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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발칸지역의 화약고’ 코소보 - 같이 사는 이방인들의 고뇌와 반목

세르비아 김원회 한국외국어대학교 그리스불가리아어과 교수 2013/05/31

1914년 사라예보에서의 한발의 총성으로, 1차 세계대전의 발원지가 되었던 발칸반도는 오늘도 활화산의 분화구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다. 국가 간, 그리고 민족 간 갈등구조를 이루고 있는 발칸반도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인종 분쟁 측면에서 가장 첨예한 갈등 구조와 현실을 안고 있는 곳이 바로 세르비아의 코소보지역이다.

역사적으로 코소보는 세르비아인들의 종교적 성지였다. 세르비아 남부 산악지대인 라쉬카 공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중세 세르비아 왕국은 대족장 스테판 네마냐 시기에 들어와 국가적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는 1186년 이웃 제타(Zeta)공국을 복속하고 국가와 정교회의 강력한 유대관계를 이루어냄으로써 현재의 코소보-메토히야(Kosovo-Metohija)지역을 중심으로 세르비아 중세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인 스테판 네마니치 시대에 비잔틴의 그늘에서 벗어난 세르비아 독립왕국이 건설되었고(1217), 그의 동생인 聖 사바(Sava)의 노력으로 1219년 세르비아 정교회는 불가리아의 오흐리드(Ohrid)교구로부터 벗어나 독립교구로 발전하게 된다. 그때부터 코소보는 세르비아인에게 있어서 종교적 성지의 의미(세르비아 정교회의 첫 번째 교구)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성지였던 코보소의 지위는 오토만 터키에게 복속 당함으로써 급속히 퇴락하게 된다. 세르비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되는 스테판 두샨 왕이 1355년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세르비아 왕국은 왕권 다툼으로 인한 내부 분열과 오토만 터키의 침입으로 쇠락하게 된다. 특히 1363년과 1371년에 걸친 오토만 터키와의 전투에서, 스테판 우로쉬 왕을 비롯한 그 형제들이 모두 사망하게 되고, 중세 세르비아 왕국은 오토만 터키의 조공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1389년 6월 기독교 연합군과 오토만 터키군과의 제1차 코소보 전쟁이후 이 지역이 터키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터키의 이슬람화 정책에 따라 많은 그 지역 알바니아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주변의 지역에서도 이주해 오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세르비아 정교를 신봉하는 세르비아인들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 주변의 헝가리나 트란실바니아 지방으로 이주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지역의 다수는 알바니아계 주민이 되고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소수 민족으로 전락하게 되어 국가(세르비아 영토 내)와 민족 구성(알바니아계가 다수)의 괴리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 유고연방 하에서 코소보지역의 갈등과 분쟁을 둘러싼 역사는 국내 및 국제 정치적 기류 변화에 따른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의 순차적 승리와 패배로 점철되게 된다. 우선 코소보 내에서 세르비아니즘(세르비아 민족주의)의 확대를 위해 노력하여 왔던 알렉산다르 란코비치는 코소보 내 알바니아인들을 탄압하고 세르비아인들의 지위 향상을 위하여 여러 가지 공작을 펴게 된다. 그러나 그의 1966년 당시 유고연방 대통령이었던 티토 관저 도청사건은 역으로 알바니아인들의 지위향상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고, 1968년 마침내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한 지방에서 떨어져 나와 본격적인 자치권을 얻게 된다. 이어서 티토의 사후를 대비하고 다민족 국가인 유고연방을 유지하기 위한 일환으로 1974년 신헌법(Novi Ustav)이 채택되게 되는데, 신헌법에 따라 코소보는 집단대통령제 하에서 하나의 구성국으로 연방 내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권익 보장이 주류를 이루던 일련의 분위기는 1980년 5월 티토의 사망이후 일어난 코소보에서의 공화국 지위요구 시위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이 시위에서 코소보 내 알바니아인들은 연방 내 분리된 코소보 공화국(Republika Kosova) 탄생과 주요 민족으로써의 지위를 요구하였다. 사회주의 유고연방 시절, 코소보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의 마지막은 80년대 이후 확대되고 있던 코소보 내 알바니아인들 시위와 진상조사 차 1987년 코소보를 방문한 슬로보단 밀로세비치(Slobodan Milošević)의 코소보 언덕에서의 연설과 1989년 3월 코소보 자치권 폐기를 들 수 있다. 1987년 밀로세비치는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들에게 강력한 민족주의 발언을 함으로써 세르비아인들 사이에 세르비아니즘 확대의 주역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이를 기반으로 1989년 세르비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그는 코소보와 보이보디나에 대한 모든 자치권을 폐지하고 사회주의 유고연방 내 세르비아니즘 확대를 선언함으로써 연방붕괴의 시발점을 제공하고 코소보에서 본격적인 인종 간, 민족 간 마찰을 촉진시키게 된다. 연 이은 코소보 내 양 민족 간의 유혈충돌 속에 마침내 1999년 3월 24일 코소보 내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수호를 전제로 내세운 NATO군의 코소보와 세르비아 본토에 대한 공습이 이루어졌고, 이후 발칸지역은 보스니아 분쟁이후 다시 한번 국제적인 관심지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코소보 전쟁’이라고 불린 이 전쟁이 예상과 달리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미국 등 서방 선진 7개국(G7: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과 러시아 등 G8 외무장관들은 1999년 5월 6일 코소보 전쟁의 평화를 위한 원칙에 합의하였고, 6월 2일 러시아와 EU측 특사는 세르비아의 밀로세비치를 만나 이러한 뜻을 전하였다. 뒤 이어 6월 3일 세르비아는 G8이 제시한 ‘코소보 평화안’ 즉 러시아를 포함한 약 5만 명의 NATO 평화유지군이 코소보를 5개 구역으로 나누어 평화 유지 업무를 수행할 것이라 발표하였고, 유고 의회에서 이러한 내용이 승인되게 된다. 이후 1999년 6월 10일, 양측은 코소보에서의 세르비아군 즉각 철수, 추후 UN 평화유지군의 코소보 주둔을 원칙으로 하는 코소보 평화안에 서로 합의하였고, 이에 따라 79일간의 코소보 전쟁은 종결되게 된다. 이후 코소보 평화 문제는 1999년 6월 10일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한 ‘1244 결의’(SCR 1244: Security Council Resolution 1244)를 기초로, ‘코소보 UN임시행정임무’(UNMIK: The UN Interim Administration Mission in Kosovo) 부서와 NATO가 주도하는 ‘코소보 평화유지군’(KFOR: Kosovo Force)이 코소보 평화 정착을 위한 UN 감시 역할과 평화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코소보 거주민들의 평화적이며 안정적인 삶을 보장할 의무 이행과 더불어, 20여만 명에 달하는 추방자들과 망명자들의 방해 없는 귀환 보장 그리고 세르비아로부터 코소보에 대한 보다 폭 넓은 자치권을 부여하도록 유도할 임무를 지니고 있다.

80:20. 코소보지역의 민족 구성 비율이다. 세르비아 영토 안에서 전체 거주민의 80%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과 20%이하의 소수 거주자들로 전락한 세르비아인들. 이들 사이의 반목과 갈등이 오늘날 코소보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의 핵심 원인이다. 그 뒤에 감추어져 있는 미국과 서유럽국가들의 알바니아계에 대한 지원,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 국가들과 주변국가들의 암묵적인 세르비아 지원이 맞물려서 현재의 상황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凡 알바니아니즘과 凡 세르비아니즘의 대결, 凡 일리리아니즘 대 凡 슬라비즘이라는 문화 민족주의 사이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코소보. 결국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비극의 해결을 위해서는 ‘민족 간 인구교환을 통한 코소보 분할’이라는 극단적 해결 방안도 가능하다. 혹은 ‘코소보 내 민족들 간의 지속적인 협상 유도’, ‘정치적 이념에 의한 양 민족들 간의 피해의식 극복’과 이를 통한 ‘다민족 사회’로의 연착륙을 유도라는 단계적 해결 방안도 염두에 둘 수 있다. 이들 방법 중 어떠한 것이 하루하루 죽음과 파괴의 공포 속에서 숨 쉬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또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의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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