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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카자흐스탄 남부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정체성

카자흐스탄 성동기 인하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 연구교수 2012/04/12

2010년 1월 1일에 카자흐스탄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해당국의 전체인구는 16,036,075명이었으며, 그 중에서 우즈베크인이 475,354명으로 2.96%를 차지하였다. 특히 우즈베크인의 89%인 425,110명이 해당국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남카자흐스탄주(Southern-Kazakhstan oblast)에서 거주하고 있는데, 이는 해당 주의 전체 인구에 17.5%가 된다.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은 구소련 마지막 인구조사에서 332,017명이었으며, 이 중에서 지금의 남카자흐스탄주에 해당하는 침켄트주(Chimkent oblast)에 285,042명이 거주하였다. 그리고 1999년도 카자흐 정부의 인구조사에서 우즈베크인은 370,663명이었으며, 남카자흐스탄주에 332,202명이 거주하였다. 전체적으로 남카자흐스탄주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의 인구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그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남카자흐스탄주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은 자신이 디아스포라가 아니라 조상대대로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키르기스스탄 남부 오쉬주(Osh oblast)와 타지키스탄 북부 소그드주(Sogd oblast)에 거주하고 있는 우즈베크인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키르기스스탄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은 키르기스인과 무력충돌을 경험하였으며, 타지키스탄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은 해당국 정부에 무력으로 저항하였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의 우즈베크인은 앞의 국가들과 달리 카자흐인과 해당국 정부와 별 다른 마찰 없이 지내고 있다. 남카자흐스탄주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곳은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굴될 만큼 사람이 살아가기에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현재 남카자흐스탄주가 해당국에서 가장 높은 인구밀도를 가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고대부터 이 지역은 시르 다리야(Syr Dariya)가 흘러가는 오아시스 지역으로서 실크로드 상인들이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길을 떠나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이곳을 떠난 대상들은 타슈켄트를 통해 사마르칸트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에 존재하는 실크로드 도시들의 명성에 가려서 이곳의 가치는 높게 평가되지 않았다. 중세에 들어서 이곳은 아랍의 침략을 받았으며 이후 이슬람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앙아시아 수피즘의 대가인 아흐메드 야사위(Ahmed Yassawi, 1093-1166)가 지금의 투르키스탄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면서 이곳은 성스러운 이슬람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중앙아시아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침켄트를 비롯한 이 지역의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이곳이 특정 국가의 지배를 받으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세기에 등장한 티무르제국시대부터였다. 이 제국을 창건한 아미르 티무르는 이 지역을 금호르드(Golden Horde)로 원정을 가는데 후방으로 활용하였으며, 동시에 아흐메드 야사위 영묘를 새롭게 건설하도록 명령하는 등 이곳을 다시 발전시켰다. 티무르제국이 우즈베크칸국(Uzbek Khanate)에 의해 무너지고 15세기 초에 카자흐인이 중앙아시아에 등장하면서 이 지역은 카자흐칸국(Kazakh Khanate)의 대주즈(The Great Juz)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17-18세기에는 카자흐칸국들을 괴롭히던 준가르(Dzhungar)의 침략과 지배를 받으면서 빈번한 전쟁으로 인해 이곳의 인구가 감소하였고 지역 경제가 쇠퇴하였다. 이후 이 지역은 우즈베크칸국 계열인 코칸드칸국(Kokand Khanate)과 부하라 에미레이트(Bukhara Emirate)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1864년 러시아제국은 침켄트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공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이곳을 지배하였다. 중앙아시아가 소비에트연방에 들어가고 1924년 스탈린에 의해서 국경이 획정되기 시작했을 때, 이 지역은 카자흐사회주의공화국에 포함되었다. 우즈베크사회주의공화국은 타지크사회주의공화국과 국경을 만들면서 타지크인이 다수 거주하는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넘겨받고 우즈베크인이 거주하는 레닌아바드(지금의 타지키스탄 북부인 소그드주)를 양보하였다. 이러한 국경선은 민족의 집단화를 막기 위한 소비에트정부의 철저한 계산속에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과정을 남카자흐스탄주는 겪어왔다. 여기서 우즈베크인이 이곳에 자신의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과 카자흐인이 이 지역을 자신의 활동무대라고 하는 것을 분석해 보겠다.

이 지역의 민족적 의미의 주인은 우즈베크인과 카자흐인 모두 아니다. 카자흐인이 등장하는 시기는 1456년 세워진 카자흐칸국이 시작되면서 부터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코칸드칸국과 부하라 에미레이트 역시 19세기 초에는 남카자흐스탄주를 지배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민족적 의미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히기는 어렵다. 소수의 지배 민족이 다수의 피지배 집단들을 통치하는 구조에서 이곳을 중심으로 뿌리내리고 살았던 민족이나 집단을 설명하고 있는 문헌은 없다. 광의의 범위에서 이 지역에 민족적 의미를 가지는 주인을 규정한다면 투르크계 민족들일 것이다. 그러나 1924년 소비에트정부의 중앙아시아 국경획정 전략은 남카자흐스탄주의 민족적 주인이 우즈베크인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소비에트정부는 중앙아시아에 국경을 그으면서 전략적으로 특정 민족이 집단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따라서 우즈베크사회주의공화국은 우즈베크인이 다수 거주하는 남카자흐스탄주 일대를 카자흐사회주의공화국에 넘겨주고 대신에 카자흐 민족계열인 카라칼팍인이 거주하는 카라칼팍(Kalakapak) 지역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을 정리하면 당시에 소비에트정부는 지금의 남카자흐스탄주에 우즈베크인이 가장 많이 거주했다고 계산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민족적 의미가 아닌 영토적 공간의 다수인으로 우즈베크인을 고려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우즈베크인 역시 15세기에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으로 남하해 온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남카자흐스탄주에서 발생한 역사를 분석해 볼 때, 우즈베크인이나 카자흐인이 이 지역의 민족적 개념의 주인이라고 정의하기는 힘들다고 판단된다. 단지 수적으로 우즈베크인이 다수를 차지했을 뿐이지 역사적으로 이들과 카자흐인이 이곳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민족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을 위한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정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즈베키스탄은 독립 이후 주변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우즈베크인의 통합 요구에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키르기스스탄의 오쉬주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우즈베크인은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에게 이곳을 모국의 영토로 통합하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슬람 카리모프는 이들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내정간섭이라는 명분으로 키르기스스탄과 충돌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지키스탄의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게 전개되었다. 타직내전이 발생하면서 가장 먼저 해당국의 정부군을 지원한 국가는 우즈베키스탄이었다. 그러나 내전이 종식되는 상황에서 에모말리 라흐몬 타지키스탄 대통령은 우즈베키스탄이 아닌 러시아에게만 감사를 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슬람 카리모프는 타지키스탄의 북부에 거주하고 있는 우즈베크인을 동원하여 그를 제거하려고 움직였다. 우즈베크 정부는 1995년부터 지속적으로 자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북부의 레닌아바드주 파벌을 지지하면서 1997년에 두 차례 쿨럅주 파벌인 에모말리 라흐몬을 암살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 외에도 1998년 레닌아바드 파벌을 지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였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 이슬람 카리모프가 타지키스탄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을 선동하여 분리독립을 요구하도록 했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해당국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과 그 지역파벌을 이용하여 정치적 저항을 시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위의 상황과 달리 남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은 카자흐인과 무력충돌을 한 적도 해당국을 향해 정치적 시위를 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모국을 향해 남카자흐스탄주를 통합시켜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우즈베키스탄이 먼저 카자흐스탄과 국경문제를 야기하면서 양국 관계를 긴장 국면으로 몰고 갔으며, 해당국의 우즈베크인이 모국과 자유롭게 왕래하는데 걸림돌을 제공하였다. 남카자흐스탄주의 주도(州都)인 침켄트는 우즈베키스탄 수도인 타슈켄트인 12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자동차로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양국이 독립은 하였지만 2000년 1월 25일까지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침켄트는 정유공장과 맥주공장이 있는 산업도시였기 때문에 우즈베키스탄 시민들이 침켄트산 정유를 밀수하여 타슈켄트에서 공개적으로 판매하였다. 이 당시에 부하라의 정유공장에서 정유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으며 품질이 침켄트산이 더 양호했기 때문에 우즈베키스탄 시민들은 침켄트를 자주 왕래하였다. 게다가 남카자흐스탄주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 학생들은 타슈켄트에 소재하는 대학교에 입학하여 통학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를 카자흐스탄이 막아 선 것이 아니라 우즈베키스탄이 철조망을 치면서 자유로운 교류를 단절시켜버렸다. 2000년 1월 25일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카자흐스탄에 통보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남카자흐스탄주와 맞붙어 있는 자국의 국경선을 기존의 거리보다 5km 더 앞으로 밀고 나가버렸다. 이후 양국은 국경을 중심으로 군대를 배치하면서 긴장을 고조시켰다. 카자흐스탄은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로 가는 길에 존재하는 자국의 국경을 폐쇄하여 우즈베키스탄 차량들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현재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은 국경 검색을 까다롭게 하여 상호간에 자유로운 왕래가 힘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주변국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을 위한 우즈베키스탄의 정책은 일관성이 없다고 평가할 수 있다. 비록 우즈베크 정부가 타지키스탄에서 우즈베크인 디아스포라를 동원하여 해당국 대통령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이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 이슬람 카리모프 정권의 개인적인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다. 키르기스스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1989년, 2010년 우즈베크인 디아스포라와 키르기스인이 무력충돌을 하였지만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오쉬주를 통합시키는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자흐스탄의 경우에는 우즈베크 정부 스스로 자유로웠던 교류를 막으면서 우즈베크인 디아스포라가 모국과 왕래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일관된 것은 우즈베크인이 다수 거주하는 주변국의 영토 일부를 자국으로 통합하려는 무리수는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남카자흐스탄주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의 정체성과 생활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곳의 우즈베크인은 모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우즈베크어 방송을 볼 수 있으며, 우즈베크어 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할 수 있다. 이처럼 지유롭게 민족성을 고취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카자흐스탄 정부의 민족정책에 기인한다. 현재 카자흐스탄에는 우즈베크인민족협회인 “Dustlik”이 있다. 이곳에서 해당국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인의 민족정체성을 함양하는 교육 프로그램과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카자흐스탄이 발전하면서 해당국으로 이주노동을 떠나는 우즈베키스탄 시민이 증가하고 있으며, 침켄트와 같은 인근 도시로 이민을 가는 경우도 빈번해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카자흐스탄에서 우즈베크인이 우크라이나인을 제치고 세 번째로 인구수가 민족이 될 수 있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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