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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카자흐스탄 러시아 디아스포라의 어제와 오늘

카자흐스탄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2012/03/29

중앙아시아 각국이 독립을 선언한지 20여년이 지나고 있다. 현재 중앙아시아 5개국 중에서 카자흐스탄은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을 구축하는데 가장 성공을 거둔 나라로 평가를 받고 있지만, 돌이켜 보면 이러한 긍정적 시각이 나온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러시아와 가장 근접한데다 긴 국경선을 갖고 있는 카자흐스탄의 신생 정부가 정치와 사회, 경제의 전 영역에 걸친 ‘카자흐화 정책’을 통해 새로운 카자흐인의 정부를 만들겠다고 천명하였던 독립 초기만 해도 국가의 발전 전망은 어두웠다. 특히 ‘카자흐화’ 정책의 발표 이후 1999년까지 100만 명 이상의 현지 러시아인들은 신생국의 전망을 비관하며 대탈출에 나섰다. 이를 두고 민족 간 갈등을 비롯해 그것이 경제, 산업, 문화 전반에 걸쳐 카자흐스탄의 장래를 어둡게 만들 것으로 우려하는 분석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독립 전 마지막으로 실시된 1989년 인구 조사에서 약 620만 명이나 되었던 카자흐스탄 지역의 러시아인은 950만에 달하던 전체 중앙아시아 거주 러시아인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다. 게다가 러시아인은 산업과 행정의 중심이 되는 대도시, 특히 러시아 국경이 가까운 북부 지역에 카자흐인보다 더 많은 수가 집중 거주했다. 러시아어와 그 문화 역시 이미 소련 이전 시기부터 지속된 식민의 과정을 거치며 카자흐 민족의 그것을 압도했다. 카자흐스탄의 입장에서 ‘러시아인 문제’는 안보와 사회․경제, 문화의 전 영역에 걸친 중차대한 현안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배경으로 인해 카자흐화 정책은 러시아인의 대탈출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국가 공식어로 카자흐어를 우선시하는 언어 및 교육 정책, 카자흐인이 우선이 된 사유화, 정치 조직에 관한 법령 제정, 민족회의의 설립, 아스타나로의 수도 이전과 북부 지역이 중심이 된 지방행정 구역 개편 등 1990년대에 계속해서 발표된 주요한 정부 조치들 역시 대체로 카자흐화라는 틀에서 분석되었고, 그 주된 목표는 ‘러시아인 문제’의 해결에 있다는 식의 설명이 주류를 이루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카자흐화 정책과 러시아인 문제의 이항대립적 구조에서 사실상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입장에 있던 러시아인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해보지 않고 본격적인 이주를 택했는가?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새로운 카자흐스탄 만들기의 핵심인 카자흐화 정책이 사실상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원인은 무엇인가? 이 같은 시각은 현재 카자흐스탄 사회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고 전방하는데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러시아인 이주-역사와 특성

독립 이전 카자흐스탄으로의 러시아인 이주를 살펴보면 대체로 정부의 정책적 영향이 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제정 러시아 시기는 농민층의 자발적인 이주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민이 시작된 18세기 중반 이후 시베리아로 러시아가 확장함에 따라 코삭, 농민병사 등 짜르의 군대에 포함된 이들이 ‘새로운’ 영토에서 식민 세력을 구성하게 되면서 농민과 종교적 피억압자들이 뒤를 따르는 형태였고, 19세기 후반 이래 러시아 혁명 시기까지의 이주는 농노제의 폐지(1861), 1880년대의 토지 고갈, 대기근(1891-92), 시베리아 철도의 건설 그리고 스톨릐핀 총리의 농업정책(1906-11) 등 러시아의 정치, 사회 문제들과 보다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체제가 성립된 이후 1950년대까지 러시아인 이민의 제 3기를 성격지우는 주요 사건들은 당국의 정책과 직결되어 있다. 1930-40년대의 집단화, 산업화, 스탈린 탄압 그리고 전쟁 등은 중앙아시아 지역 수형자의 이탈 억제, 국경 및 전장지역 주민(독일, 한인, 투르크인 등)의 강제이주 혹은 민족재배치, 전쟁기 동안의 산업계나 학계, 문화계 종사자 등 민간인의 대규모적인 소개(疏開) 등으로 이어졌다. 카자흐스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추진된 ‘처녀지 개간’(1954-56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 거대한 사업으로 카자흐스탄에만 약 80만 명의 젊은 슬라브계 인이 카자흐스탄에 정착했다. 결과적으로 1914년경에 전 중앙아시아에 걸쳐 약 150만 명에 달했던 슬라브인은 1959년경에 카자흐스탄에만 약 400만 명으로 늘어나 공화국 전체 인구의 반 이상(52%)을 넘어섰다.(<표1> 참조)

 <표 1> 카자흐스탄 인구의 민족구성비 

 

 

1926년

 

1936년

 

1959년

 

1970년

 

1979년

 

1989년

 

1999년

 

카자흐인

 

58.5

 

38

 

30

 

32.6

 

36

 

40.1

 

53.4

 

슬라브계 민족

 

34.9

 

51.5

 

52.1

 

51.1

 

47.9

 

43.9

 

34.4

 

특히 카자흐스탄 러시아인의 약 80%는 북부 카자흐스탄 도시에 밀집해 거주하게 되는데 이는 산업 도시들로 러시아인들을 파견한 당국의 정책에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개인의 행정, 기술적 역할을 기대하며 당국은 고등 교육을 받은 이들을 이주시키면서 정책의 중요한 부분들과 관련된 역할과 지위를 부여했다. 이는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인 이민자들은 안정과 높은 수준의 삶을 보장하는 성공의 경험으로 이어졌고, 자연히 러시아인이 중앙아시아에서 누렸던 우월적 지위를 보장했다.
러시아 디아스포라의 이같은 특성으로 인해 카자흐스탄의 러시아인들은 중앙아시아 현지 주민과의 접촉을 강화할 필요는 물론이고 문화적 활동 이외에 자신들만의 조직을 통해 사회적 요구를 관철시켜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중앙아시아 현지 민족과 민족어에 대한 낮은 지식, 카자흐 민족의 상대적으로 낮은 경제 수준이나 이들의 신념체계(이슬람), 현지민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관점 등은 러시아인 사회가 갖는 특성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고 여겨진다.

1989년 카자흐스탄 전체 인구의 37%(622만 명)를 차지했던 러시아인은 소련 해체 이후 급격한 속도로 카자흐스탄을 빠져 나갔다(<표 2> 참조). 특히 1993-99년까지 약 100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인 이주자들 중에 86%는 현직에서 일을 하고 있던 노동연령(20-55세, 64%)이거나 유소년층(22%)으로 나타났다. 이는 독립 카자흐스탄 정부가 그간 특혜를 누린 대표적 민족으로 각인되어 있던 러시아인을 지목함으로써 자민족 우선 정책의 영향과 효과를 부각시키는 정책을 폈을 때 현직에 있던 전문 고등교육 이수자들이 보다 민감하게 자신과 자녀들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하였음을 추정케 하는 부분이다. 독립 이후의 이주 역시 소비에트 시기와 마찬가지로 당국의 정책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큼을 보여준다 하겠다. 
 
                                     <표 2> 카자흐스탄 거주 러시아인의 수(1959-2009) 

1959

 

1970

 

1979

 

1989

 

1999

 

2009

 

3,974,000

 

5,521,000

 

5,991,000

 

6,227,000

 

4,479,000

 

3,793,800

 

결과적으로 1990년대를 지나면서 카자흐스탄의 러시아인 사회의 평균 연령(45-47세)은 카자흐인(23-25세)과 큰 격차를 보이며 고령화되었다. 이는 정치적 판단을 떠나 신생 독립국 정부에 대해 러시아인이 중심이었던 지역, 산업, 문화 등 전 영역에 걸친 사회적 재편이 필요함을 부칵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러시아인의 급격한 인구 감소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카자흐화 정책을 돕는 측면이 있다. 러시아인들이 차지했던 집과 일자리만이 아니라 잠재적 비용인 복지 혜택과 연금 지급 준비금에서도 그만큼 여유가 생기는 효과가 있고, 여기서 발생하는 혜택은 주로 자국민에게 돌아가는 결과로 나타났다. 동시에 그것은 같은 기간 동안 카자흐스탄의 각종 사회 개혁의 동인이 되었다. 정치만이 아니라 러시아인이 대거 빠져 나간 북부 지역에 대해 러시아인과 카자흐인의 인구 비례를 고려한 지방 행정 체제 재편, 연금 개혁, 대도시를 중심의 산업과 경제활동 전반을 검토해야 했던 것이다. 젊은이의 비율이 훨씬 많은 카자흐인을 중심으로 카자흐어 교육 정책을 입안해야 할 필요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역의 장기적 안정과 안보, 산업 활동의 연속성 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러시아인들을 대신해 지방의 카자흐인들을 대도시로 이주케 함으로써 새로운 도시의 풍경도 만들어졌다.

2009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의 국민에서 러시아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23.7%(379만 3800명)였다. 1990년대부터 보면 러시아인 인구는 40% 가량 감소한 셈이다. 러시아인의 이주는 카자흐스탄의 러시아인 이민사가 당국의 정책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며 전개되어 왔고 따라서 러시아 디아스포라 역시 독립 이후의 정책적 변화에 민감한 특성을 드러낸 현상이기도 했다. 물론 독립 이후의 정치,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배경이 있기는 하지만 러시아 디아스포라가 미래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부정적인 전망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단일한 톤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

이제 상대적으로 연장자 그룹이 잔류하게 된 카자흐스탄의 러시아 디아스포라는 마이너리티로서 자신들의 지위와 한참 진행 중인 카자흐 민족의 국가만들기 라는 상황을 수용하는 상황이다. 공격적인 자국어, 자문화 지원 정책이 발표되어 왔음에도 현실은 여전히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화가 공공 영역에서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카자흐인의 나라 역시 이를 용인하는 분위기이다. 독립 초기에 국가를 흔들었던 ‘러시아인 문제’의 정치화와 분리주의적 주장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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