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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정세변화] 중동 분쟁과 아세안 에너지 안보
동남아시아 일반 안진주 EC21R&C 연구원 2026/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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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아세안의 에너지 취약성
미·이스라엘의 대이란 군사행동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
2026년 2월 28일 미국·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하고, 이란이 카타르·바레인·UAE·사우디아라비아 등 역내 미군 기지를 공격하면서 중동 분쟁이 심화되고 있다. 이란의 신임 최고지도자는 세계 원유 교역의 핵심 관문인 호르무즈 해협(Strait of Hormuz) 봉쇄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드론 보트 및 해상 기뢰 운용으로 6척 이상의 선박이 피격되는 등 해상 위협이 가시화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International Energy Agency)는 이번 사태를 역대 최대 규모의 공급 차질 중 하나로 평가하고, 글로벌 전략비축유 4억 배럴 방출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제 유가는 브렌트유 기준 배럴당 최고 119달러(약 17만 9천원)까지 급등한 뒤 100달러(약 15만 원) 이상으로 높은 변동성을 이어가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원유 공급의 약 5분의 1이 통과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해협 봉쇄는 아시아 에너지 안보에 직접적인 충격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US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원유의 84%, 액화천연가스(LNG)의 83%가 아시아로 향하였다. 이 중 중국·인도·일본·한국이 해협 통과 물동량의 약 70%를 차지하였으며, 그 외 아시아 지역으로 향하는 물량도 약 15%에 이르렀다. 동남아시아는 이 15%의 주요 소비처로서, 이번 사태는 아세안 국가들이 외부 공급 충격에 구조적으로 취약함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중동 에너지 의존 구조와 비축 현황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Economic Research Institute for ASEAN and East Asia)의 경제학자 알로이시우스 조코 푸르완토(Alloysius Joko Purwanto)는 필리핀·태국·말레이시아·브루나이를 원유 공급 차질에 상대적으로 높은 취약성을 지닌 경제권으로 평가하였다. 이들 4개국은 원유 수요의 60~9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산유국인 인도네시아도 수입 의존도가 전체 수요의 3분의 1을 상회하며, 수입량의 4분의 1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국가별 비축량 현황을 살펴보면 역내 격차가 뚜렷하다. 태국은 65일치 이상, 인도네시아는 약 21~23일치, 베트남은 약 20일치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일본(254일)·한국(208일)·중국(120일) 등 동북아시아 주요국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으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간 에너지 안보 역량의 격차를 보여준다. 아세안 회원국 중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석유·가스 순수입국이다. 특히 라오스·캄보디아·미얀마는 자국 내 정유 시설이 없어 인접국의 석유제품 수출에 구조적으로 의존하는 관계에 놓여 있다.
국가별 긴급 에너지 대응
필리핀, 에너지 비상사태 선포와 긴급 비축 조달
필리핀은 연료 수요의 90%를 걸프만에서 충당하고 있어 역내에서 에너지 충격 노출도가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중동 분쟁 이전 리터당 52~53페소(약 1,297원~1,322원)였던 디젤 가격은 일부 주유소에서 100페소(약 2,496원)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수요 억제 측면에서 대통령실은 정부 기관에 전력·연료 사용을 10~20% 절감하도록 지시하였다. 아울러 공무원에 대한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하고 공무 출장을 필수 업무에 한정하였다. 필리핀 의회는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Jr.) 대통령에게 석유 소비세를 일시적으로 면제하거나 감면할 수 있는 비상 권한을 부여하였다. 해당 조치가 시행될 경우 휘발유는 리터당 약 10페소(약 249원), 경유는 약 6페소(약 149원) 인하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대중교통 수단인 지프니(Jeepney) 운전기사 등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한 현금 지원도 병행하고 있다.
비축 현황과 관련하여, 마르코스 대통령은 3월 초 경유 50.5일치·휘발유 51.5일치 등 약 50~60일치의 재고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3월 24~25일 에너지부 장관 샤론 가린(Sharon Garin)은 가용 비축량이 45일치 수준으로 감소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필리핀 정부는 200억 페소(약 4,992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긴급 비축용 원유 200만 배럴 조달에 착수하였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3월 25일 행정명령 제110호(Executive Order No. 110)를 발령하여 에너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범정부 차원의 대응 체계를 가동하였다.
* 행정명령 제110호 : 2026년 3월 25일 마르코스 대통령이 발령한 에너지 부문 국가비상사태 선포 명령. 범정부 대응 체계 ‘ULIFT(Unified Package for Livelihoods, Industry, Food, and Transport)’ 를 범정부 대응 체계로 공식화한 명령. 교통부, 사회복지개발부, 통상산업부, 재정부, 예산관리부 등 관계 부처가 각 소관 분야에서 에너지 위기 대응 임무를 수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선포 효력은 1년간 유지되거나 조기 해제될 수 있음
태국, 복합 대응과 독자 통항 외교
태국 정부는 에너지 절약과 공급 안정화를 병행하는 복합적 대응에 착수하였다. 수요 억제 측면에서 정부 부처 직원에게 재택근무를 지시하고 공무원들의 해외 출장을 전면 중단하였다. 에어컨 온도를 26~27도로 유지하고 엘리베이터 사용을 줄이도록 권고하는 한편, 공무원 근무복을 반소매로 제한하였다. 카풀 이용을 장려하고 정부 청사의 조명을 감축하였으며, 위기가 심화될 경우 심야 광고판 소등 및 주유소 영업 제한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가격 안정화 측면에서 아누틴 차른비라쿨(Anutin Charnvirakul) 총리는 경유에 대한 한시적 가격 상한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석유기금(Oil Fuel Fund)이 월 약 800억 바트(약 3조 6,600억 원)의 속도로 소진되면서 재정적 부담이 가중되었다. 이에 정부는 보조금 규모를 축소하고 일부 가격 인상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또한 정유소 출고가와 소매가의 연동을 의무화하고 연료 수송 차량의 24시간 운행을 허가하는 등 유통 정상화 조치를 병행하였다.
공급 다변화 측면에서는 캄보디아·라오스를 제외한 모든 국가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2024년 말 팜유 가격 급등으로 한시적으로 낮춘 바이오디젤* 혼합 비율을 기존 5%에서 7%**로 재상향 조정하였다. 아울러 태국만·미얀마산 파이프라인 가스 생산을 확대하고 석탄·수력 발전소를 전면 가동하는 한편, 식품·농산물·건설자재 등 59개 품목에 대한 가격 통제도 시행하였다.
외교적으로는 3월 28일 이란과 태국 유조선의 호르무즈 해협 안전 통항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는 아세안 국가 중 이란과 독자적 통항 협정을 체결한 첫 사례이다. 합의 대상은 방콕 코퍼레이션(Bangchak Corporation)과 SCG케미칼스(SCG Chemicals) 유조선 각 1척으로, 별도 통항료는 부과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란은 미국·이스라엘 및 이를 지지하는 국가 소속 선박을 제외한 '비적대적 선박'에 한해 사전 협의를 거쳐 통항을 허용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 바이오디젤(Biodiesel): 팜유·대두유·폐식용유 등 식물성 유지 또는 동물성 지방을 화학적으로 처리하여 생산하는 재생 가능 연료로, 일반 경유(석유계 디젤)와 혼합하여 사용함. 화석연료 대비 탄소 배출량이 낮아 에너지 전환 및 온실가스 감축 수단으로 활용됨
** B5·B7: 바이오디젤 혼합 비율을 나타내는 표기로, B 뒤의 숫자는 전체 연료 중 바이오디젤이 차지하는 부피 비율(%)을 의미함. B5는 바이오디젤 5%·경유 95%, B7은 바이오디젤 7%·경유 93%의 혼합 연료를 뜻함
인도네시아, 보조금 확대와 비축 인프라 확충
아세안 최대 경제국인 인도네시아는 약 21~23일치의 비축량만을 보유하고 있어 역내에서도 비축 여건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수준에 있다. 에너지장관 발힐 라하달리아(Bahlil Lahadalia)는 미국산 원유 구매를 확대하고 신규 원유 비축 시설 건설에 착수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공급 다변화 측면에서는 팜유 기반 바이오디젤 50%와 경유 50%를 혼합하는 B50* 프로그램 도입도 가속화하고 있다. 재정부 장관 푸르바야 유디 사데와(Purbaya Yudhi Sadewa)는 연료 보조금 예산을 증액하겠다고 밝혔다.
공급 확보 노력과 함께 재정 측면의 압박도 심화되고 있다. 2026년 국가예산은 유가를 배럴당 70달러(약 10만 5,800원)를 기준으로 편성되었으나 현재 국제 유가는 이를 크게 상회하고 있어 보조금 예산 증액 압박이 가중되고 있다. 저소득층이 주로 사용하는 3kg 소형 LPG 실린더의 공급 압박도 심화되고 있으며, 유가 급등과 맞물린 루피아화 약세가 수입 비용을 추가적으로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압박은 이드(Eid)* 연휴 성수기를 앞두고 더욱 심화되고 있다.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인 인도네시아는 명절 기간 연료 수요가 일시적으로 급증하는 구조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 현재의 비축 여건에 추가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베트남, 대체 공급원 확보와 가격 안정화
베트남 정부는 연료 가격 안정화 기금 집행을 개시하고, 기업들에 재택근무를 권고하는 한편 대중교통 이용 및 자전거 통근을 장려하였다. 아울러 국영 정유·석유 공급망 전반에 공급 차질 해소, 대체 공급원 확보, 생산·영업 정상화를 통한 안정적 시장 공급 유지에 주력하도록 지시하였다.
베트남은 일본·한국에 원유 공급 협력 확대를 요청하는 한편, 중동 외 지역으로부터 원유 400만 배럴을 조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에너지경제금융분석연구소(IEEFA: Institute for Energy Economics and Financial Analysis)의 연구원 샘 레이놀즈(Sam Reynolds)는 해당 물량이 실질적으로 6일치 소비량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다. 국영 매체 보도 기준으로 현재 비축량이 약 20일치 수준임을 고려할 때, 추가 원유 유입이 없을 경우 연료 부족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 B50: B50은 바이오디젤 혼합 비율이 50%임을 의미함.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팜유 생산국으로, 중동산 원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수단으로 팜유 기반 바이오연료 비중 확대를 추진해 왔음
**이드(Eid): 이슬람력에 따라 라마단(Ramadan) 금식 종료를 기념하는 이드 알피트르(Eid al-Fitr)와 희생제를 뜻하는 이드 알아드하(Eid al-Adha)를 통칭하는 명절. 세계 최대 무슬림 인구를 보유한 인도네시아에서는 귀성 이동과 소비 수요가 집중되어 연료 사용량이 평시 대비 크게 증가하는 경향이 있음
역내 공급망 연쇄 충격
정제 · 수출 제한 조치의 파급 효과
각국 정부가 석유 수출 제한 조치를 강화하면서 공급망의 연쇄 충격이 심화되고 있다. 태국은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제외한 모든 국가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하였다. 이에 따라 자국 내 정유 시설이 없어 인접국의 석유제품 수출에 의존하는 소규모 경제권의 조달 여건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중동 현지의 직접적인 피해도 동남아 공급망에 중장기적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전 세계 LNG 공급의 약 5분의 1을 담당하는 카타르의 라스 라판(Ras Laffan)* 산업단지가 이란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복구에 3~5년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단기 공급 차질을 넘어 동남아시아의 LNG 수급 구조에 중장기적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요인으로 평가된다.
석유화학 산업의 불가항력 선언과 중단
정부 차원의 수출 제한 조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민간 산업 영역에서도 공급망 붕괴의 파장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싱가포르의 아스터 케미칼스 앤드 에너지(Aster Chemicals and Energy)와 인도네시아의 PT 찬드라 아스리 퍼시픽(PT Chandra Asri Pacific)은 원자재 조달 차질을 이유로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하였다. 시암 시멘트 그룹(Siam Cement Group) 산하 계열사인 태국의 라용 올레핀스(Rayong Olefins)는 나프타(naphtha)** ·프로판(propane) 등 핵심 원자재를 조달하지 못해 플랜트 가동을 전면 중단하였다.
원유 공급 부족은 휘발유·경유·항공유·석유화학 제품 등 정제 석유제품 전반의 수급 악화로 이어지면서, 에너지 분야를 넘어 제조업·물류 부문으로 충격이 확산되고 있다. IEEFA의 샘 레이놀즈(Sam Reynolds) 연구원은 각국이 차질 공급원의 대체 확보를 위해 경쟁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나, 정유 시설의 설비 구성, 원유 품종 전환의 운영 리스크, 수송 거리와 비용 등의 제약으로 단기 대안은 극히 제한적이라고 진단하였다. 전문가들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수 주간 지속될 경우 역내 에너지 가격의 추가 상승과 사용 제한 조치의 확대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라스 라판(Ras Laffan) : 카타르 북동부에 위치한 세계 최대 규모의 LNG 생산·수출 단지로, 카타르 국영 에너지기업 카타르에너지(QatarEnergy)가 운영함. 북부 가스전(North Field)과 연계되어 있으며, 전 세계 LNG 공급의 약 20%를 담당함
** 불가항력(force majeure): 계약 당사자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예외적 사건으로 인해 계약 이행이 불가능해진 상태를 의미하는 법률 용어로, 선언 시 해당 기간의 계약 의무가 면제됨
*** 나프타(naphtha) : 원유 정제 과정에서 생산되는 탄화수소 혼합물로, 석유화학 제품의 핵심 원료이자 휘발유 혼합 성분으로 활용됨
역내 거시경제 파급과 복합 위기 가능성
보조금 재정 부담 확대와 통화정책 딜레마
유가 급등은 아세안 각국 정부의 재정 여건을 빠르게 악화시키고 있다. 연료 보조금 제도를 운영하는 국가들의 경우 국제 유가 상승은 재정 적자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태국의 경유 보조금 비용은 하루 10억 바트(약 485억 6천 만 원)를 초과하였으며, 말레이시아 역시 인상된 유가를 소비자에게 전가하지 않을 경우 재정 건전성에 부담이 가중 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유가 상승이 재정에 미치는 압박은 단순 비례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한층 크다. 유가가 오르면 보조금·보상 지출은 가파르게 늘어나는 반면, 세수·로열티 증가분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유가가 상승할수록 지출 증가와 수입 증가 사이의 격차가 확대되어 순재정 부담이 누적적으로 커지는 구조이다. 인도네시아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2026년 국가예산은 배럴당 70달러(약 10만 5천 원)를 기준으로 편성되었으나, 국영 만디리 은행(Bank Mandiri)의 추산에 따르면, 유가가 1달러(약 1,500원) 상승할 때마다 보조금·보상 비용이 약 10조 3천억 루피아(약 9,177억 3천만 원) 증가한다. 반면 같은 조건에서 세수·로열티 증가분은 약 3조 5천억 루피아(약 3,118억 5천만 원)에 그친다. 이는 부분적 산유국 지위를 보유한 인도네시아에도 유가 상승이 순재정 부담으로 귀결됨을 의미하며, 연료 보조금 제도를 운영하는 여타 아세안 국가들의 재정 건전성 압박은 구조적으로 더 큰 압박에 노출될 것으로 판단된다.
유라시아 그룹(Eurasia Group)은 각국이 도입한 한시적 보조금과 가격 상한제가 1~2개월을 넘기기 어렵다고 경고하였다. 재정 압박이 누적될 경우 보조금 축소 또는 에너지 가격의 소비자 전가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바클레이즈 인베스트먼트 뱅크(Barclays Investment Bank)의 이코노미스트 브라이언 탄(Brian Tan)은 현재 성장이 산업별·국가별로 불균등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많은 경제권에 재정 측면의 압박이 가중되고 있다고 진단하였다. 재정 부담과 더불어 통화정책 측면에서도 유사한 딜레마가 관찰된다. 고유가가 인플레이션 압력을 재점화할 경우 금리 인하 기조로의 전환이 지연될 수 있어, 성장 견인을 위한 통화 완화와 물가 안정 사이에서 각국 중앙은행의 선택지가 제한될 수 있다.
성장 둔화와 복합 위기 가능성
이번 에너지 충격은 아세안 경제가 이미 성장 둔화 국면에 진입하고 있는 시점에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영향이 클 것으로 우려된다. 아시아개발은행(ADB: Asian Development Bank)은 중동 분쟁 발발 이전 기준으로 동남아시아의 GDP 성장률이 전년도 4.5%에서 2026년 4.4%로 소폭 둔화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브라이언 탄은 역내 성장이 인공지능·데이터 센터 등 특정 부문에 집중되어 고용 창출과 임금 상승으로 폭넓게 이어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에너지 가격 급등은 이러한 불균등 성장 구조를 심화시킬 수 있으며, 수출 주도형 중소기업·서비스업 종사자·저소득 가계에 상대적으로 큰 부담이 집중될 가능성이 있다.
식량 안보 차원의 위협도 가시화되고 있다. 싱가포르 난양기술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RSIS: S. Rajaratnam School of International Studies)의 분석에 따르면, 3월은 인도네시아·미얀마·필리핀·태국·베트남 5개국의 쌀 재배 비료 살포 시기와 맞물려 있다. 공급망 혼란으로 비료 조달에 차질이 생기고 LNG 공급 차단이 비료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경우, 쌀을 비롯한 옥수수·대두·사탕수수·카사바 등 주요 작물의 수확량이 감소할 수 있다. 에너지 위기가 식량 위기와 연동되는 복합 위기로 확산될 경우, 취약 계층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한층 가중될 것으로 우려된다.
아세안의 외교적 대응
특별장관급 회의 소집과 공동 입장 표명
2026년 아세안 의장국인 필리핀은 중동 분쟁이 에너지·경제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판단 아래 아세안 특별외교장관회의를 화상으로 소집하였다. 2026년 3월 13일 개최된 이 회의에서 필리핀 외교부 장관 마 테레사 라사로(Ma Theresa Lazaro)는 회원국들이 중동 상황 및 역내 파급 영향에 대한 우려를 공유하였다고 밝혔다. 아울러 즉각적인 적대 행위 중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모든 당사국에 최대한의 자제를 촉구하였다. 라사로 장관은 중동산 수입 연료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고려하여 러시아산 원유 구매 가능성도 검토 중임을 언급하였으며, 이는 의장국의 에너지 조달 외교가 다방면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제 32차 경제장관 회의와 에너지 협력 매커니즘 논의
외교장관회의와 같은 날인 3월 13일, 마닐라 BGC에서는 제32차 아세안 경제장관 회의(32nd ASEAN Economic Ministers' Retreat)가 별도로 대면 개최되었다. 아세안 11개 경제장관은 회의 후 공동 성명을 통해 이번 분쟁이 국제 에너지 시장의 변동성 확대와 핵심 해상 운송로·공급망 교란을 초래하며 광범위한 경제적 파장을 야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제장관들은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개방 유지를 촉구하고, 역내 협력 메커니즘 가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번 사태는 아세안이 2026년 의장국 의제로 추진해 온 에너지 안보 현안을 긴급 과제로 격상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경제장관들은 에너지 전환 가속화, 공급망 복원력 강화, 디지털 경제 협력 등 당초 의제와 함께 중동 분쟁 대응을 위한 긴급 논의를 병행하였다. 이들은 글로벌 석유·LNG 공급망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추가 충격에 취약한 구조임을 인정하고, 공급망 복원력 강화·재생에너지 전환 가속화·역내 협력 심화가 경제 안정 유지의 핵심 요건이라는 데 합의하였다.
아세안 내부에서는 지역 차원의 전략 비축유 협력 및 긴급 공유 메커니즘 구축 논의도 본격화되고 있다. 제32차 경제장관 회의에서는 아세안 석유안보협정(APSA: ASEAN Petroleum Security Agreement) 이행 가속화에 합의하였다. APSA는 회원국의 석유 공급이 10% 이상 부족한 사태가 30일 이상 지속될 경우 역내 상호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메커니즘으로, 이번 위기를 계기로 5월 정상회의 이전 이행 완료를 목표로 협의가 진행 중이다. 이는 개별 국가 단위 대응의 한계를 보완하는 집단적 에너지 안보 체계 구축을 향한 실질적인 진전으로 평가된다.
* 아세안 석유안보협정(APSA: ASEAN Petroleum Security Agreement): 석유 공급 위기 발생 시 아세안 회원국 간 상호 지원을 규정한 다자 협정으로, 회원국의 석유 공급이 정상 수요 대비 10% 이상 부족한 상태가 30일 이상 지속될 경우 역내 다른 회원국에 공급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 1986년 체결된 아세안 석유안보협정을 2009년 개정한 것으로, 지원은 자발적·상업적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구속력 있는 의무 조항은 포함되지 않는다.
결론 및 시사점
에너지 의존 구조와 비축 역량의 구조적 취약성
이번 호르무즈 해협 봉쇄 사태는 아세안의 에너지 안보 취약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에너지 공급 차질이 재정·물가·식량 안보로 연쇄되는 복합적 파급 경로가 확인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에너지 의존 구조 측면에서 아세안 회원국 대부분은 원유·LNG 수요의 상당 부분을 중동산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단기적으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공급원은 제한적인 것으로 분석된다.
비축량 측면에서도 태국(65일 이상)을 제외하면 인도네시아(21~23일)·베트남(20일) 등 주요국의 완충 여력은 일본(254일)·한국(208일)·중국(120일) 등 동북아 주요국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동북아 국가들이 수십 년에 걸쳐 전략 비축 체계를 구축해 온 반면, 아세안은 개별 국가 차원의 단기 재고 관리에 주로 의존해 왔다는 점에서 구조적 격차가 존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재정 측면에서도 유사한 취약성이 관찰된다. 연료 보조금 제도를 운영하는 국가들은 유가 급등이 곧바로 재정 부담 확대로 이어지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사례에서 보듯, 예산 가정치와 실제 유가 간의 차이가 확대될수록 보조금 정책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불확실성도 높아지는 것으로 분석된다. 보조금 축소 또는 가격 인상으로 전환될 경우 그 영향이 소규모 운송업·제조업 종사자와 같은 저소득 가계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에너지 위기의 사회경제적 파급이 상당할 것으로 평가된다.
역내 협력 체계의 한계와 향후 과제
이번 위기를 계기로 아세안 차원의 에너지 협력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나, 실제 메커니즘의 작동 여건은 여전히 제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APSA는 공급 부족 시 회원국 간 상호 지원을 규정하고 있으나, 지원이 자발적·상업적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구조상 위기 상황에서의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2026년 5월 아세안 정상회의를 앞두고 이행 가속화에 합의하였으나, 구속력 있는 협력 체계로의 발전 여부는 향후 협상 과정을 통해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카타르 라스 라판 산업단지 피해로 대표되는 중동 현지 에너지 인프라의 훼손은 단기 공급 차질을 넘어 역내 LNG 수급 구조에 중장기적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요인으로 분석된다. 이에 따라 LNG 공급선 다변화와 역내 저장 인프라 확충 논의가 가속화될 가능성이 있다. 재생에너지 전환 역시 지정학적 리스크 노출을 낮추는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으나, 전환 속도와 재원 조달 측면에서 회원국 간 역량 차이가 존재하여 획일적인 접근에는 한계가 따를 것으로 보인다.
중동 분쟁의 전개 양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의 지속 기간은 향후 아세안 내부의 에너지 협력 논의 속도에 영향을 미칠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이번 위기가 개별 국가 단위 대응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필리핀 의장국 임기 내 역내 에너지 협력 논의의 진전 수준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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