 특히 이번 방문에서는 삼해 비즈니스 포럼(Three Seas Business Forum)이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유럽 전역의 지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에너지 협력 방안이 논의되었다. 양국 간 협력은 단순한 원전 건설을 넘어, 기술 이전과 인력 양성, 원자력 공급망 구축까지 포괄하는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발전하고 있다.
소형 모듈 원자로(SMR) 로드맵 실행 단계 진입
폴란드 에너지부는 2024년 말, 약속대로 SMR 도입을 위한 국가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 로드맵은 SMR의 인허가 절차 간소화, 부지 선정 가이드라인, 그리고 전력망 연계 및 지역 난방 활용 방안 등을 포함하고 있다. 폴란드 당국은 대형 원전 건설과 더불어 소형 모듈 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 도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미워시 모티카(Miłosz Motyka) 에너지부 장관은 2024년 초가을까지 SMR 도입을 위한 세부 로드맵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로드맵은 전력 생산뿐만 아니라 지역 난방 수요까지 고려한 포괄적인 계획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폴란드의 SMR 프로젝트 중 가장 진전된 사례는 국영 정유기업 오를렌(Orlen)과 억만장자 미하우 소워보프(Michał Sołowow)가 소유한 화학그룹 신토스(Synthos)가 50:50으로 설립한 오를렌 신토스 그린 에너지(OSGE: Orlen Synthos Green Energy)의 사업이다. 무엇보다 2024년 진행된 국가자산부의 감사와 기후부의 검토가 긍정적으로 마무리되면서 프로젝트의 불확실성이 해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OSGE는 GE-히타치의 BWRX-300 원자로를 브워츠와베크(Włocławek), 스타비 모노프스키에(Stawy Monowskie), 오스트로웬카(Ostrołęka) 등지에 건설할 계획을 추진 중이다. OSGE는 첫 번째 SMR 건설 예정 부지로 오스트로웬카(Ostrołęka)를 최종 확정하고, 규제 기관에 건설 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상태이다.
지난 2023년 12월 폴란드 기후부는 OSGE가 6기의 BWRX-300 원자로를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 결정을 내렸다. 다만 이 과정에서 폴란드 내부보안국(ABW: Agencja Bezpieczeństwa Wewnętrznego)이 부정적 의견을 제시했으며, OSGE의 ABW 평가 기밀해제 요청은 거부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024년 2월 국가자산부는 오를렌의 새로운 경영진을 통해 OSGE에 대한 새로운 감사를 지시했고, 기후부는 프로젝트의 소유구조에 한정하여 이전 결정들에 대한 별도 검토를 시작했다.
최근 OSGE는 캐나다의 온타리오 파워 제너레이션(Ontario Power Generation)과 SMR 배치를 위한 협력에 관한 의향서를 체결했으며, OSGE의 부사장 바르토시 피야우코프스키(Bartosz Fijałkowski)는 곧 개정된 주주 협약이 체결될 것이며, 이를 통해 캐나다 기업이 폴란드에서 BWRX-300 원자로의 설치와 안전한 운영에 필수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리투아니아의 원자력 에너지 재평가와 SMR 도입 공식화
원자력 발전소 폐쇄 이후 SMR 도입 검토
리투아니아는 2010년 이그날리나(Ignalina) 원자력 발전소 폐쇄 이후, 에너지 정책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2025년 초, 국가에너지위원회가 제출한 'SMR 도입 타당성 연구' 보고서를 공식 채택하고, 원자력 에너지를 국가 에너지 믹스에 재포함하기로 결정했다. 이 보고서는 SMR이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고 산업용 기저부하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최적의 대안이라고 결론지었다. 이그날리나 원전은 리투아니아 전력 수요의 약 80%를 공급하던 핵심 발전 시설이었으나, 유럽연합(EU) 가입 조건으로 소련식 원자로의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어 폐쇄가 결정되었다. 빅토라스 세발디나스(Viktoras Ševaldinas) 전 이그날리나 원전 소장은 "한 국가가 원자력 발전을 통해 상당한 전력을 생산하다가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라고 언급했다.
원전 폐쇄 이후 리투아니아는 에너지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환되었으며, 전기 요금이 즉각적으로 상승하는 등 경제적 영향을 겪었다. 현재는 풍력과 태양광을 통해 과거 원전이 생산하던 수준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으나, 지기만타스 바이치우나스(Žygimantas Vaičiūnas) 에너지부 장관은 "2050년까지 산업 부문의 모든 이산화탄소 배출을 제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리투아니아 정부는 소형 모듈 원자로(SMR)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리투아니아 원자력협회의 오스발다스 치욱시스(Osvaldas Čiukšys) 회장은 "많은 국가들이 원자력 에너지를 태양광과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를 보완하는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산업계와 주민들에게 합리적인 전기 요금을 보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리과학기술센터의 아르투라스 플루키스(Artūras Plukis) 선임연구원은 4세대 SMR의 안전성을 강조하며, "이 새로운 기술은 사고 발생 가능성을 낮추고,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환경과 주민에 대한 영향을 최소화하거나 없앨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되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SMR은 이그날리나 원전의 사용후 핵연료를 재활용할 수 있어, 방사성 폐기물 처리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최대 4기의 SMR을 2040년까지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장기 계획을 발표했으며, 첫 단계로 잠재적 SMR 공급사 선정을 위한 기술 및 재정 요건 검토에 착수했다. 과거 이그날리나 원전 부지가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으며, 해당 부지의 기존 인프라를 활용할 경우 경제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발트 3국의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고, 역내 전력망 안정화에 기여할 중대한 결정으로 평가받는다.
리투아니아의 지열 에너지 활용 가능성 대두
리투아니아의 지열 에너지 개발은 발전(發電)보다는 지역난방 부문의 탈탄소화에 초점을 맞춰 재추진되고 있으며, 업계에서는 지열 에너지 분야에서도 상당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2025년, 리투아니아 정부는 '그린 히팅 이니셔티브(Green Heating Initiative)'를 발표하고,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신규 지열 난방 프로젝트에 대한 보조금 및 세제 혜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바이오매스나 천연가스에 의존하는 기존 지역난방 시스템을 대체하여 에너지 비용을 절감하고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카우나스 공과대학(KTU)의 마유르 팔(Mayur Pal) 교수는 리투아니아가 발트 3국 중에서 지열 에너지를 활용하기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데본기와 캄브리아기 암층에서 상당한 지열 에너지 잠재력이 확인되었으나, 현재까지 이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클라이페다(Klaipėda) 지열 시범 발전소는 저온 지열과 물을 이용한 열 생산 시설로서 초기에는 혁신적인 프로젝트였으나, 기술적, 재정적 문제로 운영이 중단되었다. 리투아니아 서부 지역의 1,000~1,500미터 깊이에서는 지역난방에 적합한 저엔탈피 지열원이 발견되며, 2.5킬로미터 깊이의 캄브리아기 층에서는 최대 96도의 온도로 소규모 전력 생산이 가능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현재 리투아니아는 지열 에너지를 통한 발전량이 매우 적으며, 전력의 약 7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팔 교수는 "캄브리아기 지열 시스템에서 수백 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하여 전력 수입을 대체할 수 있고, 데본기 대수층은 지역난방 네트워크에서 바이오매스나 가스 사용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열 에너지는 풍력이나 태양광과 달리 24시간 연중무휴로 이용 가능하며 이산화탄소 배출이 미미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높은 초기 투자비용, 긴 개발 기간, 높은 수분 염도와 재주입 문제 등 기술적 과제들이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팔 교수는 지열 에너지가 중단 없는 에너지 공급이 필요한 주요 기반시설과 국방 분야에서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헝가리의 원자력 에너지 확장과 소형 모듈 원자로 도입 준비
팍스 II(Paks II) 프로젝트, 첫 콘크리트 타설 준비 완료
헝가리가 에너지 주권 강화를 위해 추진 중인 팍스 II(Paks II) 원자력 발전소 프로젝트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페테르 시야르토(Péter Szijjártó) 헝가리 외교통상부 장관은 지멘스 에너지(Siemens Energy)가 팍스 II 프로젝트와 관련된 원자력 제어 기술 부문을 부다페스트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헝가리에게 매우 유리한 해결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를 통해 신규 원전 건설이 당초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의 프라마톰(Framatome)과 독일의 지멘스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팍스 II의 제어 기술 준비를 위한 입찰에서 승리했으나, 이중용도 기술이라는 특성상 관련국의 허가가 필요했다. 프랑스 정부는 허가를 승인했으나, 독일 전 정부의 녹색당 인사들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지멘스는 팍스 II 관련 원자력 제어 기술 부문을 부다페스트로 이전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과정은 이미 진행 중이다.
팍스 II 프로젝트는 2025년 8월, 5호기 원자로 건물의 기초 굴착 작업을 완료했으며, 2026년 초 첫 콘크리트 타설을 앞두고 있다. 시야르토 장관은 "팍스 II는 헝가리 에너지 주권의 상징이며, 예정된 공정표에 따라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팍스 II가 완공되면 헝가리의 전력 자급률은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전기 요금 안정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시야르토 장관은 이번 결정이 헝가리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으며, 특히 자국 내 첨단 산업 역량이 크게 확충될 것이며, 헝가리 당국이 직접 기술 사용을 승인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로써 독일 측 승인 부재로 인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설명했다.
SMR 도입을 위한 국제 협력 구체화
헝가리가 소형 모듈 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 기술 도입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시야르토 장관은 소형 모듈 원자로 기술 도입에 필요한 기술적, 인프라, 재정적, 법적 준비가 시작된다고 발표했다. 글로벌 에너지 위기 속, 특히 해안선이 없고 자체 에너지 자원이 부족한 헝가리와 같은 국가들은 더욱 취약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러한 내륙국들은 이웃 국가들의 선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헝가리의 에너지 공급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헝가리 정부는 자국이 소비하는 에너지를 최대한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원자력 발전소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대형 발전소 외에도 소형 모듈 원자로 기술이 중요한 기술 혁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헝가리는 미국 기업 GE 버노바(GE Vernova)와 중부 유럽 지역에서 이 기술을 보유한 폴란드 기업 신토스 그린 에너지(Synthos Green Energy)와의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캐나다에서 이미 미국 기술을 활용한 소형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 허가를 받아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헝가리에게 매우 고무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25년 9월 현재, 3사는 헝가리 내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BWRX-300 SMR 건설을 위한 잠재 부지 2~3곳을 선정하고, 예비 타당성 조사를 진행 중이다. 이는 헝가리의 대규모 제조업 투자 유치에 필수적인 안정적이고 저렴한 무탄소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로 알려졌다. 로버트 팔라디노 주헝가리 미국 대사는 "에너지 분야에서 미국, 헝가리, 폴란드의 3각 협력은 지역 안보와 경제 번영에 기여하는 모범 사례"라고 평가하며, SMR 기술의 중부 유럽 확산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또한, 지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전략적 협력의 한 형태이자 상호 존중에 기반한 진정한 파트너십이라고 강조했으며, 양국 관계가 국방, 무역, 우주 탐사, 에너지 분야에서도 더욱 깊어지고 있다고 부연했다.
유럽 내 원자력 에너지의 기후 변화 대응과 한계
기후 변화가 유럽 원자력 발전소에 미치는 영향
유럽의 원자력 발전소들이 기후 변화로 인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현재 유럽은 약 166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 원자력 발전 용량의 약 3분의 1인 149기가와트(GW)를 차지한다. 프랑스가 57기로 가장 많은 원자로를 보유하고 있으며, 영국(9기)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스페인, 스웨덴, 핀란드, 스위스, 벨기에도 상당한 규모의 원자력 발전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체코, 헝가리, 슬로바키아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원자력 발전소를 보유하고 있다.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유럽의 원자력 발전소들은 심각한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냉각수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원자력 발전소는 수십 년 전에 설계되어 기후 변화에 대한 고려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인근 강에서 취수한 물을 냉각수로 사용하는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극심한 폭염으로 인해 강물 온도가 상승하고 수위가 낮아지면서 원자로 냉각 효율이 떨어지고, 일부 발전소는 가동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프랑스의 사례는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전력 생산의 65%를 원자력에 의존하는 프랑스는 2023년 여름, 18개 원자력 발전 단지 대부분에서 발전 용량 감소를 보고했다. 론강(Rhone)과 루아르강(Loire) 같은 주요 냉각수원의 수온 상승과 수위 저하로 인해 발전소들이 가동률을 낮추거나 완전히 중단해야 했다. 스위스의 베즈나우(Beznau) 발전소도 아레강(Aare River)의 수온 상승으로 한 기의 원자로를 완전히 정지하고 다른 한 기는 50% 용량으로 운영해야 했다.
재생에너지의 약진과 전력 시스템의 변화
기후 변화에 따른 원자력 발전의 취약성이 드러나면서, 유럽의 에너지 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유럽환경청(European Environment Agency)에 따르면, 유럽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기온이 상승하는 대륙으로, 전 세계 평균의 약 2배 속도로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 영국 기상청은 극심한 폭염, 가뭄, 돌발성 홍수, 폭풍 등이 새로운 일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생 에너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Ember)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유럽연합(EU)의 전체 발전량에서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45%를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화석연료(28%)와 원자력(23%)을 합친 것보다 많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태양광 발전은 여름철 냉방 수요가 급증하는 시기에 전력 공급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전력망 안정화에 기여했다. 2025년 여름 폭염 기간 동안 스페인과 그리스에서는 특정 시간대에 태양광이 전력 수요의 50% 이상을 감당하기도 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2024년 이후에는 재생 에너지 설비가 더욱 확대되면서 전력 시스템의 안정성이 개선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는 13-17년이 소요되어 기후 변화 대응에 필요한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전문가들은 재생 에너지와 함께 에너지 효율화, 배터리 저장장치, 전력망 연계 개선 등을 통해 보다 탄력적인 전력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이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면서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가능하게 하는 방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향후 중동부유럽의 전력 시스템이 원자력을 안정적인 기저전력으로 활용하되, 태양광과 풍력의 비중을 대폭 늘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배터리 저장장치(BESS) 및 국가 간 전력망 연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