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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프라하 슬라브 민족회의(Slovanský sjezd v Praze roku:1848)

체코 김장수 관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2013/04/18

3월혁명(1848)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내 슬라브 정치가들은 제국의 적지 않은 지역, 즉 독일 연방에 포함된 지역들이 통합 독일에 편입되는 것과 거기서 비롯될 오스트리아 제국의 붕괴를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들이 통합 독일에서 그들 민족의 법적․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지 않고 오히려 격하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제국의 존속을 그들의 최우선 정책 내지는 과제로 삼게 되었는데, 그러한 것은 이들이 제시한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Austroslawismus)적인 관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Frankfurter Nationalversammlung)의 활동이 5월 18일부터 본격화되었고 거기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가 ‘신독일’에 편입되어져야 한다는 대독일주의적 주장이 정식의제로 채택됨에 따라 제국 내 슬라브 정치가들은 그것에 대한 대비책마련에 나섰다.

1848년 4월 20일 아그람(Agram; 오늘날의 Zagreb)의 언론가였던 쿠쿨레비치-사크신스키(Ivan Kukuljevič-Sakcinski)가 ‘달마치아신보(Novine Dalmatinsko-Horvatsko-Slovenske)’에 슬라브 제 민족 간의 결속 필요성을 강조한 기사(‘Kavka treba da bude u obće politika naša’)를 투고했다. 여기서 그는 프랑스인, 영국인, 이탈리아인, 그리고 독일인들이 민족통일을 실현했거나 또는 거의 실현 단계에 이르렀음을 거론했다. 이어 그는 긴 역사의 슬라브 민족들이 자신들의 찬란한 문화 및 정치(민주주의적:첨부) 체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민족 간의 결속 및 통합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그는 범슬라브 세계의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슬라브 민족회의(Sobor)의 결성을 통해 슬라브 민족의 단결이 가능하다는 관점도 피력했다. 아울러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 내 슬라브 민족뿐만 아니라 러시아, 폴란드, 그리고 독일권(프로이센, 작센)의 슬라브 민족들도 이러한 민족회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도 역설했다. 끝으로 그는 헝가리 정부가 자신들의 지배하에 있던 슬라브 민족들에게 자치권 및 동등권을 보장하지 않을 경우 이들은 헝가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크로아티아 인들의 향후 대응방향에 대해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제안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체를 지향한 것이 아니라 이 제국 내 슬라브 민족의 법적·사회적 동등권을 보장받기 위한 연방체제의 도입을 목표로 설정했는데 그것은 범슬라브주의를 핑계로 슬라브 세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던 러시아와 독일권 사이에서 슬라브 제 민족의 완전한 독립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슬라브 민족회의에 대한 개최필요성이 공식적으로 거론됨에 따라 그것에 대한 슬라브 세계의 관심 역시 크게 증대되었다.

점차적으로 팔라츠키(F.Palacký)를 비롯한 체코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향후 개최될 슬라브 민족회의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 파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결정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과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간담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에는 제국 내 슬라브 지식인들도 대거 참여했다. 모임에 참석한 대다수의 인사들은 쿠쿨레비치-사크신스키가 제의한 슬라브 민족회의를 긍정적으로 보았고, 그러한 것을 구체화시키는데도 동의했다. 이들은 ①슬라브 민족회의를 5월 21일에 프라하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②제국 이외의 지역에서 참가하는 인사들에게도 임시자격(hostúčastník)을 부여하며, ③회의기간 중 독일통합에 대한 대비책과 제국분열을 저지할 수 있는 방안 등도 구체적으로 마련하기로 결의했다. 4월 17일 프라하(Praha)에서는 슬라브 민족회의 개최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그 첫 번 째 모임이 4월 30일 같은 도시에서 개최되었다. 팔라츠키는 개최준비위원회에서 오스트리아제국의 존속에 대해 슬라브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그러한 것은 자신이 프랑크푸르트로 보내는 거절편지(Absagebrief nach Frankfurt)에서 밝힌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적 관점을 다시금 밝힌 것이라 하겠다.

슬라브 민족회의가 5월말이나 6월초 프라하에서 개최된다는 것이 가시화됨에 따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오스트리아 제국 내 슬라브 정치가들, 특히 체코 정치가들의 움직임에 대해 비교적 높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참석자들의 대다수가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권으로부터 이탈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렉크(T. Mareck), 노이벨(Dr. Neuwell), 지스카라(Dr. Giskara)와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 의원들은 프라하에서 체코 정치가들과 접촉을 모색했고 거기서 이들은 슬라브 정치가들에게 민족 간의 불평등을 해소시켜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러나 팔라츠키를 비롯한 체코 정치가들은 프랑크푸르트측의 이러한 접근시도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슬라브 민족의 사회적 지위가 ‘신독일’에서 향상되기보다는 오히려 악화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슬라브 민족회의 개최준비위원회는 대회준비를 위한 작업을 계속했다. 이에 대해 제국 내 독일인들은 슬라브 정치가들의 행보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는데 그러한 것은 당시 독일 신문에 실린 한 논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논설에서는 우선 슬라브 민족회의의 개최 목적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것에 따를 경우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신생 슬라브 왕국을 탄생시키는 것이 슬라브 민족회의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어 논설에서는 슬라브인들의 시도에서 비롯될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거론했는데 그것은 첫째, 오스트리아 제국의 많은 지역이 슬라브 왕국에 편입되고 동시에 독일권으로부터도 완전히 이탈된다는 것이다. 둘째, 독일인과 슬라브인 들이 혼재하는 지역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설을 통해 제국의 전체 인구 중에서 단지 22%만을 차지하던 독일인들이 가장 우려했던 점은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에 따른 제국 개편이 슬라브 민족의 지배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저지활동과 제국 내 독일 정치가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슬라브 민족회의는 1848년 5월 31일 프라하에서 개최되었다. 슬라브 민족회의의 참석자는 모두 360명이었는데, 이중에서 정식대표는 319명이었고 나머지는 손님내지는 임시대표자의 자격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시민 계층이었는데 이 점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구성분포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프라하 일간지들은 당시 개회식에 대해 상세히 보도했는데 그것에 따르면 노이베르크(Neuberg)가 임시 의장직을 맡아 체코어로 개회 선언을 했고, 그의 제의에 따라 팔라츠키가 의장(starosta)으로 추대되었다. 팔라츠키의 의장직 수락 연설은 슬라브 민족의 자유. 동등권을 옹호한 일종의 민족선언서라 할 수 있다. 그는 슬라브 민족이 처음으로 상호 이해와 그것을 토대로 한 협력관계구축을 위해 보헤미아 왕국의 옛 수도인 프라하에 모였다고 전제한 후, 자유주의와 평등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기 때문에 슬라브 민족에게 결코 낮선 것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따라서 슬라브 민족들은 그들이 타민족과 마찬가지로 법 앞에서 동등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독일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독일 민족은 “네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말라(Was du dir nicht wünchst, thue auch einem andern nicht)”는 격언에 따라 다수 민족의 법적․사회적 동등권을 인정하고 그것의 실현에 대해서도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팔라츠키의 관점이었다.

슬라브 민족회의 개최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샤파르지크(P.J.Šafarík)도 개회식장에서 찬조연설을 했는데 거기서는 특히 슬라브 민족의 자각(sebevědomý)이 강조되었다. 샤파르지크는 우선 슬라브 민족이 독일화를 기피했기 때문에 독일인들로부터 미개인이라는 멸시를 받아 왔음을 언급했다. 이어 그는 슬라브 민족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특성을 찾으려고 할 때 독일인들은 그러한 것을 조국과 자유주의에 대한 반역행위로 간주하려고만 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샤파르지크는 슬라브 민족의 대표들이 프라하에 모인 것에 대해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즉 그는 슬라브 민족들이 슬라브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던지 아니면 슬라브 민족이라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거론했던 것이다.

다음날부터 슬라브 민족회의는 현안 문제들에 대한 논의를 개시했다. 그리고 6월 5일에 개최된 총회에서는 슬라브 민족회의에서 다룰 구체적 주제들이 거론되었고 거기서 다음의 세 가지가 주제로 채택되었다. 첫째, 유럽 제 민족에게 보내는 선언서를 작성한다. 둘째, 오스트리아제국내 슬라브인들의 희망사항을 정리·요약한다. 셋째, 슬라브 동맹 창설에 필요한 방법과 수단을 제시한다.

슬라브 민족회의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돌발변수가 프라하에서 발생했다. 그것은 빈 정부가 추진한 기존질서체제로의 회귀정책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오순절소요(Pfingstaufstand)였다. 6월 11일 프라하 대학생 슬라드코프스키(K. Sladkovský)의 주도로 시작된 이 소요에는 대학생들과 노동자 계층, 특히 제빵공 들과 인쇄공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소요 기간 중 슬라드코프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은 빈 정부의 복고주의적 정책을 신랄히 비판했다. 아울러 이들은 제 1차 슬라브민족회의에서 지향한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강력히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을 해체시켜 독자적인 슬라브 제국을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프라하에서 전개된 상황에 우려를 표명한 빈 정부는 가능한 한 빨리 오순절소요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거기서 무력적인 개입도 밝혔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됨에 따라 슬라브 민족회의에 참석한 정치가들은 민족회의의 활동이 조만간 중단되리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민족회의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확보하기 위해 6월 12일 긴급총회를 개최했다. 일부 참석자들은 〈유럽 제 민족에게 보내는 선언서〉작성에 앞서 자신들의 관점을 피력했는데 거기서는 형제애, 민족적 동등성 보장, 민족적 자유(직접선거권, 지역자치권, 언론 및 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 국민무장, 사회적 개혁, 그리고 슬라브 지부의 통합 등이 선언서에서 거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팔라츠키는 자신이 최종적으로 작성한 선언서에서 이들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렴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시기의 시대정신도 동시에 부각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선언서에서는 우선 시대정신이 슬라브인들을 고무시켰고 그들로 하여금 자유, 동등성, 그리고 형제애도 확인하게 했다는 것이 거론되었다. 또한 선언서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역사적․문화적 측면에서 슬라브 민족이 하등의 차별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강조했다. 특히 강자의 권리만을 인정하는 봉건제도가 게르만 민족의 산물인데 반해 자유·평등·우애의 프랑스혁명 이념은 본래 원시 슬라브 공동체(praslovanský obec)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제기되던 슬라브 민족의 동등권 요구를 이론적으로 강력히 뒷받침하려고 했다. 선언서는 영국인들이 아일랜드 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한 반면 독일인들은 슬라브 민족에 대해 그러한 것을 허용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음을 지적했다. 또한 헝가리 인들 역시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적 권한을 남용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선언서는 현재의 사상적 흐름이 새로운 정치적 양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제국 내 슬라브인들 역시 페르디난트(Ferdinand) 황제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사항 등을 밝히려 한다는 것도 언급했다. 여기서 슬라브인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정치체제가 모든 민족에게 동등권을 부여하는 체제로 변형되는 것이 자신들의 희망사항이라고 밝혔다. 만일 슬라브인들이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정의를 구현시킬 경우 폴란드 인들은 자치권을 얻을 것이고, 헝가리에서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루테니아 인들에 대한 폭력이 끝날 것이라는 예견도 했다. 그리고 오스만튀르크 제국 내의 슬라브 형제들 역시 자유를 쟁취할 것이라는 것이 선언서의 분석이었다. 그리고 선언서는 일반유럽회의를 개최하여 향후 발생하는 국제적 문제점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쳤다.

6월 13일 프라하 주재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이었던 빈디쉬그래츠(Windischgrätz)는 슬라브 민족회의에 참석한 외부 인사들의 조속한 귀환을 촉구했다. 이러한 강압적 조치에 대해 빈 정부는 동의하지 않았고 그것에 따라  빈디쉬그래츠와 프라하 총독이었던 툰(Thun)은 일시적으로 해임되었다. 그러나 빈 정부는 6월 18일 오순절소요가 진압된 이후 자신들이 취한 조치를 철회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취했는데 그것은 앞으로 혁명세력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 같다. 1,000 여명의 희생을 요구한 오순절 소요가 진압된 이후 빈 정부는 프라하 및 그 주변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그것에 따라 빈디쉬그래츠 군은 계엄군의 신분으로 프라하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어 프라하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민간과 군부 합동의 조사법정이 설치되어 프라하 소요에 참여한 인물들을 색출하여 처벌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슬라브 민족회의는 황제에게 사절단을 보내는 것을 더 이상 실행할 수 없게 되었고 조사위원회에 민족회의 활동 기간 중에 작성한 문서들의 일부만을 넘겨주게 되었다. 이렇게 오순절소요로 프라하 슬라브 민족회의의 활동은 중단되었지만 슬라브 제 민족의 정치가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자신들 민족의 향후 진로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하고 거기서 필요한 대안도 제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이 민족회의가 가지는 역사적 의의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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