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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슬라브 민족의 자부심 - 고대 불가리아어(고대 교회슬라브어)

중동부유럽 일반 김원회 한국외대 그리스-불가리아어과 부교수 2013/02/18

다양한 문화 양상이 혼재되어 있는 발칸 문화권에서 불가리아와 슬로베니아, 구 유고연방 국가들이 주를 이루는 슬라브 문화권은 문화적 측면에서 단연 그 지역의 주도 세력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슬라브 문화권으로 묶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이들의 언어는 흔히 슬라브어(Slavic language)로 지칭되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모국어 화자들을 갖고 있는 친족어로 알려져 있다. 이 슬라브어의 역사는 불가리아어의 역사에서 시작되고 그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불가리아인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슬라브 문화의 초석을 쌓았고 그들의 언어가 아직도 슬라브 민족의 주류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언어-문화적 선민의식을 갖고 있다. 고대 불가리아어의 창제 과정과 슬라브 민족 문화 형성에서 고대 불가리어의 역할을 단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의 수용


비잔틴 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고대 불가리아 왕국 864년 당시의 황제였던 보리스 1세는 기독교를 정식 종교로 수용하게 되고 그 자신도 이듬해에 개종을 하게 된다. 기독교는 공식적인 수용 훨씬 이전에 불가리아에 전래되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발칸반도 선교여행, 로마제국의 발칸 반도 지배(B.C. 1세기-A.D. 681년), 소피아 주교좌의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참석(325년), 바르나(Varna), 네세버르(Necebur), 스타라 자고라(Stara Zagora)등 고대 종교 도시의 부흥 등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신교를 숭배하던 원시 불가리아 민족과 슬라브족들은 비잔틴으로의 종교-문화적 동화를 두려워하며 기독교의 수용을 거부한다.

기독교의 공식적인 수용은 당시 새로운 국가 질서의 확립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다신교적 신앙과 관습을 없애는 것, 그리고 기독교의 왕권신수설이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국가의 정치적 안정을 취하는 데 적절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또한 당시 유럽의 풍토가 기독교 국가만을 동등한 국가로 인정하였으므로 기독교 개종은 당시 국가 발전을 위해 정해진 수순이었다. 기독교의 수용은 결국 정치적 안정과 발전을 꾀하려는 지도자의 의지와 의도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는 생활-문화 전반에 엄청난 파급 효과를 이루어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비잔틴 정교회와는 독립된 불가리아 정교회를 세우려는 목적을 가진 고대 불가리아어를 사용한 교회 의식 집전과 성경 편찬 사업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 불가리아어의 창제와 발전은 불가리아 민족의 민족국가 형성과 민족 교회 설립을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된 것이며 슬라브 문화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고대 불가리아어의 창제와 전파


기독교의 수용에 의한 고대 불가리아어의 창제와 발전은 9세기 후반(A.D. 863년)부터 시작된 슬라브어 문어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고대 불가리아어의 창제와 발전은 모라비아 공국(Moravia)을 기점으로 시작되어 불가리아에서 10세기전후에 꽃을 피우게 된다.

중세 시기(8세기전후)에 아시아계 유목민이었던 원시 불가리아 민족과 합쳐져 불가리아 민족을 형성한 슬라브인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 즉 구어를 갖고 있었다. 이 언어는 비잔틴 제국 내에서 863년 끼릴-메토디 형제(Cyril and Methodius)에 의해 문어로 창제되고, 그리스어로부터 각종 교회 서적을 번역하는 데 이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끼릴이 발명한 이 최초의 슬라브 문어(고대 불가리아어 혹은 고대 교회슬라브어-동방 교회에서 이 언어의 역할 때문에 서방 학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명칭, Old Church Slavic)는 글라골리짜(Glagolica)라는, 그리스어 초서체 소문자(Minuscules)에서 영향을 받은 문자로 표기되었으며, 당시 살로니카(Salonica, 오늘날의 그리스 북부 데살로니키 지역) 지역 방언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과 함께 우리는 시편과 4복음서, 사도행전 등을 선교 여행 전에 맨 먼저 번역했다고 서술하고 있는 메토디 생애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пьсалтъірь бо бѢ тъкмо н єваΝглнѤ съ апслъмь н нзбьраΝъінмн
слѸжьбамн црквьΝъінмн съ фнлософъмь прѢложнлъ пьрьѢѤ

시편을,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선별 된
교회 예배서적들을 우선 번역하였다
       (메토디 생애전 제 15장의 일부)


863년 모라비아 공국의 로스티슬라브 황제(Rostislav, 846-870)는 당시에 강성했던 고대 불가리아 왕국을 견제하고 자국 내에서 독일 사제들의 영향력을 축소하며 민중들이 슬라브어로 예배를 볼 수 있도록 비잔틴의 총주교 포티(Fotij)에게 슬라브어로 포교할 수 있는 사제의 파견을 요청하게 된다. 그의 요청에 따라 끼릴-메토디 형제가 적임자로 선발된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불가리아계 어머니로부터 불가리아어 구어를 전수 받아 완벽한 슬라브어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동생인 끼릴(선교 여행 전에는 세례명이 콘스탄틴Konstantin이었음)의 학문적 식견이 뛰어났으며 선교 여행을 출발하기 전 그는 이미 주요 교회 서적을 고대 불가리아어로 번역을 끝냈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번역한 교회 서적을 가지고 모라비아 지역에서 고대 불가리아어로 선교 활동을 펴게 된다. 특히 당시 독일 사제들에 의해 주창된 교회 의식에서의 성 3 언어설(성스런 교회에서는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만으로 전례를 행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하며 슬라브어 포교에 앞장선다. 다른 한편으로 슬라브어를 기독교 국가에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하여 로마로 여행을 가게 된다. 서기 867년 말 혹은 868년 초로 알려진 이들 형제의 로마 교황 아드리안 2세(Adrian II)의 알현에서 교황은 고대 불가리아어를 유럽의 4대 언어(Lingua quarta)로 인정하고 이 언어로 예배를 보고 선교하는 것을 허락하게 된다. 고대 불가리아어가 유럽 문명권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판노니아(Panonia)지역에서의 고대 불가리아어에 의한 선교도 이 시기에 이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모라비아 공국에 독일 사제들의 지속적인 탄압, 고대 불가리아어를 사용하는 선교에 우호적이었던 로스티슬라프(Rostislav)황제의 뒤를 이어 재임한 스뱌토폴크(Svjatopolk)황제의 슬라브 사제에 대한 탄압, 끼릴 - 메토디의 죽음 등의 요인으로 이들 형제의 모라비아 선교는 20여 년 만에 끝나게 된다(863-885). 이 기간 동안 끼릴-메토디와 그의 제자들은 끼릴-메토디 형제의 언어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초기 문헌들, 예를 들면 Zographensis, Marianus, Assemanianus 등 4복음서들과 사도행전 그리고 Sinaiticum 등의 시편문헌들을 재번역 및 재 필사하는 작업에 헌신하였다. 이들이 번역과 개작에 주로 이용한 문자체는 전술한 글라골리짜였다.

이제 고대 불가리아어 연구의 중심지가 불가리아로 바뀌게 되고, 이들 형제의 주요 제자들이 불가리아로 피신하게 된다. 불가리아가 최초의 슬라브 문어 창제 및 발전에 기여하게 된 두 번째 순간이다. 이들은 당시 프레슬라프(Preslav)에 수도를 두고 있던 제1차 불가리아 왕국에 두 현제, 보리스(Boris, 852-889)와 시메온(Simeon, 893-927)의 지원으로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반에 걸쳐 교회 서적의 대대적인 재 편찬 및 번역 사업을 주도하게 된다. 특히 이들이 좀 더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시메온 황제의 재임기시였으며, 황제 자신이 문예 부흥과 슬라브 문헌 번역, 필사 작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흔히 이 시기를 시메온 대왕의 문예 부흥기(Zolotoj vek)라고 한다. 모라비아 지역에서의 번역과 필사가 고대 불가리아어에 의한 교회 서적의 첫 번째 번역 및 필사였다면, 제2차 작업은 시메온 황제 시기에 불가리아 왕국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편집은 시메온 대왕의 이름을 따서 시메온 편집 혹은 프레슬라프 편집이라고 하는 데 주로 사도행전 문헌에서 많은 개작이 이루어 졌고 복음서와 시편문헌에서는 상대적으로 개작이 적게 이루어 졌다. 이 편집본들에서는 당시 발칸 반도 동북부에서 통용되었을 것으로 간주되는 슬라브 구어적 요소가 발견되며 그리스어 원본으로부터의 독자성 확보 노력도 발견되고 있다. 그와 같은 예는 특히 고대 교회 슬라브어 내에 그리스어 단어에 대한 대용어가 존재할 경우 그리스어 단어의 사용을 회피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이 이용한 문자체는 끼릴리짜(Cyrillica)였다.

고대 불가리아어 초기의 글라골리짜 문헌은 대부분 남서 불가리아 지방에 퍼져 있었다. 당시 불가리아 황제인 보리스와 시메온의 남서 지방 특사로서는 끼릴과 메토디의 직계 제자인 클리멘트(Climent)와 나움(Naum)이 활동하였다. 클리멘트는 886년 오늘날의 마케도니아 오흐리드(Ohrid)시 근방의 쿠즈미체바(Kuzmicheva)로 파견된다. 이들이 당시 고대 불가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플리스카(Pliska)나 프레슬라프가 아닌 서부의 변방에서 종교 활동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로마 교회와 비잔틴 교회로부터 자유로운 곳에서 선교 활동을 하려했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직계 스승인 끼릴과 메토디의 유업을 살리기 위하여 이미 끼릴리짜가 퍼져있는 동부 지방을 등지고 서부의 변방으로 향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그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부의 프레슬라프에서는 콘스탄틴(Konstantin), 요한 에크자르흐(Joan Ekzarh), 체르노리제쯔 흐라버르(Chernorizec Hrabor), 수도사 독스(Doks), 뚜도르 독소프(Tudor Doksov), 수도사 그리고리(Grigorij), 수도사 요한(Joan), 시메온(Simeon) 황제 등이 문서의 필사와 재편집 작업을 끼릴리짜로 하게 된다.

물론 이 당시의 문자로는 글라골리짜와 끼릴리짜가 공존하였다. 이렇게 불가리아 제1차 왕국의 수도였던 동북부의 프레슬라프(Preslav)는 서부의 오흐리드(Ohrid)와 더불어 당시 고대 교회 슬라브어 연구의 메카가 되었으며 끼릴-메토디 언어 전통을 여타 슬라브 민족들에게 알리는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세계학계에서 고대 교회 슬라브어로 지칭되는 초기 슬라브 민족의 문어는 고대 불가리아 교회의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우선적으로 (교회 의식과 선교를 목적으로) 창제되었으며, 계통상 고대 불가리아어의 언어적 전통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고, 이후에 이러한 문어적 전통이 여타 슬라브 국가들의 문어 형성에 근간을 이룬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면 러시아에 문어전통 확립에도 고대 불가리아어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서기 988년 키예프 공국(러시아)의 기독교 개종과 더불어 시작된 고대 불가리아어 서적의 러시아 유입은 고대 러시아어 발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블라디미르 (Vladimir)대공에 의한 기독교 개종 이전에도 끼예프 공국 지역에서는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기독교 서적이 유포되었음은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증명된다. 그러나 당시 끼예프 공국 시기의 문헌이 전래되고 있지 않으며, 본격적으로 문어와 구어의 맥락 하에서 교회 언어와 민중 언어, 문화 언어와 생활 언어로서의 역할을 고대 불가리아어와 고대 러시아어가 각각 담당하던 시기는 기독교 전례 이후임을 부정할 수 없다. 러시아에서 고대 불가리아어의 문어적 전통은 18세기 러시아 민족시인 푸쉬킨(Pushkin)의 등장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불가리아인들이 슬라브 문화권에서 자신들의 위치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유래한다.


(1) 끼릴-메토디의 고대 불가리아어 문어 창제(글라골리짜 창제)
(2) 고대 불가리아인들에 의한 슬라브 문어 전통의 공고화(끼릴리짜 창제)
(2) 고대 불가리아어의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권으로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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