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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타직(Tajik)문화와 이태백

타지키스탄 신규섭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2012/04/30

중국 문학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태백에 관해, 그가 타직(Tajik)인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일부 이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태백을 출신조차 불분명한 중국의 최대시인이라 부른다. 일부 이란 학자들은 이백(자는 태백, 701-762)의 부친이 코라손(후라산, Khorasan) 지역의 주지사를 지냈으며, 그의 나이 5세 때 중국 사천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태백은 당시 코라손 주의 쇄엽(현재 키르기스스탄의 토크마크 부근)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나, 중국 문헌에 따르면 679년 쇄엽은 당군이 점령, 주둔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 당서(唐書)에 나오는 쇄엽은 Suyab의 음사이며, Suyab은 Suy(수이)+ab(페르시아어로‘물'을 뜻하며, 여기서는‘강'을 의미함) 즉 수이강 이라는 뜻이다. 당시 코라손 지역은 현재의 이란의 동부지역인 코라손 주보다 훨씬 광대한 지역으로 아프가니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의 일부 지역까지 포함하며 코라소-네-보조르그(大코라손권)로 불렸다. 코라손 지역은 근대 들어 교류가 그리 활발하지 않지만 이란계 민족인 타직인들이 대체로 거주하며, 중세 대코라손권은 교류가 자유로웠던 당시 가장 중요한 지역 중의 하나였다. 지금의 타지키스탄에 인구 천만 명의 타직인이 살고 있으며, 고대 북부에는 소그드인, 남부에는 박트리아인이 거주했다. 1924년 10월 이전의 타직권은 현재의 타지키스탄 면적의 최소한 3배가 넘는다. 소비에트 정부가 중앙아시아 국경을 획정한 1924년을 기준으로, 영토 분할 문제에 있어 그 손실을 가장 많이 본 민족이 타직인이다.

역사적으로 胡人은 여러 민족을 지칭하고 있지만, 이태백이 살았던 당(唐)대에는 대체로 이란계 민족을 말한다. 이란계 민족은 크게 페르시아계와 타직계 민족으로 나뉜다. 중국으로 건너온 이태백의 부친이 이씨 성을 선택한 것과 관련해서 볼 때, 안씨, 정씨, 국씨 등과 함께 이씨도 이란(타직)인 계통의 성씨일 가능성이 있다. 8세기 중국은 이란(타직)계 호족 출신의 당나라 정권이 세력을 쥐고 있을 때였다. 지금까지 당의 이씨 황실은 혼혈족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중국국가지리󰡕에 실린 내용을 보면 이씨 황실이 호족 정권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중국에 이슬람이 도래하기 이전에 중국인들은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서역인을 호인이라 불렀다. 물론 페르시아 왕조의 중국명에 따라 안식(安息)인, 파사(波斯)인 등으로도 불렸다. 고대부터 이란(타직)계 민족들은 페르시아 본토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중국 서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거주했다. 고대 서역의 신장성에는 대체로 이란계 민족들이 거주했다.

페르시아 사산조(기원후 226-642) 시대의 이란계 언어는 국어였던 파흘라비어 이외에도 소그드어, 콰레즘어, 코탄어와 박트리아(토카리)어 등이 존재했다. 이란계 민족이 기술한 이 언어들로 쓰인 문헌들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으리라. 돈황에서 소그드어로 된 50권 이상의 불교 문헌과 불교문헌을 비롯해 여러 주제가 포함된 백 권의 코탄어 서적이 발견되었다. 사산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국과의 관계 정립에 특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사산조 최고의 성군으로 불렸던 왕조 말기의 코수루 1세는 중국의 공주와 연분을 맺기도 했다. 고대 동양의 대제국을 형성했던 페르시아 사산조가 아랍의 침략에 멸망한 사건은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불릴 정도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이태백의 시대를 전후해서 보면, 아랍에 의해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이에 따라 이란계 민족들이 중국으로 유입되는 것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부 이란 학자들은 7세기 중반 페르시아의 멸망이후 당시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에 수많은 페르시아(타직)인들이 유입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당의 역사서에도 이 왕조의 수도로 수천의 페르시아인들이 출현했다는데, 시기적으로 8세기로 언급되어 있다. 이태백이 살았던 시대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또한 726년 부하라 왕은 사신을 당의 조정으로 보내 아랍의 공격에 대항해서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로써 8세기에도 아랍의 공격이 지속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일부는 전쟁을 피해 중국으로 들어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역사서에는 이 시기에 수많은 페르시아인들이 다양한 중국의 도시에 이주했다고 언급되는데, 소수민족 중에서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출신의 이란인들이 현저하게 많았다고 한다. 물론 수도 장안에 거주했던 페르시아인들은 대부분 사산조 궁정의 고관과 최상류층으로 고대 페르시아의 주요 인물이었다. 사산조 페르시아인들은 수도에 많이 거주했는데, 당나라 황실, 고관과 최상류층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당나라 황실과 고관들은 페르시아인들의 삶의 특성, 관습, 습관 심지어 사산조 복식 착용까지 모방했고 감탄의 수준을 넘어 탄성을 연발했다고 한다. 이후 황실의 범위를 넘어, 사산조 페르시아인들의 특성들은 서서히 중국 도시들의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성행했다. 이런 페르시아인들의 영향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깊게 각인되었으며, 페르시아인들은 고대 중국에서 가장 큰 소수민족을 형성했다.

중국에 이슬람이 도래한 후 호는 서서히 회회(Hoihoi)로 대체된 것으로 보이는데, 회회는 ‘퍼르시 던(Farsi Dan, Persian Knowing)’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회회어는 페르시아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회회의 명칭을 민족에 따라 구별하지 않고 무슬림과 관련지어 사용함으로써, 이슬람교를 성립시킨 아랍과 동일한 용어로 대체되어 학문적으로도 엄청난 혼선을 빚고 있다. 우선 페르시아권 지역에 셈족의 외래 종교인 이슬람이 도입된 시기를 기점으로 페르시아의 고유 종교와 이슬람을 구분해야한다.

이슬람권에서 아랍과 페르시아의 용어를 구분해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 서역과 중앙아시아에서 타직과 투르크의 용어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인문학의 전 분야가 혼동되어 큰 혼란을 겪고 있다. 다시 말해 타지키스탄 이외의 지역은 타직인들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고대 중앙아시아와 서역은 이란(타직)계 민족들의 삶의 터전이었는데, 16세기 투르크계로 지배 민족이 바뀌면서 중앙아시아 고대와 중세의 학문적 영역이 사라질 운명에 처하면서 학문적 왜곡은 도를 넘고 있다. 이런 고대와 중세의 학문적 왜곡은 근․현대의 인문학뿐만 아니라, 고대 한국의 학문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태백의 논쟁은 이런 민족적인 구분에서 출발하여 고대 중앙아시아와 서역에서 거주한 이란계 민족과 그들의 문명이 고대 중국의 정신문화와 학문을 얼마나 풍요롭게 가꾸었는지에 관해 새삼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일부 이란 학자들의 타직계 이태백에 관한 언급은 출생을 포함해 그의 사상적 토대를 밝혀내고 많은 궁금증을 풀어내는데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태백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오랑캐(胡)의 명칭을 자신의 종족을 지칭할 때 사용했을까? 고대 페르시아의 신앙이었던 미트라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마니교는 이란계 아리안의 사유체계였다. 이런 종교들은 페르시아 남부에 본거지를 두었던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함께 중국으로 넘어가 그들의 정신세계를 형성해 주었기에 오랑캐의 문명과 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이주해온 페르시아 사산조 시민들의 종교는, 고대 페르시아 종교 중에서,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등의 추종자들이었다. 당시 장안에만 4개의 조로아스터교 사원, 하나의 마니교 사원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교회가 있었고, 중국의 다른 지역에도 존재했다.

이백의 시는 도가사상으로만 풀어내고 있는데, 이는 조로아스터교가 도가사상에 끼친 영향에 관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란계 아리안의 근본적인 사유체계는 미트라교→조로아스터교→불교→수피즘→마니교로 연결되는 신앙체계이다. 이는 고대 페르시아 종교사상의 흐름을 보여주는 계보이며, 페르시아 고유의 범신론적 사상으로 셈족의 일신론인 이슬람이 유입되기 이전의 이란 아리안족의 사유체계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볼 때, 불교 사상은 수피즘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페르시아 수피즘은 페르시아 불교가 잔존된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태백의 도가사상은 잔존된 페르시아 불교사상 즉 수피즘과도 맥락을 공유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당의 도교 역시 페르시아인의 사유체계인 수피즘과 상호 관련을 맺고 있다.

이슬람권 국가와 지역에서 흔히 쓰이는 수피(Sufi)라는 용어는 道人의 의미이며 이는 도교에서 말하는 道士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2세기 서역에 유입되기 시작한 페르시아 불교는 초기 중국 불교의 토대를 형성했다. 조로아스터교가 불교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지만, 대승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직접적인 영향아래 있었다. 조로아스터의 가르침과 노자의 도가사상과의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지만 지면상 다음 기회에 기술하기로 한다. 중국문명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노자가 聖者 조로아스터의 영향을 어떻게 받았는지 살펴보는 것은 고대 아시아의 양대 문명 간에 교류의 흔적을 밝히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필자는 이런 문명교류사적 시각에서 이태백의 시를 분석해야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으며, 앞으로 그의 시를 둘러싼 논쟁은 한층 더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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