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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제 17대 인도 총선, 인도국민당 압승 요인과 그 정치적 의미

인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교수 2019/06/04

제17대 인도 총선이 지난 4월 11일에서 5월 19일까지 7차례의 단계(phase)에 걸쳐 진행되었다. 사상 최고의 투표율로 2014년 선거보다 1.03% 상승한 67.47%를 기록한 이번 투표의 최종 결과는 5월 23일 발표되었다. 약 9억 명이 참가한 이번 선거의 결과, 전체 523석 가운데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당(Bharatiya Janata Party)이 303석을 차지하고 연합 세력인 전국민주연합(National Democratic Alliance)은 352석을 차지하여 지난 2014년 이후 다시 한 번 인도국민당 단독 집권이 가능해졌다.


반면 제1야당인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는 52석, 통합진보연합(United Progressive Alliance)이 91석을 차지하였고, 기타가 99석을 차지했다. 주요 지역별로 보면, 전통적으로 강세 지역인 구자라트, 마하라슈트라, 하리야나, 비하르, 자르칸드, 앗삼 등에서 인도국민당이 완승을 거두었고, 같은 힌디 벨트 지역이면서 작년 주 의회 선거에서 패배함으로써 많이 불안해 했던 라자스탄, 마디야프라데시, 찻티스가르에서 완승을 거두어 남부의 안드라트라데시, 케랄라, 타밀나두 그리고 동부 오디 샤를 제외하고는 전국을 거의 휩쓸었다. 1977년 이후 34년간 인도공산당이 집권을 해 온 서벵갈 주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단독이나 연정을 통해 번갈아가면서 집권을 유지해 온 케랄라에서 공산당이 참패를 했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 일이다. 공산당은 서벵갈에서는 단 한 석도 얻지 못했고 케랄라에서는 단 한 석을 얻는 참패를 당했다.


이번 인도국민당의 승리는 여러 가지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 우선 총리에 연임한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는 인도의 초대 총리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네루에 이어 두 번째로 5년의 임기를 다 채우고 연임에 성공한 총리가 되었다. 인디라 간디 총리는 1975년 비상계엄으로 인해 5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했고, 1984년에는 암살당함으로써 5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바 있다. 모디는 인디라 간디가 사망한 뒤 치러진 1984년의 선거에서 인디라의 아들 라지브 간디가 전체 의석의 무려 80%에 달하는 압승을 거둔 지 30년 만인 2014년에 이어 과반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여 연립 정부가 아닌 단독 정부가 가능한 결과를 다시 거두었다. 지난번 282석보다도 21석이나 더 많은 303석을 차지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둔 모디는 인도 정치사적으로 네루, 인디라 간디에 이어 세 번째로 강력한 통치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지난 총선 때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인도국민당과 모디 총리의 압도적 승리를 예측하였으나, 이번 총선에서는 대부분이 모디의 총리 연임은 가능하나, 단독 정부는 어렵고 연립 정부 정도가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결과는 이러한 예측이 훨씬 빗나간 절대 압승이었다. 모디 총리의 절대 압승 이유는 무엇일까?


프레임 주도


우선적으로 지난 5년 동안 모디 총리가 지배해 온 프레임을 주도의 게임의 룰을 들 수 있다. 지난 2014년에 모디를 선택한 인도 국민들의 희망이 경제 발전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보는 데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경제 발전 정책은 다소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전문가들의 평이다. 취업률은 떨어졌으며 일자리 창출에 실패했다. 또한 농촌 경제는 침체했으며 도시 빈민이 크게 늘어났다. 무엇보다도 화폐개혁이 가져다 준 후유증이 매우 심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모디 총리는 이 프레임을 교묘하게 바꾸어버렸다. 인도국민당과 그 방계 세력들은 그럴 때마다 힌두 근본주의에 입각한 문제를 부각시켰다. 때로는 암소 도살 사건을 꺼냈고, 때로는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의 보호 문제를 꺼냈다. 때로는 여성이 힌두 사원에 출입하는 문제를, 때로는 느닷없는 영화 문제를 꺼냈다. 모디 총리가 속한 당인 인도국민당의 산하 조직인 의용단 일가(Sangh Parivar)가 조직 적으로 교묘하게 만들어낸 프레임 바꾸기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때로는 무슬림이나 불가촉천민에게 폭력을 가해 사망에 이르게 하는 등의 사회 갈등을 촉발함으로써 논쟁의 포커스를 항상 힌두교와 국가주의로 옮겼다. 자극적인 사건이 커지자 언론은 자동적으로 논리적이고 정책적인 경제 성과에 대한 문제보다는 더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힌두 근본주의나 종교 공동체 갈등에 집중했다. 언론은 노회한 정치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못하였다.


모디 총리는 전형적인 대중 선동가 정치인이다. 그는 2002년 무슬림 학살 때 여러 차례 분명하게 말은 하지 않으면서 뉘앙스로 이해시키는 언어를 구사하여 대중을 자극하였다. “우리 힌두가 몰살당했다. 누가 죽인 줄 다 안다. 우리는 그들을 다 죽일 것이다.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등 주어나 목적어가 불분명한 언어를 동원해 군중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 적게는 2,000여 명, 많게는 5,000여 명의 무슬림 소수자가 학살당했고 힌두주의가 전 사회를 휩쓸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모디 총리와 인도국민당은 군중을 자극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선거 개시 한 달도 못 남은 시점에서 모디 총리는 드디어 자극적인 언사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다 죽여야 한다.”라는 발언이 가장 좋은 예이다. 그는 선거를 한 달여 남긴 지난 2월 16일 파키스탄의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일으켜 40여 명의 인도 민병대원이 죽은 테러에 대해 수차례 자극적인 언사를 통해 단호한 응징을 군중에게 약속하였고 국민들은 환호하였다.


안보 문제 적극 활용


2019년 2월 14일 인도령 카슈미르 주의 한 국도 상에서 인도 민병대에게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자살 트럭 폭탄 테러를 감행하여 민병대 4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거가 있기 두 달 전의 일이다. 모디 총리는 서울에서 서울평화상을 받고 귀국한 다음 날인 2월 26일 인도 공군기가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  영내에 있는 테러리스트 캠프를 공습하여 40여 명의 테러리스트를 사살했다고 발표했고 국민들은 환호하였다. 그런데, 파키스탄 측은 인도 공군기가 자신들의 영토 내로 들어와 공습을 가한 적이 없고,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다고 발표했다. 이어 모디 총리는 그날 비가 오고 구름이 많이 끼어 파키스탄의 레이다가 공습을 포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후 파키스탄 정부는 이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지 않았고, 모디 총리는 국민들에게 단호한 응징만 외쳐댈 뿐 더 이상의 확전은 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단호한 응징’에 열광할 뿐이었다. 지식인들은 모디 총리가 말하는 공습은 존재하지 않았다며 그가 가짜 뉴스를 만들어 퍼트리는 야비한 정치를 한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조롱하였지만, 그것은 식자층에서의 일일뿐 9억이 넘는 유권자를 가진 나라에서는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인도 정치는 1951년 초대 총선 이후 1980년대 말까지 거의 40년 동안 인도국민회의 일당 지배 체제였다. 1977년과 1989년에 1년 정도의 사회주의 계열 정당과 그 연합 세력에 권력을 넘겨 준 적은 있었지만 다시 되찾아 온 후 권력 이동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1989년 이후부터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고, 그 저변에는 사회주의 계열 정당이 제기하면서 주로 북부 인도에서 돌풍을 일으킨 카스트 중심의 선거 경향과 인도국민당이 바람을 넣으면서 폭발적 영향력을 끼친 ‘힌두 근본주의’가 있었다. 이 가운데 전자인 카스트 정치는 후자인 힌두 근본주의 바람에 크게 약화되었는데, 2014년에 이어 이번에는 거의 소멸되었다. 카스트 정치의 근원지라 할 수 있는 인도 최대의 주인 웃타르 프라 데시에서는 전체 80석 중 인도국민당이 64석을 차지하였다. 2014년에 비해 9석이 줄긴 했으나 여전히 압도적인 위세를 보였고, 이에 반해 카스트 정치에 기반을 둔 여타 후진 계급(OBC) 기반의 사회주의당(Samajwadi Party)과 불가촉천민 정당인 대중사회 당(Bahujan Samaj Party)의 연합은 실패하였다.


또 파키스탄(1971년에 방글라데시로 바뀜)과 분단됨으로써 국가 안보 문제가 항상 중요한 이슈를 차지해 온 서벵갈(West Bengal) 주에서 인도국민당이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안보 이슈의 결과로 해석된다. 서벵갈 주는 1977년부터 34년 동안 인도공산당이 집권을 해온 곳으로 강력한 권력을 항상 원하는 경향이 높은 곳이다. 그곳에서 이미 권력을 잃은 공산당은 단 한 석도 확보 하지 못하였고, 지방 권력으로서 지난 선거에서 인도공산당을 누르고 집권당이 되는 기염을 토한 마마타 바네르지(Mamata Banerjee)가 이끄는 트리나물 콩그레스(Trinamool Congress)에게 전체 42석 가운데 22석을 인도국민당에게 18석을 준 것은 국가 안보의 문제를 안고 있는 지정학적 특성상 강력한 권력을 원한 민심의 결과로 보인다.


꾸준한 힌두 근본주의 정책


2002년 구자라트 학살이 벌어진 후 치뤄진 2004년 총선에서 인도국민당은 힌두 근본주의 정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빛나는 인도(Shining India)’를 대표 구호로 내세웠다. 회의당이
222석을 차지한 반면 인도국민당은 186석을 차지하여 정권을 내주었다. 그 후 2014년 총선에서 인도국민당은 힌두트와를 기초로 하는 극우 힌두 정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인도국민당은 집권하는 동안 이번 선거가 있기까지 ‘경제 발전(vikas)’과 ‘힌두 근본주의’를 두 축으로 번갈아 가면서 상황에 따라 선거 전략으로 삼았다. 발전과 종교라는 두 어젠다가 섞이면서 여러 형태로 활용되었지만, 후자를 중심으로 하는 더 자극적인 형태의 갈등 유발을 통한 공격적인 힌두주의 전술 카드는 나오지 않았다. 국민들 사이에 힌두 근본주의에 입각한 테러와 학살이라는 갈등 유발이 피로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신 변형된 힌두주의 전술인 국가안보 어젠다를 선거 직전에 크게 활용하였다.


2014년 정권을 잡은 이후 모디 정부가 지속적으로 키워 온 신성 한 어머니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힌두 국가(Hindu Rashtra)’ 개념 안에서 ‘부패 없이 모두 잘 사는 복지 국가’라는 개념이 일상 생활에서의 작은 복지 제도 마련으로 연결된 것 또한 이러한 힌두 주의 전술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디 총리는 여성들이 강간에 시달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권 초기에 농어촌 마을에 대규모로 화장실을 구축하는데 투자하였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바뀌지 않고 여성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화장실을 구축한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런 근본적인 문제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유권자들의 피부에 닿는 실질적인 복지 정책이었다. 화장실 구축 프로젝트는 여성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고 그들의 지지를 얻는 좋은 방편이 되었다.


또한 ‘클린 인디아(Clean India)’ 슬로건을 들 수 있다. 모디 총리는 인도국민회의의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부패 문제를 본격적으로 끄집어내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 부패 문제를 제도적으로 뿌리 뽑고 해결하기 보다는 직접 빗자루를 들고 길거리를 청소하는 등 상징적인 행위를 보이는데 더 주력하였다. 그리고 길거리 깨끗하게 하는 사업에 매진하여 실제로도 인도의 길거리가 매우 깨끗하게 유지되어 국민들 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같은 방편으로 전국에 고속도로를 확충하고 통신 설비를 크게 보완하여 피부에 닿는 경제 복지 포퓰리즘 차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무기력한 야당


90년대 인도 정국을 휩쓸던 키워드가 두 개의 M 즉 만디르 (M andir, 사원)로 표상되는 종교와 만달(Mandal, 하층 카스트 보호정책)로 표상되는 카스트 문제였다. 이 두가지 중 만달은 지난 2014년 선거에서 인도국민당이 주도하는 만디르 즉 힌두 근본 주의의 돌풍 앞에서 힘을 잃고, 그 자리를 새로운 M 즉 시장 (Market)이 차지하였는데, 이번 선거에서 시장의 힘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만디르와 마켓 그 두가지 M은 인도국민당이 압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인도국민당은 지난 집권 기간 동안 힌두 사원을 새롭게 건축하거나 증축하는데 많은 재원을 투자하였고, 사원 의례를 세속화하여 신 자본주의에 걸 맞은 축제로서 화려한 수익 사업으로 변형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 과정에서 불가촉천민 달리트(Dalit) 계급과 부족민인 아디와사(Adivasi)까지 세속화 자본주의의 체제 안으로 흡수시켜 그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버리고 자본주의 체제 속으로 적극 들어와 경제 발전의 환상을 즐기도록 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모디 총리는 의료, 보건, 교육, 언론 등에서 경쟁과 성과를 앞세운 시장 중심의 체제로 탈바꿈시켰다.


그렇지만, 사실 정부가 대대적으로 홍보한 국내총생산의 성장은 이전 정부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농업 부문에서의 성장뿐만 아니라 관광, 호텔, 무역 등 서비스 부문에서도 이전보다 다 나은 업적을 쌓지 못했다. 모디 정부는 농촌 빈곤이나 식량 문제, 도시 빈민의 빈곤 그리고 실업 등에 관한 문제 등에서도 실패를 거듭했다. 경제 실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지난 몇 년 사이에 치러진 주 의회 선거에서 반(反) 모디 표로 표출되었는데, 정작 연방 정부의 정권의 향방을 결정하는 이번 선거에서는 다른 요인들에 가려져 표출되지 못했다. 이렇게 된 것은 라훌 간디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의 무능 때문이기도 했다.  라훌 간디는 네루의 외가 가문으로 4대 째 이어지는 소위 혈통 정치를 앞세웠을 뿐 당 내부의 오래된 병폐인 연고주의, 줄 서기, 파벌, 부패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선거에 임하였다. 그들은 모디 총리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실패를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프레임을 짜지 못했다. 결국 힌두 근본주의와 안보에 기반 한 감성 정치에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이제 당권조차 내려놓아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2019년 인도 총선의 결과를 통해서 볼 때 인도 정치에서의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우선, 인도국민당은 정당 으로 정책을 끌고 나가는 반면, 국민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민감한 이슈는 민족의 용단(RSS)을 비롯한 의용 단일가에 속한 여러 전위 부대가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민심을 잡는데 성공했다. 둘째, 경제의 실패로 인해 민심이 상당히 이반되었으나 정치 프레임을 선점하고 언론이 결과적으로 모디 총리의 프레임에 포섭됨으로써 정책과 이성적 판단에 기반한 논쟁을 회피하고 국민들을 종교와 안보의 신화에 빠져 있게 함으로써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치를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한때는 제3의 세력으로 부상한 인도공산당의 진보 진영이 신자 유주의의 효율과 성장 신화의 광풍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무기력에 빠짐으로써 힌두교 이데올로기와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에게 마땅한 대항마가 부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 공화국(Republic of India)은 소수자 공존이라는 전통적인 공화주의 정신을 잃고 오로지 다수결의 원칙이 통치의 기제로 작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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