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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인도 아요디야 사원 분쟁에 대한 인도 대법원 판결의 의미

인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2019/12/11

왜 아요디야를 이슈로 꺼냈는가?
1947년 건국 이후 인도의 정당은 실질적으로 회의당 하나뿐이었다. 회의당은 1885년 창당 이후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민족운동을 이끌어오면서 간디 이후 많은 정치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회의당은 자와할랄 네루(Jawahar Lal Nehru)를 중심으로 그의 딸인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인디라의 아들인 라지브 간디(Rajiv Gandhi)를 연거푸 총리로 배출하고, 지역 곳곳에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명실상부한 전국 정당인 반면 야당은 변변한 존재감조차 없었다.

 

현재 연방 정부의 여당인 인도국민당(Bharatiya Janata Party)은 그 뿌리인 민족의용단(Rashtriya Swayamseavk Sangh)이 간디를 암살한 죄를 물어 해산을 당하고, 정치 활동을 못하게 되었으며, 이후로 변변한 정치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51년 초대 총선 이후 40년 동안 거의 한 번도 제대로 정권을 잡지 못했던 야당 세력은 네루 가문이 쇠퇴하던 198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정치 전술을 개발해냈다. 인도-파키스탄으로 분단된 정치적 상황에서 영원한 앙숙 관계로 설정된 힌두와 무슬림 두 종교 공동체 간의 갈등을 본격적으로 캐내서 부추기는 것이었다. 그 갈등은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 이후 생긴 것이었으니 전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나 분단 후 이 문제를 꺼내 전국 규모의 정치적 이슈로 키운 것은 이들이 처음이었다.

 

보수 정당인 인도국민당은 방계 연대 조직인 여러 극우 힌두 종교 공동체주의자들과 손잡고, 자신들의 신화에서 이상적인 왕인 라마(Rama)신이 탄생한 아요디야에 라마의 사원이 없고, 그 대신 이슬람 모스크가 있다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무갈제국을 이슬람을 믿는 외부 세력으로 간주하고, 조국은 오로지 힌두교도만의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 개국 시조인 바바르(Babur)는 자신들의 성지 아요디야를 파괴한 침략자일 뿐인데, 라마 사원이 그때 파괴되고 그 자리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졌다고 주장하면서 그런 것들은 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극우 힌두 세력을 모아 아요디야로 집결하여 바바르 이름을 딴 모스크 바브리 마스지드(Babri Masjid)를 파괴해버렸다.

 

광신도 힌두 정치 깡패들이 폭력을 휘둘러 자신들의 시조가 세운 사원을 파괴하자, 일부 무슬림은 테러로 저항하였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폭발물을 터트려 다수 힌두를 살상하였고, 그들이 다수를 향한 테러를 저지르면, 다시 힌두 극우 세력은 무슬림이 많이 사는 지역을 찾아가 대량 학살을 자행하였다. 그러한 파괴와 테러와 학살이 연이어지는 광기의 역사가 20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은 2002년 현재 인도 연방 정부 총리인 모디(Narendra Modi)가 주총리로 있던 서부의 구자라트(Gujarat)에서 벌어졌다. 극우 힌두 행동대원들이 탄 기차가 느닷없이 어느 작은 무슬림들이 주로 사는 마을에서 갑자기 서더니 순식간에 기차에 불이 붙었는데 문이 잠겨 그 안에 탄 사람들 58명이 타죽었다. 이후 당시 주 총리이던 모디는 무슬림을 다 잡아 죽여야 한다는 일부 극우 세력에 동조하고 그들의 학살을 사실상 방조하고 선동하였다. 그 후 학살은 구자라트 주도 아함다바드(Ahmemdabad) 등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일어나 적게는 2,000명에서 많게는 5,000 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차 방화를 무슬림 테러리스트가 자행했는지 힌두 극우 세력이 자작극으로 자행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 정치적 이득은 힌두 극우 세력에게 갔고, 그 덕에 모디는 이후 선거에서 주 총리에 다시 당선되었고, 그곳에서 경제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평가를 토대로, 연방 정부 총리에 오르고, 다시 2019년도 총선에서 더 큰 승리를 거두어 현재 총리 연임 중이다.

 

모디는 연방정부 총리가 된 후 5년 간 계속해서 힌두주의를 국정 운영의 중심에 두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무슬림들은 전국 곳곳에서 테러로 살해당하고, 국민들은 복수의 테러가 또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에 떨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요디야 사원 부지를 둘러싸고 힌두 측과 무슬림 측이 소유권을 서로 주장하면서 법적 싸움이 시작되었다. 힌두 측은 바브리 모스크가 들어서기 전 이미 힌두 사원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므로 땅의 주인은 힌두교 종단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무슬림측은 과거 역사의 문제를 현대 법적 개념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한 최종 판결이 2019년 11월 9일 인도 대법원에서 나온 것이다.

 

아요디야 분쟁의 추이
아요디야 분쟁 문제는 영국 식민시기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 시기 이후로 본격화 되었다. 그것은 소위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영국 정부가 점점 커지는 민족의식을 통제하기 위해 힌두와 이슬람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소위 분리 통치(divide & rule) 차원에서 본격화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알력은 그렇게 매우 심각하지는 않았다. 두 집단 간에 종교적 갈등이 생기자 1859년에 영국 정부는 사원에 펜스를 설치해 사원의 내부는 무슬림이 종교 행위를 하게하고, 사원 외부는 힌두들이 종교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판결은 독립 이후 그런대로 평화롭게 유지되었다. 독립 후 1949년에 힌두 광신자 몇 사람이 라마 신상(神像)을 모스크 내부에 몰래 갖다 놓고  신이 기적적으로 그의 몸을 드러냈다고 선동하였다. 그 때부터 모스크를 허물고 그 위에 라마 사원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정권을 잡기 위해 야당인 인도국민당의 방계 세력인 힌두 극우주의자들이 행동으로 옮기면서 정치 이슈의 진앙으로 부상한 것이다.

 

사실, 이 이슈는 세속주의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은 네루가 이끌어 온 인도국민회의당(Indian National Congress)이 40 년 동안 일당 지배 체제를 구축해 온 덕택에 정치 문제로 크게 비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잠복일 뿐이었다. 인디라 긴디라는 거물급 정치인이 시크교도에게 암살당해 죽고, 그 후계자가 힘이 약한 틈을 타 야당이 자신들의 정치 노선을 힌두 근본주의로 변경하면서 이 문제를 본격적 정치 이슈로 삼았다. 극우 힌두 세력인 세계힌두회의(Vishwa Hindu Parishad, VHP)가 1984년에 모스크를 완전히 파괴해버린 후 힌두 사원 건립을 구체적으로 추진해나가기 시작했고, 인도국민당은 이 문제를 전국적 수준의 정치 투쟁으로 격상시켰다.  문제는 인도국민당이 아요디야가 위치한 인도 최대 인구를 가진 주(州)인 웃따르 프라데시(Uttar Pradesh) 주 의회에서 이겨 주 정부 여당으로 부상한 1991년부터 구체화되었다. 주 정부를 장악한 인도국민당은 연방 정부의 여당인 인도국민회의당을 압박했으니, 선거철을 앞둔 회의당 입장에서는 그 폭력을 공권력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인도국민회의당은 힌두 근본주의자들의 무자비한 폭력 행위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방관하였고, 주 정부 여당인 인도국민당은 사실상 파괴를 선동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92년 12월 6일 전국에서 모인 힌두 극우 행동대원들은 폭력으로 바브리 모스크를 완전히 해체해버렸고 그 과정에서 무슬림 2,000 여명을 살해했다. 이에 힌두주의에 격앙된 국민감정은 승리감에 들끓었고, 그 여세는 40 년 만에 인도국민당이 연방 정부를 차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 후 2002년에 앞에서 언급한 무슬림 학살이 자행되면서 수 천 명의 무슬림이 살해당하고,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재산이 강탈당했다. 2008년에는 이에 대한 무슬림의 보복 테러가 일어났다.  파키스탄에 근거를 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인도의 경제 중심지인 뭄바이(Mumbai)에 침투해 들어와 호텔을 점거한 채 사흘 간 테러를 벌여 인도인 수 백 명이 희생당했다. 그 후 2014년에 인도국민당의 모디가 연방 정부의 총리가 되었고, 5년 만인 올 2019년 봄에 있었던 총선에서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압승을 거두어 다시 총리 자리에 올랐다. 모디는 선거 당시 아요디야 모스크 터에 힌두 라마 사원을 반드시 복원하겠다고 공언하였다.

 

대법원 판결의 결과와 역사적 의미
아요디야 부지 소유권 문제는 인도공화국이 성립한 후부터 힌두 단체와 이슬람 단체가 번갈아 가면서 민사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언제든 법적으로 해결되었어야 할 문제다. 가장 최근 판결로는 2010년 9월 30일 알라하바드(Allahabad) 고등법원이 있다. 고등법원은 부지를 소송의 세 당사자인 힌두 사원 측, 힌두 종단 측, 그리고 이슬람 원고 측에게 똑같이 균등하게 분할하도록 판결하였다. 이에 힌두 측이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하여 이번 2019년 11월 9일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나오게 된 것이다. 최종 판결은 고등법원의 판결을 기각하였다. 대법원은 사원 터는 힌두 측에게 모두 양도하고, 이슬람 측에게는 대체 부지를 제공하니, 그곳에 모스크를 건축하라는 것이다. 대법원은 분쟁을 종료하고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이에 이슬람 소송 당사자는 법원의 판결은 존중하지만, 정치권력에 대법원 스스로 굴복한 판결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현재로서는 소송 당사자가 제3의 부지를 받아 그곳에 이슬람 모스크를 짓겠다는 주체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인도는 헌법에 의해 세속 국가를 천명하고 있다. 또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수준으로 사법부 독립이 유지되고 있는 나라다. 하지만, 이번 판결을 보면 사법부 독립이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한 것은 맞지만, 국민 여론으로부터도 독립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비록 이번 판결로 1992년 당시의 파괴와 살상 행위가 정당화 되지는 않았다고는 하나, 법원이 엄연한 세속국가에서 종교 공동체 간에 벌어진 민사 문제를 신앙의 잣대로 삼아 사원을 건축하도록 판결했다는 것이 법 논리 밖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450년 전 정복 과정에서 세운 역사적 사건을 문제 삼으면 현재 인도 땅에 서 있는 모든 무슬림 건축물은 다 파괴당할 수 있게 되는 논리가 된다.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지만, 일부 극우 힌두주의자가  타지마할(Taj Mahal)도 원래 힌두 사원이었던 것을 무슬림이 파괴하고 그 위에 묘를 지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상기하면, 이런 주장은 현재로선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언젠가 말썽이 나고, 폭력이 벌어지면, 무너질 수도 있음을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보여준다.

 

모디 총리는 “이번 대법원 판결이 누구에게도 승리나 패배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반면, 이슬람 측은 현재로서는 단순히 불만 토로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이번 판결로 언제 또 테러가 터질지는 알 수 없다. 이번 판결에 대해 야당인 인도국민회의당도 조용하다. 현재 인도의 정치 상황에서 압도적인 표를 가지고 있는 힌두 민족주의에 대한 굴복으로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 인도 현대사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이런 식으로 마무리 되었음에도 야당조차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인도공산당(Communist Party of India)이 낸 성명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재판부는 모스크 파괴 행위를 위법이라고 인정했음에도 부지 전체를 힌두사원 건설 부지로 판결하였다는 것은 법적으로 일관성이 상실된 것이라고 평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법외의 정치적 논리에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영국의 식민시기 이후 시작된 이래로 특히 1990년대를 거쳐 오면서 힌두와 무슬림 두 종교 공동체 간의 유혈 분쟁이 국가의 근간을 통째로 흔드는 수준의 총체적 분쟁으로 비화되었음을 고려할 때, 대법원의 판결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더 이상 학살과 테러의 악순환이 지속되지 않기를 강력하게 바라는 희망에서 나온 주문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결이 이런 정치적 상황까지 고려했다는 것은 분명히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인도의 대법원이 권력으로부터 독립은 이루었으나, 정치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는 사실이 이번 판결이 갖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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