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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투르크메니스탄 고려인: 시대변화와 사회적응 과제

투르크메니스탄 황영삼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2012/10/23

올해는 소비에트 고려인 강제이주 75주년이 되는 해로서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에서는 이미 정주라는 용어로 변화된 시대에 새롭게 적응해가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1937년 가을에 수확기를 앞두고 극동 지역에 거주하던 고려인 17만 여명이 소비에트 당국에 의하여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하였다. 이주 직후 대부분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벡 공화국에 정착하게 된 이들은 도시와 농촌에서 각각 부여받은 직업에 종사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시련이 있었음은 이미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후 소련 붕괴 후 각각의 독자적인 독립공화국으로 시대가 바뀐 후 이들 고려인들은 새로운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과제도 안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 고려인이나 우즈벡 고려인과는 달리 또 다른 독립국인 투르크메니스탄의 고려인에 대해서는 사실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현재 고려인 추정치 500여명 정도 외에는 이들이 어떠한 삶을 거쳤는지에 대한 자료도 찾기 힘든 실정이다. 2008년 이후 투르크메니스탄에 직접적인 진출을 꾀하고 있는 우리가 동족에 대해 아는 바가 적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1939년 소련의 공식적인 인구조사에 의하면 당시 투르크멘 공화국에 거주 등록된 고려인의 규모는 총 40명이었다. 그 이전에 고려인이 투르크멘 지역에 거주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에 강제이주 직후에 우즈벡 공화국에서 재이주한 사람들로 추정된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에서 실시된 인구조사(1959년)에 의하면 고려인 인구수가 1,919명으로 파악되었는데 이는 투르크멘 전체 인구의 0.1% 수준에 불과한 수치였다. 이후 1970년에 3,493명, 1979년에 3,105명 등으로 고려인인들이 증가하였다.

고려인들의 증가이유는 인구의 자연증가 외에도 면화증산을 위한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 인근의 우즈벡 거주 고려인들을 투르크멘 공화국으로 이주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투르크멘 공화국이 면화재배지 확대를 위하여 운하를 건설하고 아무다리야 강 물줄기를 끌어들인 결과 종국적으로 아랄 해의 수량이 현저히 감소하게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소련 중앙 당국이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을 철저히 면화생산지로 특화시키자 양 공화국의 콜호즈와 솝호즈는 매년 부과되는 면화공급량을 충당해야만 하였다. 따라서 실적이 부진하거나 양호한 콜호즈 및 솝호즈 간의 통합 및 폐쇄 조치가 수반되고 구성원들의 이동이 추진되었다. 보통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공동체 간에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어떤 경우에는 공화국을 넘어선 거주지 이동이 실행된 것이다.

투르크멘 고려인의 경우 면화재배의 일도 있었으나 주로 벼농사를 위한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 보다 더 높은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우즈벡 공화국의 서북부 접경지역이며 아무다리야 강 하류 지대의 다쇼구즈 지역은 고려인들의 밀집 주거지였다. 특히 ‘제22차 당대회’ 콜호즈는 생산성이 높은 고려인 콜호즈였다. 이후 벼농사는 면화농사보다 수익성 측면에서 훨씬 좋았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토착민들이 서로 몰려들어 벼농사에 집중하게 되었다. 현재에도 남아 있는 고려인이 가장 많은 곳이 바로 다쇼구즈 지역인 이유가 바로 한때 많은 수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소련 최후의 인구조사(1989년)에서 고려인 규모는 2,848명으로 다소 감소된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소련 해체 후 고려인 현황은 해가 거듭됨에 따라 하강하였다. 1995년에 일시적인 추정치로 3천 명 정도이던 투르크멘 고려인은 이후 1천 명 정도로 그리고 2010년 기준으로 대략 500명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들이 모두 어디로 나갔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아직 나와 있지 않다. 독립국가 수립을 즈음해서 인근의 공화국으로 떠나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이후의 고려인들이 맞이했던 가장 큰 문제는 언어적 정체성 상실과 문화적 동화, 그리고 소비에트화 정책을 수용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글과 한국어 사용이 1938년 이후 초등학교 교과과정에서 주 2~3시간의 선택과목으로 설정되고 극동 지역에 있었던 조선어사범대학의 후신이 폐지되면서 이들 고려인들의 언어적 정체성 위기가 진행되었다. 유태인이나 위구르인 등 타 소수민족들의 상황도 이에 다르지 않았으나 그들은 비공식적 수단을 통한 언어교육이 이루어지면서 자신들의 언어를 보존시켰다. 이에 반하여 고려인들은 러시아어를 새로운 모국어로 수용하고 공식화하면서 자신들의 민족 언어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인들의 민족 고유 언어의 상실은 <레닌기치> 신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심화되었고 결국 그 결과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고려인들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1991년 독립 이후의 투르크멘 고려인들에게 등장한 문제는 바로 사회 재적응에 관한 것이다. 소련의 와해 이후 소비에트 고려인들은 러시아 고려인, 카자흐 고려인, 우즈벡 고려인, 투르크멘 고려인 등으로 지칭될 만큼 또 하나의 새로운 민족 집단으로 개념화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러시아 지역에 거주하던 고려인을 제외하면 언어문제에 심각히 봉착하게 되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카자흐어가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우즈벡어가 강요되는 등 현지 주류 민족의 민족주의화 정책으로 인하여 새로운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각 공화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가족 간에도 자동적인 가족이산화 결과가 나타났다. 갑자기 국가를 달리하는 국적을 갖게 되고 이동시에도 국경을 통과해야 하는 불편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미 주류 사회로 편입된 엘리트 고려인들이 언어문제로 인하여 더 이상 상층부로 진입되지 못하고 탈락하거나 아니면 타국으로 이주해야 하는 문제가 대두된 일이다.

새로운 체제 하의 투르크메니스탄 고려인들은 주류 민족인 투르크멘어와 투르크멘 문화 및 투르크멘 사회제도에 재적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는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 겪었던 러시아어 습득과 소비에트화 과정에서 새로운 변화를 기해야 하는 노선 상에 있음을 말해 준다. 특히 고려인 유아동과 청소년들의 경우 러시아식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투르크멘식 제도와 규범에 익숙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것은 벨라루시와 발트국가의 소수 고려인처럼 한민족적 혈통과 민족정체성이 얼마나 약화되었나 하는 것이다. 인근의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과는 달리 유독 소수의 공동체로 남은 투르크메니스탄 고려인들이 타민족과의 혼인 등을 통해 민족 간 동화 및 문화적 융합 현상을 겪고 있는지 아니면 한민족적 혈연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은 향후 고려인 사회의 방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사안에 속한다. 중요한 것은 기성세대 고려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적 인식과 동시에 언어적 환경변화로 인한 부당한 대우 문제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 고려인들은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고 있으며 투르크멘어 구사력이 약하다.

경제적인 문제 또한 소련 붕괴 이후의 투르크멘 고려인들이 봉착했던 큰 고민거리에 속한다. 사회주의 경제제도에서 자본주의 경제제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유시장 경제에 익숙하지 않았던 고려인들은 실직상태에 놓이게 되고 농촌의 경우는 그 폐해가 심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중앙아시아에서 비교적 다수의 공동체를 형성했던 우즈베키스탄의 경우에 더욱 두드러졌고 이는 급기야 고려인들이 인근의 카자흐스탄이나 러시아로 이주해나가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경우에도 인구변동을 볼 때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한때 많은 고려인이 거주했다고 알려진 다쇼구즈 주의 8개 군에 겨우 몇 세대의 그리고 노인층의 고려인들만 남아 있으며 이들의 규모는 대략 100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1990년대 초에는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고려인들이 다쇼구즈 조합을 결성하고 역사적인 모국, 즉 한국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일부는 한국방문에 성공하여 자녀들의 한국어 교육을 위한 한국어 교재를 가져 오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투르크멘 고려인들의 민족문화가 상기되고 복원되었다. 생일이 축하되고 음력설이 기념되었다. 물론 이러한 민족부흥의 움직임은 투르크메니스탄 정권의 국수적 정책으로 인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일부 조합 간부들은 국외로 도피하고 또 일부는 잔류한 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고려인 여성들은 시장에서 김치와 반찬류를 팔면서 생활한다. 그리고 유제품과 빵을 만들어 판다. 이들이 만든 음식은 지방의 공장에서 만든 것보다 훨씬 맛있다는 평을 가지고 있다. 가령 흰 치즈는 일반 다쇼구즈 가게에서는 볼 수 없고 오직 고려인 가게에서만 구매할 수 있다.

투르크멘 고려인협회는 2008년에 결성되었는데 인근 공화국의 고려인협회와 비교해 볼 때 이는 매우 늦은 시기에 해당된다. 협회장인 김 유리는 그루지아 오일가스 수출입회사의 아쉬가바트 지사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에도 몇 차례 방문한 바가 있다. 2010년 기준 3명의 투르크멘 고려인 대학생이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아마 이들이 한국과 투르크멘 교류증대의 가교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며 투르크멘 고려인 사회의 조용한 변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음에 분명하다. 이러한 현실은 2007년에 집권한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의 개혁정책으로 인한 긍정적인 효과와도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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