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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마사리크(T.G.Masaryk)의 민족자결론(pravo sebeurčení)

김장수 관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2012/11/14

1850년 3월 7일 모라비아(Mähren) 남부의 호도닌(Hodonín)에서 태어난 마사리크(T.G.Masaryk)는 1881년 빈 대학에서 ‘현대문명의 사회적 대중현상으로서의 자살(Selbstmord als soziale Massen- erscheinung der modernen Zivilisation)'이라는 논문으로 교수자격(Habilitation)을 취득했다. 논문에서 마사리크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들을 분석했고 거기서 그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높아진 자살률이 종교적 의무가 결여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에 따를 경우 유럽에서 급속히 확산되던 믿음의 결여는 인간의 토대 및 삶의 방향 상실로 연계되고 그러한 것이 결국 자살률을 대폭 증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마사리크는 자살이라는 것이 사회적 위기의 징후(Indiz)이기 때문에 각 개인의 자살의도와 1914년 이후, 즉 1차 세계대전 이후 열광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죽음을 맞이하려던 젊은 지식인 계층의 의식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1882년 겨울학기부터 마사리크는 프라하 체코대학(Česká univerzita)에서 강의를 했는데 여기서는  주로 국가의 정치체제, 민족과 도덕 문제, 그리고 당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던 매춘문제 등이 거론되었다. 1897년 그는 자신과 정치적 관점을 같이 하던 지식인들과 더불어 ‘현실주의 모임’을 발족시켰다. 여기서 이들은 민족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기보다는 경제 및 사회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을 연방화 시키기에 앞서 민주화부터 선행시키는 것을 정치적 목표로 설정했다. 이후부터 마사리크는 체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현실주의적 원칙들을 적용시키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체코 민족의 정치적 과제를 휴머니즘적 이상을 지향하던 체코정신과도 접목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의도는 ‘체코문제(Die Tschechische Frage: Česká otazka)’와 ‘우리의 현재적 위기(Unsere jetzige Krise)’라는 저서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특히 1895년에 출간된 ‘체코문제’에서 마사리크는 보헤미아 지방의 체코인들과 독일인들이 협력하여 보헤미아 지방이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독립적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팔라츠키(F. Palacký)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Austroslawismus)를 추종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점차적으로 마사리크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 사상을 현실정치와 접목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을 실천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자신이 교수로 봉직하던 프라하 체코 대학의 구성원들과 더불어 1900년 ‘현실주의당(realisticka strana)’을 창당했는데 이 당은 자신이 발족시킨 ‘현실주의 모임’을 확대·개편시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사리크가 주도한 이 당은 1907년 일반선거제의 도입을 요구했는데 그러한 것은 슬라브 민족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50% 이상이라는 현실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이 당은 도나우 제국 내에서 자치권 획득을 지향하는 민족들 모두를 지원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같은 해 실시된 제국의회선거에서 마사리크는 사회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 빈 제국의회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사리크 개인이 당대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미쳤던 영향력과는 달리 현실주의당의 영향력은 미약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7년부터 1914년까지 현실주의당의 의원으로 활동한 마사리크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치적 목적을 정확히 파악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여기서 마사리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즉 그는 개혁을 위한 모든 제안들이 위정자에 의해 거부되었고 특히 슬라브 민족에 대한 자치권 부여 등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실제적으로 이 당시 빈 정부는 민족문제에 대한 어떠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행할 능력도 갖추지 못한 무능한 정부였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Sarajevo)에서 발생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계승자였던 페르디난트(Ferdinand) 황태자 부부에 대한 저격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렇게 시작된 세계대전은 체코 민족과 그들의 정치가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체코인들은 자신들이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민족이 기존의 독일화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이들은 권력의 집중화와 관료주의적 행정체제에 대해 불만을 가졌지만 가까운 장래에 체코 민족 역시 제국 내에서 자신들의 역량에 적합한 자치 및 평등을 확보할 수 있다는 희망적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로 체코 민족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선택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그것은 이들로 하여금 기존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적 관점을 포기하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부터 마사리크는 국내외 정세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데 주력했고 거기서 그는 전쟁이 발발한 이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체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반합스부르크 항쟁을 통해 체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것을 실천시키기 위해 필요한 방법도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마사리크는 독일-오스트리아 동맹국이 연합국에게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체코 민족이 향후 독일 민족과 마찬가지로 패전 민족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우려도 했다. 따라서 그는 프랑스, 영국, 그리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체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기 시작했다.

1915년 7월 6일 제네바의 종교개혁강당(Reformationssaal)에서 개최된 후스(J.Hus) 화형 5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마사리크는 그동안 오스트리아 제국이 수행한 전통적 역할, 즉 이교도로부터 중부 유럽을 지킨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표출했다. 아울러 그는 기념식에서 체코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을 부각시켜 독립국가 등장에 필요한 당위성도 부여받으려고 했다.

이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후 마사리크는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을 규합한 후 ‘체코국외위원회(Česky komitet zahranični)’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이렇게 출범한 위원회는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직후 마사리크가 제시한 체코 민족의 독립보다 이 민족이 슬로바키아 민족과 더불어 체코슬로바키아(Československo) 라는 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데 더 큰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국내에 잔류한 마사리크의 추종자들은 체코 마피아(Česká Maffie)라는 비밀단체를 결성하여 체코 내의 동정을 마사리크와 그의 추종세력에게 알리는데 주력했다. 이 당시 마사리크와 그의 추종세력들은 연합국이 승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될 경우 자신들의 민족 국가도 건설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은 전쟁이 진행되면서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15년 10월 1일 영국의 왕립대학(King‘s College)은 마사리크를 ’동유럽 및 슬라브 연구(School of Slavonic Studies)‘ 담당교수로 임명했다. 이에 따라 마사리크는 1915년 10월 19일 '유럽분쟁기 소국들의 문제(The Problem of Small Nations in the European Crisis: Problém malých národů v evropské krizi)’ 라는 제목으로 취임강연을 했는데 거기서 그는 체코 민족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이탈하여 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다시금 펼쳤다. 아울러 마사리크는 이러한 과정에서 체코 민족과 슬로바키아 민족이 협력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관점을 부각시켜 체코국외위원회의 입장을 옹호하기도 했다.

다음 해인 1916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신유럽(The New Europe)'의 창간호에서 마사리크는 당시 진행 중인 전쟁에서 독일인들이 지향하는 것이 바로 중부유럽에서 자신들의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당시 마사리크는 전쟁의 양상을 민족적인 대립보다는 정치체제의 대립, 즉 신권정치와 민주정치와의 대립으로 간주하려고 했다. 그는 신권정치를 펼치는 대표적인 국가들로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제시했다.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이 올바른 민주정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었다. 여기서 마사리크는 러시아를 이러한 대립적 구도에서 배제시켰는데 그것은 그 자신이 중부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사리크는 전쟁이 진행되면서 신권정치체제가 민주정치체제로 대체될 것이라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당시 전쟁의 산물로 간주되던 볼셰비키적 또는 파시즘적인 정치체제, 즉 전체주의적인 정치체제가 전쟁보다 더 심각하고 파괴적인 후유증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예견도 했다. 마사리크는 자신의 논문에서 기존 질서체제의 붕괴와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질서체제, 즉 민주주의체제의 도입을 ‘세계혁명(Světová revoluce)’으로 지칭했다. 여기서 그는 패전국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향후 처리방안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그에 따를 경우 연합국은 독일인들이 타민족에 대한 자신들의 우위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존속을 허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독일인들이 민족 간의 동등권 또는 민족자결 원칙을 수용한다면 이들 역시 새로운 질서체제하에서 동등하게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이 마사리크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세계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등장하게 되리라는 확신도 피력했다. 여기서 마사리크는 보헤미아 왕국에 포함되었던 지방들과 헝가리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슬로바키아가 통합해야 할 당위성을 도덕적 측면에서 찾고자 했다. 즉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단순히 한 국가의 건설이 아닌 혁신이란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사리크는 이러한 접근을 통해 보헤미아 왕국의 유구한 역사뿐만 아니라 향후 등장할 체코슬로바키아의 새롭고, 시대순응적인 정치체제, 즉 민주주의적인 정치제제도 부각시키려 했던 것이다. 

앞에서 거론했듯이 마사리크의 신생 체코슬로바키아는 옛 보헤미아 왕국의 영역에다 독일인들의 집단 거주지역과 슬로바키아 지방을 포함시켰다. 향후 예상될 수 있는 민족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마사리크가 이렇게 양 지방을 신생독립국가에 포함시키려 했던 것은 안보적 또는 경제적 측면에서 생존이 가능할 정도의 규모를 신생국가가 반드시 갖춰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 같다.

1918년 10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항복으로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마사리크는 1935년 노령으로 은퇴할 때까지, 그리고 은퇴 후부터 서거할 때까지 초당적 인물로서 신생국가의 정치를 주도했으며, 그의 높은 인품, 풍부한 지혜, 그리고 인본주의적 도덕 정치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평가 및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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