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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알마티의 역사-문화 기념물 제정을 보며

카자흐스탄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2012/06/11

넓디넓은 카자흐스탄의 대초원에 서본 경험은 지금도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각종 고층 건물과 산이 끌어안고 있는 공간에만 익숙해 있던 필자는 대초원에 서 보고서야 세계에서 아홉 번째라는 이 나라의 크기(카자흐스탄의 면적은 270만 ㎢로 남한의 26배에 달한다)를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초원이 주는 청량감은 자연스럽게 깊은 숨을 동반하는 해방감을 주었고 초원이 갖는 개방성의 의미로 생각을 옮겨가게 해 주었다. 외부와 정체성을 단절시키는 인위적인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으로 존재하는 초원이 필자에게 자유에 대한 각별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카자흐스탄만의 대초원 뿐 아니라 경계가 없는 무한한 공간은 지역적으로 사막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면서 중앙아시아 전체에 펼쳐지며 지역의 공통된 특징을 이루고 있다.

광활한 개활지인 대초원은 평상시에는 유목민의 삶의 터전이 되지만 역사 이래 다양한 민족들의 이동로가 되었다. 중앙아시아의 공간은 기원전 2천년 이전부터 아리아인들의 페르시아나 인도로 이동하는 경로로 이용되었고, 기원전 8세기에는 스키타이인들의 동방무역 로가 되어 주었으며, 흉노인(기원 전후), 투르크계 민족과 아랍 및 무슬림(10세기 전후)들의 이동과 정착지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근세 이전 중앙아시아 지역의 문명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문명사가 배태된 가장 중요한 요인을 지역의 공간적 특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조성되고 실크로드를 통해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발전하였던 중앙아시아 지역의 문명사는 18세기 이후로 러시아인을 비롯한 슬라브계가 진출하고 러시아어와 문화가 전파되면서 국가라는 정치적인 공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더불어서 유목민적 생활관습의 급격한 쇠퇴와 정착생활 터전의 증가가 나타났다. 특히 1920년대 소련의 일원으로서 ‘스탄(-stan) 사회주의 공화국’들이 출범하게 되는데 이는 언어, 심리, 역사적으로 차이를 갖는 민족들을 외적 압력에 따라 한 둥지를 틀고 인위적으로 새로운 경계지에 정착하도록 강요하는 조치였다. 소비에트 정권이 옛 경제 구조와 전통적 요소들을 새로운 체제에 맞는 도덕과 가치 기준으로 바꾸려고 시도한 대표적인 정책들, 즉 농업 부문의 집산화와 문화적, 민족적 차이를 무시하는 소비에트형 인간의 형성도 대체로 그러한 방향을 지향했다. 소련에 있어서 일종의 배후지로서 식량과 자원의 공급지이자 위급시의 소개(疏開)지로 인식된 중앙아시아 지역이 소비에트 ‘제국’의 운영전략에서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려면 개방성과 교류, 이동 등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 문화요소는 강조되기 어려웠다. 

70여 년간의 소비에트 체제를 경험하고 독립한 오늘날의 중앙아시아는 신생 공화국들이 체제전환기를 극복하고 국제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독자적인 국가발전 전략을 펼치고 있다. 1991년 독립 이후부터 20년 동안 외형적으로는 20세기 역사의 경험에서 탈피하고 전통 문화를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지만 외부 세계의 눈에 비친 중앙아시아는 여전히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해 본 경험이 없으며, 구소련의 유산을 공유하고 있는 낙후된 자본주의-민주주의 국가들의 그룹으로 단순하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도 역시 예외는 아닌 듯하다. 사실 독립국 역사 20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한국과의 교류사와 일치한다. 조금은 급작스러운 독립과 더불어 신생 독립국으로서 발전 모델을 찾던 중앙아시아 지역의 나라들과 국가의 새로운 발전 동력을‘세계화’정책 속에서 찾으려 했던 한국이 서로를 주목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물론 양자 간 교류도 급격히 발전했다. 하지만 우리의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이해는 단편적이고 1차원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정보를 바탕으로 한 후진 지역이라는 인식에 기초한 대 중앙아시아의 전략과 지역 진출에 계속적인 시행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의 대표적인 사례로 지역 이해의 핵심 중 하나인 시간 및 공간에 대한 인식의 오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시간적 인식의 오류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가 제정러시아와 소련 시기를 거치면서 만들어졌다는 전제 아래 근대 이후의 역사적 시점을 이해의 기준으로 간주하는 경향이다. 공간적 인식의 오류는 국가 중심적 이해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데 곧 민족, 영토, 국가와 문화까지 동일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즈베키스탄이라고 할 때 관련된 전문가들 일부를 제외하면 우즈벡인들의 땅에 있는 우즈벡인의 국가와 문화가 떠오르는 것이다.

사실 그 같은 이해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독립한 중앙아시아 5개국이 시행하고 있는 공식적인 토착다수민족 중심주의 정책은 강화되는 추세로 보인다. 즉, 독립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근대 국가적 정체성 형성 과정이 토착 다수민족을 부각시키는 공식적인 정책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은 당시 지역에서 다수를 차지하던 토착민족의 이름을 해당 지역의 국가명칭으로 삼아 중앙아시아 지역을 분할했다. 소련의 지역 편제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형성된 국가(당시로서는 공화국)중심주의적인 접근이 오늘날의 중앙아시아를 구분하는 국가단위로 이어져 소련의 붕괴 이후 신생 중앙아시아 5국이라는 형태로 고착된 셈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을 국가 중심적 공간으로 이해할 때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중앙아시아 지역이 역사․문화적으로 형성된 기존의 전통적 문화요소와 제정러시아의 지배 이후 시작된 러시아-소련식 문화요소가 공존하는 지역임을 간과하게 만드는데 있을 것이다. 즉 통치의 효율성을 앞세운 정치적 논리를 앞세울 경우 동질성과 이질성의 공존이라는 중앙아시아 공간의 특성들을 획일화시킨다.

더 나아가 국가 중심의 공간 접근이 다원성을 특성으로 하는 지역의 역사성을 단순화하고 문화적 공간이 갖는 특수성을 간과하게 만듦으로써 지역의 이해를 방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중앙아시아 지역을 국가중심으로 접근할 경우 신생 독립국들의 공식적인 국가 정책들이 실제 사회 현실과 불일치하는 모순을 설명해 낼 수 없다.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수적인 우위가 실제 해당 사회 및 문화구조상의 우위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중앙아시아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하얀 피부와 높은 코를 가진 금발의 아가씨부터 우리 시골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을법한 동양인의 얼굴까지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슬람과 정교, 불교와 배화교의 유적들, 러시아 문화의 흔적들이 혼합되어 다양한 모습의 문화와 접할 수 있다. 이슬람식 음식에 보드카를 곁들이는 식습관은 우리에겐 이채롭지만 일상화된 모습이다.

국가 단위의 공간 인식에는 거대공동체로서 일반화라는 일정한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인식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균일성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하지만 공동체 중심 사회로 알려져 있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역사적인 형성과정, 사회문화적인 구성원의 복합성, 지리적인 광대함 등으로 인해 국가적 특성을 파악하기에 용이하지 않은 지역이다. 내부적으로도 사회 구성원의 분포가 다를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나 자연환경 측면에서도 인간의 거주에 적합한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구성원들이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다.

따라서 다문화 및 다 민족적 구성을 특성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공간 인식은 국가 단위보다 규모가 작은 공동체 수준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다. 지역과 도시 단위의 공간 이해는 그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중앙아시아 공간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주요 거점들은 지역의 동질성과 이질성이 공존하는 특수한 공간으로서 존재해 왔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의 경우는 지역이 일종의 씨족적 연대의 바탕이 되고 있어 주요 씨족들의 명칭은 주요 도시나 지역의 이름과 일치한다.
6월 초의 한 기사를 보니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였던 알마티가 35개의 건물과 기념비를 역사 및 문화 유적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기원전 10-13세기의 훔만토베나 테리스불락과 같은 고대 정주지 유적이나 레닌 및 10월 혁명 투쟁자 기념상과 같은 역사적 기념물도 포함되어 있지만, 소피아 교회(1858년에 건설되어 소련 시대에는 극장으로 쓰임), 20세기 초에 건설된 상인 무로프의 집과 KGB 전신인 내무인민위원회(엔케베데) 카자흐스탄 본부의 극장 겸 클럽 건물(1931-34년 건설), 심지어 1976년에 건설된 철도역 알마티-1과 메대우 호텔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소식을 보면서 한편으로 고대와 중세, 식민지 시대와 소비에트의 지배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중앙아시아의 역사가 중첩적으로 반영된 도시로서 다문화성과 다민족성을 보존하려는 알마티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한 시기에 따라 중심 세력들은 변해갔지만 그때마다 도시나 지역에 전반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적인 문화에 새로운 집단의 문화가 중첩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공간으로 존재함으로써 다민족, 다문화적 속성이 쉽게 포용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이제는 학문이든 사업이든 국경이 아니라 특정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유용하고도 현실적인 방법론을 모색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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