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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트렌드

러시아 시장경제 22년, 경제 엘리트들의 흥망

러시아 배규성 - - 2013/06/24

와일드 이스트 자본주의 시작


 1991년 12월 소련의 붕괴와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 소위 말하는 ‘통제경제(command economy)’의 종말은 정부 내 긴밀한 연결 관계를 가진 구소련공산당 간부 등을 포함한 신흥 자본가 계층을 만들어 냈다. 소비에트 시절의 엘리트인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를 대체한 이들 신흥 지배계층들은 ‘새로운 러시아인(Novie Rooskie, New Russians)’ 또는 미국식 용어인 ‘이스테블리쉬먼트(Istablishment)’로 불렸다.

통제경제의 붕괴와 와일드 이스트 자본주의는 러시아인의 삶을 혼란으로 내몰았다.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의 삶은 개선되지 않았고, 생존을 위한 투쟁이 계속 되었다. 농업생산과 산업생산은 50%나 하락했고, 수 만 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하찮은 월급마저 제때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필품 이외의 어떤 것도 살 경화가 없었기 때문에, 소비재는 통상 성공적인 투기꾼과 마피아와 정부고위관료들에게만 접근이 가능했다. 평균적인 러시아인, 특히 연금생활자들인 노년층의 삶은 가난에 절박해졌다.(“Nationalist Sentiment Widespread, Growing in Former Soviet Union,” Sept.-Oct. 1995. Journal, pp. 8-10.)

러시아인들은 이런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을 체제 전환기 러시아호를 책임진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항해사 빅토르 체르노믜르딘 총리에게 돌렸고, 사실상 이들은 정부의 비효율 등에 대해 상당부분 책임이 있었다. 짧은 6개월(1992.06-1992.12) 동안의 가이다르 총리(서리)의 충격요법이 전환기 초 러시아를 강타한 이후, 옐친과 체르노믜르딘의 경제정책은 일부 구소련 공산당 노멘클라투라와 ‘새로운 러시아인’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자로 만들었고, 대부분의 국영기업을 마비상태로 몰아넣고, 대부분의 국민을 가난으로 내몰았다. 모스크바 고등경제학교(HSE)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난 20여년 동안 러시아의 부유층은 그들의 재산을 두 배로 늘인 반면, 인구의 2/3는 나아진 것이 거의 없고, 빈곤층들은 소련 붕괴 당시 보다 2배나 가난해졌다.(Tom Parfitt, “Russia's rich double their wealth, but poor were better off in 1990s,” The Guardian, Monday 11 April 2011)

 

부패한 기업가의 번성


소비에트 시절 중앙 집중화된 공산당의 통제는 비록 비효율적이긴 했지만, 적어도 경제활동이 어느 정도 믿을만한 노동력에 의해 예측이 가능했다. 생활수준은 낮았지만, 이 ‘인공위성을 가진 바나나 공화국’은 어느 정도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미국 밀주시대의 마피아들처럼, 알 카포네가 주름잡던 시카고처럼 와일드 이스트 러시아의 산업계는 불법이 판을 쳤다. 기업, 뱅킹, 금융, 보험, 주식거래 등의 부문에서 공정하고 질서정연한 업무활동을 위한 효과적인 법률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존의 법들도 일관적으로 적용되지 않고, 불공평하게 시행되었다. 불법과 부패와 과잉은 처벌보다 보상을 받았고, 러시아인들은 새로운 범죄 집단의 사기 등에 속수무책이었다.

후버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자 러시아 전문가인 스타(Richard F. Staar)는 워싱턴 타임즈의 한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The Washington Times, Nov. 27, 1996)

“한델만(Stephen Handelman)은 자신의 책, 『범죄자 동무(Comrade Criminal)』에서 이제는 크레믈린 내부에까지 미친 소비에트 시절 이래 뿌리를 내린 지하세계의 마피아와 부패한 관료간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 논했다. 전 러시아 사회보장부(Russian Social Security Ministry) 장관, 팜필로바(Ella A. Pamfilova)에 따르면, 소비에트 시절이나 신 러시아 모두 지배계층의 특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결같이 부패하고, 엘리트주의적이고, 노멘클라투라-관료적인 늪이다.”
“한편 그런 와중에 러시아의 국민경제의 성격 또한 급변했다. 국가안보회의(Security Council) 서기인 립킨(Ivan Rybkin)에 의하면, 국민경제의 반이 폭도들, 소위 말하는 ‘마피아’의 손에 넘어갔다. 전 CIA국장 게이츠(Robert M. Gates)는 1996년 초 모든 러시아 기업의 2/3, 약 400개의 은행, 수 십 개의 증권거래소, 150여개의 대형 정부기업이 폭도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추정했다... 러시아의 한 정기간행물은 러시아 GDP의 약 40%가 이제는 부패한 관료 및 기업가와 결합한 조직범죄집단의 손에 있다고 폭로했다.”
 
시장경제로의 이행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국가소유로부터 민간소유로의 기업의 이전이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러시아의 ‘사유화 과정’은 권력남용(abuse)과 부패(corruption)로 얼룩져있다. 러시아의 새로운 경제/기업 엘리트인 올리가르히(oligarchs)들은 우리가 아는 그런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러시아의 특수한 환경이 탄생시킨 특이한 케이스이다. 이들은 순식간에 그리고 손쉽고 단순하게 옐친정부의 선물인 국가소유의 석유, 천연가스, 자동차, 은행, 기타 기업들을 장악했다.

35세의 부수상 코흐(Alfred Kokh)의 사무실을 통해, 러시아 정부는 대부분의 국영기업을 옐친이나 옐친 행정부의 친구나 지지자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들은 이제 새로운 대형기업의 CEO가 되어, 돈과 우호적인 메스컴의 취재를 통해 옐친과 정부를 지지하며 그들의 감사를 표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유코스(Yukos)이다. 옐친 행정부는 러시아에서 2번째로 큰 석유회사였던 국영기업 유코스의 지분 80%를 33세의 구 공산당청년동맹의 단장이자, 메나텝 은행(Menatep Bank)의 설립자인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Mikhail Khodorkovsky)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호도르코프스키는 옐친 행정부에 1억 6800만 달러를 넘겨주었다.(Newsweek, March 17, 1997)  

 

사유화와 올리가르히의 탄생 그리고 쇠퇴


19세기 중반부터 1917년 혁명 때까지 러시아의 자본주의 경험 그리고 짧은 소비에트의 신경제정책(NEP, 1921-1928)의 경험은 근대적 자유 시장경제 체제의 성립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실 1차 대전 직전의 수 십 년 동안 러시아의 산업발전은 급속했었다. 그러나 74년간의 소비에트 공백은 컸다. 소련의 폐허위에 수립된 신 러시아는 급진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건강한 시장경제가 발전할 수 없었다. 이런 급진적 조치에는 투자를 보호할 종합적인 기업법과 은행법, 엄정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할 신뢰할만한 사법체계, 부패경찰의 축출, 전면적인 부패와 범죄의 추방, 안정적인 금융통화정책 등이 있다. 러시아의 경제적 위기와 기회에서 특히 낙관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능력 있고 잘 훈련된 노동인구와 관리계층을 포함하여 방대한 영토가 그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비관적인 것은, 어떤 측면에선 이것이 더 치명적이다, 소비에트 경제 시스템의 비효율 위에 성장한 암시장과 부패, 비효율과 범죄적 요소들이다.   

시장경제로의 이행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유화는 러시아의 특수한 상황에서 특이한 결과를 창출했다. 3중의 변화, 즉 공산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의 정치적 변화, 중앙계획경제 시스템에서 시장 자본주의 경제체제로의 전환, 제국(empire)에서 국민국가(nation state)로의 전환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소비에트 시절 이래의 범죄적 전통과 부패가 만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가 없는 올리가르히(금융산업미디어그룹)가 탄생한 것이다.

사유화(privatization)의 러시아말인 ‘privatizatsiya’는 러시아인들에 의해 냉소적으로 강탈(grabbing)을 의미하는 ‘prikhvatizatsiya’나 해적질(pirating)을 의미하는 ‘piratizatsiya’로 불려졌다.

와일드 이스트의 사유화 과정에서 새로운 러시아의 경제 엘리트들이 탄생했다. 소위 말하는 올리가르히 ‘빅 세븐(Big Seven)’은 다음과 같다. 천연가스 부문의 비야히레프(Rem Vyakhirev-Gazprom), 자동차 부문의 베레좁스키(Boris Berezovsky-Logovaz), 은행부문의 구신스키(Vladimir Gusinsky-Most Bank), 석유부문의 알렉페로프(Vaghit Alekperov-Lukoil), 은행부문의 스몰렌스키(Alexander Smolensky-Stolichnyy Bank), 산업부문의 호도르코프스키(Mikhail Khodorkovsky-Rosprom), 은행부문의 카즈민(Andrey Kazmin –Sberbank)이 그들이다. 전문가들의 추정에 따르면, 이들 일곱 명이 러시아 주식시장에서 최고가에 등재된 기업의 절반을 통제했다. 이들 이외에도 러시아의 새로운 경제 엘리트들로 다음의 사람들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이 은행을 소유한 금융재벌인 포타닌(Vladimir Potanin-Oneksim Bank), 비노그라도프(Vladimir Vinogradov-Inkombank), 디아코프(Anatoly Dyakov-RAO EES Rossii), 두베네츠키(Yakov Dubenetsky-Promstroybank), 아벤(Petr Aven-Alpha Bank) 등이 그들이다.(Izvestia, Jan. 5, 1997)

그러나 돈과 권력은 이동하기 마련이고, 올리가르히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새로운 러시아에서 돈은 항상 권력과 붙어 다녔다. 지난 22년 동안 러시아에서는 돈과 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최고 권력자들은 자신의 공고한 지위를 다지기 위해 ‘마피아’가 절실히 필요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개혁을 위해 처음에는 공산당 개혁파와 나중에는 보수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고, 자신의 ‘우랄 마피아’에 의지한 옐친은 지지세력으로 올리가르히를 키웠다. 쌍뜨 뻬쩨르부르그 출신으로 푸틴 대통령의 ‘뻬쩨르부르그 마피아’의 일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테크노크라트를 키웠고, 강력한 러시아의 기치를 내걸고 재집권한 푸틴(집권 3기)은 러시아의 강력부서, 특히 KGB출신의 실로비키들을 중심으로 옐친 시절의 올리가르히들을 제거해 나갔다. 권력의 이동과 더불어 위험한 줄타기에 성공한 일부 올리가르히들은 올리가르히-실로비키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탈세혐의, 체포, 망명, 영국에서의 독살 가능성 등이 제기되는 베레좁스키의 비극적 결말은 자본주의 22년의 와일드 이스트에서만 볼 수 있는 올리가르히의 흥망에 대한 한편의 영화 같은 장면이다.

 

배규성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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