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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체코정치가들의 소극정치와 능동정치 - 이원체제도입 이후의 시기를 중심으로-

체코 김장수 관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2013/04/08

1867년 이중체제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도입된 이후 제국 내 체코 정치가들은 그러한 질서체제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따라서 이들은 외부 세력, 특히 러시아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자신들이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 즉 자치권 획득내지는 민족적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체코 정치가들의 시도가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빈(Wien) 정부는 이들의 행보가 제국의 안전에 심각한 위험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이에 따라 빈 정부는 문제해결의 방안을 모색했고 거기서 친체코 정치가로 알려진 헬퍼트(Helfert)를 정부특사로 임명하여 프라하로 파견하는 적극성도 보였다. 그러나 헬퍼트는 보헤미아의 주도(州都)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빈 정부에 대한 체코 정치가들의 불신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체코 정치가들과의 접촉에서 헬퍼트는 체코 정치가들이 빈 정부 및 황제로부터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했다. 아울러 그는 이들의 지향목표가 이제는 자치권확보가 아닌 민족의 독립이라는 사실도 파악 했다. 실제적으로 체코 정치가들과 지식인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을 인정하고 거기서 슬라브 제민족의 자치권획득을 지향했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Austroslawismus)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한 체코 정치가들의 부정적 시각이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호헨바르트(Hohenwarth)의 빈 정부는 이들과의 충돌을 끝내려고 했다. 빈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 역시 공감했는데 그것은 그 자신이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그는 공식 석상에서 자신과 자신의 선조들은 보헤미아 왕국의 국법적 존재를 한 번도 부인한 적이 없었음을 누누이 강조했다. 또한 그는 체코 민족이 그동안 합스부르크 왕조를 지속적으로 지지한 사실도 인위적으로 부각시켰다. 1871년 9월 12일 당시 통상장관이었던 쉐프레(A. Schäffle)의 주도로 작성된 황제선언서(fundamentálni články)가 공포되었는데 거기서는 보헤미아 왕국의 제 권한을 인정한다는 것이 명시되었다. 이 선언서의 핵심적 내용은 체코 정치가들이 이중체제를 인정한다면 여타 문제에 대한 자치권을 체코 지방정부에게 부여하고 보헤미아 의회의 권한 역시 확대시켜준다는 것이었다. 또한 보헤미아 지방내의 체코인들과 독일인들 간의 문제는 기존의 지역행정구역을 거주지에 따라 새롭게 획정하여 해결한다는 것도 약속했다. 이러한 기본조항은 체코민족의 자결과 자율을 위한 진일보적 발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선언서의 제 9항에서는 향후 보헤미아 지방에서 관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독일어 및 체코어 모두 능통해야 한다는 것도 거론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역시 선언서발표로 체코문제가 해결(české vyrovnání)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는데 그것은 도나우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체제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의 삼중체제로 변형될 수 있다는 자신의 판단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러나 이 선언서는 제국 내 독일 정치가들과 헝가리 정치가들의 반발, 특히 보이스트(Beust), 홀츠게탄(Holzgethan), 그리고 언드라시(Andrássy)의 강력한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 당시 독일 정치가들은 선언서가 공포될 경우  어떠한 상황이 초래될 것인가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 내에서 슬라브적 우위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빈 정부가 황제선언서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통합독일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러한 것은 프란츠 요제프 1세로 하여금 자신의 의도를 포기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71년 10월 24일 보헤미아 지방의회에서 황제선언서를 공포하려는 공식적 일정을 취소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해 10월 21일에는 체코 민족의 대표들과 재협상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체코 정치가들, 특히 리게르(Rieger), 프라차크(Pražák), 롭코비츠(Lobkowicz), 그리고 클람-마르티니크(Clam-Martinic)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분노를 표시했고 그것은 이들로 하여금 빈 정부와의 어떠한 타협도 포기하게 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됨에 따라 빈 정부 역시 강경책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빈 정부는 콜러(Koller)남작을 프라하 총독으로 임명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프라하에 도착한 콜러는 소요적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 체코 정치가들의 반정부적 활동을 강제적으로 중단시켰을 뿐만 아니라 반정부적 신문의 발행도 중지시켰다. 이후부터 체코 정치가들은 정치적 은둔생활내지는 소극정치(pasivní politika)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빈 정부 및 황제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소극정치는 많은 문제점들을 양산했다. 특히 보헤미아 지방의회의 참여거부로 체코인들은 일상생활의 여러 부분에서 심대한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점차적으로 이들은 누적되는 경제적 손실 및 교육문제로 수동적 저항에 대한 자신들의 불만을 표시하는 적극성도 보이기 시작했다. 1873년 모라비아(Mähren) 지방의 대표들이 지방의회(zemské snĕm) 참석을 결정하고 다음해에 빈 제국의회에 참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체코 정치가들 역시 유연하고 현실적인 정치를 통해 체코인들의 여론에 신속히 대응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도 강화시킬 필요성을 점차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1874년에 접어들면서 보헤미아 지방에서도 모라비아의 예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하에서 1874년 12월 27일 진보민족당(Národní strana svobodomyslná)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는데 이 당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체코당(Mladočeši)으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이 당의 당원들은 제국의회의 참석을 공론화시키는데 주력했고 그것은 그동안 견지되었던 소극정치의 종료도 가져왔다. 그레그르(E.Grégr/J.Grégr)형제와 슬라드코브스키(K.Sladkovský)의 주도로 탄생한 진보민족당, 즉 신체코당은 구체코당(Stařočeši)과 마찬가지로 지지 세력의 기반을 도시시민계층에서 찾고자 했다. 이들의 정치적 이념은 구체코당과 일치했지만 구체코당보다는 다소 진보적이었다. 그리고 구체코당이 도시의 상류층과, 특히 진보민족당의 출현이후 교회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진보민족당은 상공인들과 교사 및 학생들을 포함한 반교회적 인사들로부터 지지를 확보했다.

진보민족당의 조직은 이전의 어느 정당들보다도 체계화되었고 그들이 제시한 프로그램 역시 보다 구체적이었다. 이 당은 그동안 체코 정치가들이 거부한 빈 제국의회 및 보헤미아 지방의회의 참석, 시민권의 확대, 보통선거제의 도입, 그리고 교육제도개선방안마련 등을 그들 정당의 중요한 강령으로 채택했다. 아울러 이들은 체코민족의 사회적 위상뿐만 아니라 경제적 위상 증대에 필요한 방안도 강구한다는 입장을 표방했다. 진보민족당의 이러한 정책들은 유리우스 그레그르(J.Grégr)가 창간한 ‘민족신문(národní listy)’에 게재되어 널리 홍보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출범한 진보민족당은 점차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시켰고 구체코당에서 동조세력을 얻을 정도로 성장했다. 1878년 구체코당의 대표는 진보민족당의 현실정치론을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힘에 따라 양당 간의 관계는 정치적 사안을 공동으로 논의할 정도로 긴밀해 졌다. 이후부터 양 당의 대표자들은 체코지방의회의 참석여부를 집중적으로 토론했고 거기서 이들은 제국의회에도 등원해야 한다는데 견해를 같이 했다. 이로써 체코 정치는 기존의 소극정치를 포기하고 능동정치(aktivní politika)를 지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우에르스페르크(Auersperg)의 정권이 등장한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정치 역시 활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정치에서의 안정은 보다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878년 6월 13일부터 베를린(Berlin)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Bosnia)와 헤르체고비나(Herzegovina)에 대한 점유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제국 내 독일 정치가들은 빈 정부의 이러한 점유에 대해 심한 우려를 표명했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아도 슬라브 인들이 수적 우세를 보이던 제국의 민족구성에서 이들 민족이 차지하는 비율이 이전보다 훨씬 높아지리라는 것과 거기서 독일인들의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 같다.

독일인들의 이러한 우려 하에서 타페(Taaffe)내각이 1879년 7월 12일 출범했다. 타페는 체코 정치가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체코 귀족들의 지지를 얻은 후 사안에 따라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던 구체코당과 진보민족당의 지지를 얻는데도 성공했다. 또한 그는 폴란드의 대귀족들과 오스트리아 가톨릭당의 우익세력도 확보했다. 이에 따라 제국의회 내에서 그의 정책을 추종하는 의원들의 수는 179명에 달했다. 초당파적인 정부를 표방하면서 사안에 따라 각기 다른 정당들의 지지를 이끌어 낸 타페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보수주의자였지만 사회 안정을 위해서는 과감한 개혁도 주저하지 않던 실용주의자이기도 했다. 이 당시 타페는 체코 정치가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을 정확히 직시했는데 그것은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이 빈 정부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타페의 분석처럼 체코 정치가들은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이 빈 정부를 주도할 경우 자신들의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비독일계 민족에 대한 배려정책을 포기하거나 축소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체코 정치가들의 아킬레스건을 잘 알고 있던 타페는 체코 정치가들에게 결정적인 양보를 하기보다는 약간의 양보, 즉 ‘부스러기 양보(drobeček)'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과업을 달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각료 자리를 체코 정치가들에게 양보한다든지 또는 1880년 4월 19일 이른바 스트레마이르(Stremayr) 법령에 따라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관공서 및 법원에서 체코어와 독일어에 대해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 등이 그 일례라 하겠다. 그런데 스트레마이르 법령에서 거론된 동등한 자격은 관공서와 개인의 관계, 즉 독일인이면 독일어를 사용하고, 체코인이면 체코어를 사용한다는 것일 뿐이지, 관공서와 관공서간의 행정언어나 관공서내의 행정언어(innere Amtssprache)는 여전히 독일어로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양보들 중에서 1882년에 시행된 프라하 대학의 분리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이라 하겠다. 1620년 11월 8일에 펼쳐진 빌라호라(Bilá hora)전투 이후 완전히 독일화된 프라하 대학이 독일 대학과 체코 대학으로 분류됨으로써 향후 체코 교육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하겠다. 이제 체코 학생들은 대학에서 자신들의 언어인 체코어로 공부하고,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정책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1882년에 개정된 선거법을 들 수 있다. 개정된 선거법에서는 기존의 차등선거 하에서 적용되었던 선거권부여 조건, 즉 직접세의 하한선을 10 굴덴(Gulden)에서 5 굴덴으로 하향시켜 체코인들에게 보다 많은 참정권을 부여하려고 했다. 새로운 선거법에 따라 1883년 보헤미아 지방의회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거기서 체코인들은 167석의 의석을 차지했다. 이에 반해 독일인들이 차지한 의석은 75석에 불과했다.  

그런데 능동정치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이처럼 몇몇 양보를 얻어내는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체코의 정치가들이 보헤미아 지방의회와 제국의회에서 합리적인 사고 및 전문성에 바탕을 둔 정치문화를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는 점이 더 크고 중요한 성과라 하겠다. 이들이 소극정치를 펼칠 때는 도덕적 고결성과 굽힐 줄 모르는 저항성 및 선동성으로 충분했지만, 이제는 내실 있는 전문성과 인내 및 타협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도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코 정치가들에게 민족과 국가 간의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는 점이 의회활동의 또 다른 성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체코인들은 자신들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관료로써 근무하는 것을 더 이상 반민족적인 행위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고 그것은 체코인들의 사회진출 및 지위향상을 크게 신장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이후부터 사회 각 분야에서 체코 전문가들의 배출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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