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영역 건너뛰기
지역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오피니언

투르크메니스탄 독립 20년: 회고와 전망

투르크메니스탄 황영삼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 2012/05/17

소련이 붕괴할 무렵인 1991년 하반기 6개월 동안에 전개되었던 역사적 사건 중의 하나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경우 5개의 독립국이 새로이 건설된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독립 투르크메니스탄의 등장은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었는데 2006년 12월말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독재국가로 낙인찍혔던 일이 생생하다. 지금은 더 이상 그러한 비난을 받지 않고 있지만 적어도 투르크메니스탄이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매우 생소하고 접근하기도 힘들 것만 같은 국가임에는 분명하다. 그도 그럴 듯이 투르크멘 비자 취득의 난해함과 국가정보 취득의 불편함 및 서울에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이 부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위와 같은 추정을 더욱 더 사실에 가깝게 해 준다.

소련 시기에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한 투르크멘 공화국(TSSR)은 1924년에 설립되었다. 당시 투르크멘 공화국과 우즈벡 공화국은 중앙아시아 타 국가와 달리 제일 먼저 구성공화국 수준의 지위를 가졌던 초창기 멤버들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두 공화국은 호레즘 지역을 두고 우즈벡인들 다수 지역과 투르크멘인들 다수 지역으로 양분하는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당초 소비에트 볼쉐비키 정권은 강력한 중앙아시아 통합정부를 경계하고 전형적인 ‘분할과 지배(divide and rule)’ 원리를 적용시켰다. 그 정책은 오늘날과 같은 중앙아시아 5개국을 성립시키는 결과를 주게 되었다.

수도는 이란 국경과 가까운 아시가바트(아슈하바트-러시아명)였지만 1930년경에는 오늘날의 투르크메나바트(소련시기의 차르조우)로 이전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에는 무산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카자흐 자치공화국의 중심이 크질오르다에서 알마티(알마아타)로, 우즈벡 공화국의 중심이 사마르칸트에서 타슈켄트로 이동되었지만 투르크멘 공화국에서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공화국의 중심이 이전되는 것은 당시 소비에트 연방정부의 지방 토착화 정책의 결과로 현지 지역 엘리트들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어 발언권이 상승된 것과도 관계가 있다. 결과적으로 카자흐인들의 맏형격인 대쥬즈 지역권인 알마티가 부상되고, 타직인 문화보다 우즈벡인들의 문화권이 더 강한 타슈켄트 지역의 엘리트들이 강력해짐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투르크멘 공화국의 경우 현재의 대표적 5대 부족 중 하나인 테케족의 영향권 밖으로 국가 중심이 이전되는 것이 현실화되지 못하였다.

민족의 개념이 매우 부족하였던 투르크멘인들의 경우 민족을 단위로 한 국가건설이 민족 스스로가 아니라 1924년에 소비에트 당국에 의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아니러니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과 반대되는 견해도 있는데 즉 투르크멘인들이 주도적으로 공화국 수립을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1920년 전후의 역사적 상황을 볼 때 부족주의적 전통이 매우 강했던 투르크멘인 거주 지역에서 후자의 견해는 다소 설득력이 약하지만 양자 균형적 시각을 가지는 일이 더 필요하다.

1924년 당시 소련은 소비에트 연방이 1922년 12월 30일에 결성된 이래 2년이 막 지나가고 러시아혁명 7년이 되던 신생국가의 지극히 불안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서방국가의 침입에 대한 안보적 불안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내적으로는 적위군과 백위군과의 내전이 종식되고 레닌이 주창한 신경제정책이 수립되어 시행되던 실험기 경제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레닌이 1924년 1월에 서거함으로써 권력승계 문제가 잠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투르크멘 공화국은 거대한 소련의 변방 지역으로서 하나의 구성공화국 지위를 획득한 것이었다. 특히 ‘투르크멘’이라는 명칭을 국명으로 채택한 것은 투르크멘인들이 역사무대에 등장한 지 최초의 일이었다.

소련 시기 투르크멘 공화국의 경제적 역할은 면화공급지였고 1960~70년대에는 천연가스 생산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소련 전국을 무대로 공급하던 기지로 그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면화생산은 우즈벡 공화국이 대표적이었지만 아무다리아 물줄기를 활용한 면화재배에 열중한 투르크멘 공화국 또한 면화산업이 주력산업이었다. 광대한 카라쿰 사막 지역을 개발하기 위하여 대수로 건설이 아무다리아 중류 지대에서 투르크멘 공화국을 서쪽으로 가로지르는 지역을 따라 과감하게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무다리아 강에서 아랄 해로 유입되는 수량이 극히 부족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미 심각한 상태로 되어 버린 아랄해 문제의 배경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투르크멘 지역에 대학이나 전문학교 등 고등교육기관이 부재하였으나 1954년에는 대학교 6개와 전문학교 30개가 있을 정도로 발전을 이룩하였다. 또한 투르크멘 과학아카데미에는 40여개의 전문과학 연구원들이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제정러시아 시기와 판이하게 달라졌다. 바로 이러한 점은 당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가 제정러시아 체제보다 훨씬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체제라고 선전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국가 전체 수준에서 저널이 9개종, 신문이 67개종이고 부수가 30만부에 달하였다. 수도 아시가바트에는 1948년 대지진 이후 도시 복구공사가 상당부분 완성되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활발한 주거용 아파트 건설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일부 주거지에는 수도와 가스가 공급되어 시민들이 일찍부터 공공재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콜호즈와 솝호즈 체제로 유지되던 농촌 지역에서는 면화와 기타 농작물, 그리고 축산업이 가계의 중요한 소득원이 되었다. 투르크멘 공화국에도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 대부분 1937년에 강제 이주된 사람들이었고 이들의 벼농사 기술 덕분에 투르크멘 공화국 북부 지방에 주로 거주하게 되었다. 콜호즈 체제 또한 초중등학교, 의료시설, 창고, 제분소, 간이제작소, 문화회관 등 소속 구성원들이 필요한 대학을 제외한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투르크멘 공화국과 이들 주민들이 분명히 이전 시기보다 물질적인 진보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더욱이 스푸트니크 발사 등으로 소련 국민의 구성원으로서의 긍지감도 높았다. 그러나 면화와 원유가스 중심의 산업과 이에 대한 중앙통제 등으로 경제구조의 취약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우선 제조업 공장들은 주로 모스크바 등 유럽러시아 중심부에 많았고 중앙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에서는 일종의 원료 공급지에 준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가령 막대한 천연가스는 유럽을 향해 공급되었고 그 경제적 실익은 중앙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고, 면화납부는 모스크바 인근의 이바노보 면직공장으로 보내어져 그곳에서 제품화되었기 때문에 투르크멘 공화국으로서는 늘 불만족 상태에 있을 수도 있었다.

바로 이러한 경제적 취약성은 현대 투르크메니스탄의 독립과 함께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천연가스 공급에 대한 완전한 장악과 국제 원료가격의 상승으로 인하여 그 이익이 그대로 투르크메니스탄 정부에 귀속됨으로써 국가적 발전이 독자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그 외 산업은 뚜렷이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고 면화 또한 경제성 면에서 경쟁력이 상실되어 나갔다.

1991년 하반기에 소련 전역에 걸쳐 파급되었던 구성공화국의 탈소현상은 투르크멘 공화국에도 이어졌지만 경제적 독립성 면에서 발트삼국이나 우크라이나 등과 확연히 비교되는 투르크멘 공화국으로서는 반드시 환영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적 변동은 국가의 독립으로 이어졌고 1924년 당시와 비슷하게도 투르크메니스탄은 자국민의 역동적인 독립운동의 결과가 아닌 외부적 요인에 의하여 독립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1924년과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다. 모든 사항을 투르크메니스탄 정부가 해결해야 하고 결정하고 이익을 취하고 손해를 보아야 하는 현실에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파르무랏 니야조프는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고 전형적인 당 관료 출신으로서 행정적 감각이 뛰어났다. 1948년 대지진의 피해 당사자이기도 한 나야조프 대통령은 그 사건의 결과 고아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공산당에 집중하는 길만이 세상에 가장 잘 적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대통령이 된 니야조프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구사하게 되는데 바로‘인민회의’를 통한 권력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지금은 폐지된 것이지만 정원 2,508명의 대규모 회의체인 ‘인민회의’의 구성원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회의원, 정부관료, 원로대표, 주요 단체회장 등 소위 국가 엘리트 대표들로 구성된 헌법기관이었다. 어떻게 보면 소련 체제에서 유지되었던 ‘최고소비에트’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강성 이미지 소유자였던 니야조프도 2006년 12월에 갑자기 심장마비사를 함으로써 권불 20년을 마감해야 하였다. 그의 후임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은 철저한 개혁주의자로 인식되었고 활발한 대외활동을 통한 국가 이미지 개선 및 교육개혁 및 문화정책의 개선 등을 통하여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서방국가와의 적극적인 접촉과 투자 유인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 증진을 통한 아시아 국가와의 네트워크 구축에 집중함으로써 동서양을 연결하는 문명의 중심지 국가임을 자임하고 있다. 그 기본 토대는 막대한 천연가스 수출을 통한 달러임에 분명하다. 우리에게 그 동안 닫혀 있었던 투르크메니스탄의 문이 이미 열린지 4년이 넘어가며 벌써 욜라탄 지역에는 우리 근로자 수백 명이 파견되어 일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 아직 한국 최고지도자가 투르크메니스탄 국빈방문을 실행한 적은 없지만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경우처럼 가까운 시기에 대통령의 국빈방문이 이루어져 한국과 투르크메니스탄의 관계가 더욱 더 발전적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본 페이지에 등재된 자료는 운영기관(KIEP)EMERiCs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