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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축제 문화의 원형: 노루즈(신년제)의 상징체계

러시아ㆍ유라시아 일반 신규섭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연구교수 2012/08/01

축제 문화의 원형이 무엇이며, 어디일까? 라는 질문을 누구나 한번쯤 던지게 된다. 이번 글부터 3차례에 걸쳐 그 원형을 찾아 떠나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문명을 성립시킨 페르시아 문명은 인류 문명의 원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서구의 논리에 의해 잊혀 진 문명으로 전락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서구 중심 론에 의해 지배된 지난 수 세기 동안, 특히 근대 이후 왜곡된 서구 논리에 대항하는 목소리는 힘이 실릴 수가 없었다. 우리는 주변과 타자로만 간주하던 페르시아 문명을 재발견하고 페르시아 적 기호들을 재해석함으로써 원형(prototype)의 지위를 복원할 필요성이 있다. 이 글은 융의 원형(Archetypus) 개념과는 무관하며, 일반화된 원형(prototype)의 의미로 쓰고 있다. 문화원형에 대한 연구는 학문의 본질적인 분야에 해당되어 그 연구에 어려움이 크다. 혹자는 원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도 하지만, 여기서 원형이란 전파과정에서 기원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전파과정의 계보조차 제대로 세워놓지 않는다면 인문학에서 왜곡은 한층 더 심화될 것이다. 다시 말해 학문의 원형성에 관한 논의가 쉽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현상적인 연구만을 지속할 수 없다. 이 글의 목적은 원형 탐색에 관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결과, 인문학과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학문적 왜곡이 얼마나 심화되었는지 노루즈(나부루즈 혹은 나으르즈)를 통해 밝혀내는 것이다. 학문 전반에 걸쳐 교묘하게 축소하거나 은폐시킨 학문적 원형 즉 뿌리 찾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문학의 왜곡을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다. 특히 왜곡된 논리를 벗겨 내는 작업이 21세기를 통해 진행될 수밖에 없으며, 세시풍속의 신년제는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축제와 종교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동양의 축제는 서양보다 종교에 더 깊게 밀착되어 있다. 대부분의 종교가 동양에서 비롯되었으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동ㆍ서양 축제를 비교해 보면 이런 사실은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지금까지는 동양과 인류 문명의 원류가 페르시아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너무나 생소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독교 문화와 그리스 신화로 대변되는 서양 문화에서 축제는 사순절 직전이나 부활절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물론 서양 축제도 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지만, 정작 축제의 성격을 보면, 물질적, 향락적인 요소를 다분히 안고 있다. 서양 학문의 뿌리는 그리스이며, 서양 문명의 원류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고 흔히 알고 있다. 고대 동양과 서양의 연관성에 관해 연구한 작업은 많지 않다. 인류 문명의 생산자 역할을 한 고대 페르시아 문명은 매개자 역할만 강조되어, 동․서양 문명에 끼친 영향이 축소, 은폐된 경우를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동양과 서양 축제의 원형을 찾는 작업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류 최초의 축제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동양과 서양의 축제가 상호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신앙체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중앙아시아는 고대부터 페르시아 문화가 짙게 깔려있는 지역이다. 이란은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아리안을 뜻하는 이란으로 변경하지만, 페르시아어 권 국가와 지역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중앙아시아에 걸쳐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다수(Major)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지역은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이며,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인구의 50% 정도에 해당하는 천2백만 명에서 천5백만 명으로, 남부 지역에서 페르시아어를 사용한다. 우즈베키스탄 남부 지역의 고대 도시, 사마르칸드는 페르시아 티무르(1370-1500) 제국의 수도였고, 보카라(부하라)는 페르시아 사만(874-999)조 시대의 수도로서 학문과 문학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중앙아시아에서 소수(Minor)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지역은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고대의 역사 도시, 마르브(Marv)지역이며, 키르기스스탄에서는 파르거네(Fargane) 지역에서 페르시아어를 쓰고 있다.

이들의 종교는 미트라교-조로아스터교-불교-수피즘-마니교-마즈닥교로 연결되는 데, 기원전 14세기의 미트라교가 이란 중부의 케르만에서 시작된 고대 페르시아 종교라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종교가 기독교와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에 관해서도 깊이 있게 학문적으로 연구되지 못했다. 이런 계보가 연결되지 못한 채, 동양과 서양의 학문적인 틀 안에서 따로 연구되는 것은 학제 간 연구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문명의 이질성만이 더욱 부각되어 문명의 공존을 해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동양의 전통 축제의 기원과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작업은 동양 축제의 전파 경로를 찾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이후로 중국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고 중국의 풍속이 우리의 풍속으로 정착하기도 했다.”  한국 문화의 기원을 중국과의 관련아래 찾아야만 하는 이유지만, 중국과 페르시아 문화와의 연관성은 다음 대목에서 잘 드러나 있다. 당나라를 지배한 호족은 이란계 민족이었으며, 고려 후기 몽고 간섭 기에는 원 제국을 통해 고려와 페르시아 몽고 조였던 일한국(1256-1353)은 동일 국가와 같은 관계에 있었다. 또한 동양 축제의 영향사적 관계에 대한 연구는 한국의 세시풍속에 관한 기원을 밝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노루즈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자.

중동 이슬람 국가의 축제는 이슬람 종교와만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랍 지역이 아닌 페르시아(이란) 축제는 7천년 역사의 인류 최초 문명을 만든 수메르 민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 최초의 민족으로 불리는 “수메르 민족은 이란 고원의 원주민이었으며, 이들이 메소포타미아로 옮겨가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이들이 노루즈의 신년 축제를 만들었다고 보고 있으나, 제례 의식으로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은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자르토쉬트)의 출현 이후이다. 이 시기는 이란에서 최초의 아리안 왕조인 머드(기원전708-기원전550)조가 성립된 때와 거의 일치한다. 다시 말해 노루즈는 이란과 중앙아시아에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의 수 천년된 축제이며, 그들은 이둘 아드하(순례 종료축제)와 이들 패트르(단식 종료축제)의 이슬람 축제보다도 수천 년 이상 지속된 노루즈 행사를 더 소중하게 여긴다.

노루즈라는 용어는 페르시아어 문헌에서 2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이 날은 고대 페르시아 헤커맨쉬(아케메니드, 기원전 559-기원전 330) 왕조의 중요한 행사로서, 애쉬커니(파르티아, 기원전 247-기원후 224) 왕조에서는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20여개 국가의 왕들은 노루즈를 맞아 왕중왕(샤한샤)으로 불렸던 페르시아의 황제에게 진상품을 받쳤는데, 이는 궁정 벽면에 새겨진 부조를 통해 알 수 있다. 페르세폴리스의 아파다나 궁정이나 백주홀은 노루즈를 경축하기 위한 특수한 목적으로 건축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왕조의 비문에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사산조에서도 노루즈는 그 해의 가장 중요한 날로 경축되었다. 노루즈와 관련된 대부분의 궁정 전통, 현금 하사와 죄수 석방은 사산조 시대에 비롯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메흐르건(추분 축제)과 같은 축제는 조로아스터 교도나 일부 세력에 의해 추종되는데 비해, 노루즈나 사데(동지 축제)는 7세기 중반 이슬람이 도입된 이후에도 존속되었다. 노루즈는 초기 칼리프(지도자)에 의해 추앙되었으며, 4명의 칼리프들이 노루즈 제전을 집전한 기록도 있다. 이 축제는 압바스 왕조 때 중요한 궁정의 공휴일로 채택되었다. 4대 칼리프의 사망과 사만조와 부예(부와이흐) 왕조와 같은 페르시아 왕조의 부활 이후, 노루즈는 가장 중요한 행사로 격상되었다. 부예 왕조는 고대 사산 왕조의 전통을 소생시키고 칼리파들이 없애버린 수많은 소제전을 복원했다. 심지어 투르크나 몽고 침입자들도 축제를 지지하며 노루즈를 없애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루즈는 관료와 백성들에 의해 페르시아 영토에서 주요한 제전으로 존속되었다.

페르도우시(중세 페르시아의 대시인, 1020 죽음)의 『왕서(셔흐너메)』에 따르면 노루즈는 페르시아 신화에서 가장 추앙받는 성군으로 묘사되며, 인류를 구원한 잠시드 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화속의 페르시아 왕 잠시드는 인도-이란 민담에서 이마(Yima) 혹은 야마(Yama)로 불리는데, 동물 사냥에서 농업 경작의 정착화 된 사회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통한다. 페르시아 신화와 『왕서』에 따르면 그가 노루즈를 성립시켰다고 보는 데 반해, 메리 보이스(Mary Boyce)는 노루즈가 조로아스터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필자는 이란 고원의 원주민이었던 수메르 인들에 의해 지속되었던 행사가 조로아스터에 의해 구체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중세 페르시아의 학자 아부 라이한 비루니(Abu Rayhan Biruni)는 우주의 움직임이 시작되던 첫 날을 노루즈로 명시한 것이 페르시아인의 믿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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