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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칠레의 새로운 정치지형의 전개

칠레 안태환 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HK교수 2013/07/22

칠레는 여러 가지 점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예외적인 국가이다. 20세기 초반부터 경제, 정치, 사회적으로 안정된 국가였다. 특히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달리 중산층이 두터운 국가이다. 그러나 1973년의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제일 먼저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국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칠레는 아르헨티나에 비해 [더러운 전쟁]의 폭력이 덜 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는 칠레 천주교회가 적극적으로 인권을 지키는 운동을 벌인 때문이기도 하고 피노체트 정부가 체제에 저항적인 많은 지식인과 젊은이들이 해외로 망명을 갈수 있도록 유연하게 대처한 때문이기도 하다.

칠레가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경제 맥락에서 가장 강조되는 포인트는 높은 경제성장과 정치적 안정과 시장개방의 연관성이다. 즉 9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파도처럼 또는 “대홍수”처럼 덮쳐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사회적 저항과 혼란으로 어지러울 때 칠레는 소위 “민주연합 정부들”(Concertacion)이 번갈아가며 집권하면서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의 정치적 정당성과 경제성장의 성공으로 인한 통치의 지속적 안정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민주연합 정부는 피노체트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를 지속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피노체트가 개정한 헌법의 개혁을 시도하지 않고 그 틀 안에서의 온건한 ‘민주적’ 개혁에 만족했다. 그렇게 된 맥락은 피노체트 정부의 약 17년간의 폭압정치에서 해방되어 제도적 민주주의로 나아간 것에 대해 칠레 대중이 만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칠레 대중이 만족하게 된 이유는 피노체트 집권 말기의 칠레의 높은 경제 성장 때문이다. 비록 권위주의적 통치를 했지만 경제가 발전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로써 민주연합 정부들의 정책 기조는 그 전의 피노체트 정부와 별 차이가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지니계수로 상징되는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높게 만들었고 교육, 의료등의 부문에서 소득 차이에 따라 사회를 위계서열화 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엷어지고 소비주의에 매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거 때 주권자의 선택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우파” 세력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흔히 중도좌파로 불리는 칠레의 민주연합정부와 우파 정당 사이의 정책적 차이가 작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200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2006년, 2011년 그리고 올해 학생운동이 일어나면서 칠레의 정치지형에 학생들(고등학생들과 대학생)이 중요한 사회적 행위자가 되고 있다. 이들은 피노체트는 물러났지만 그가 수립한 체제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교육과 의료 부문의 “사회적 공공성”의 확보를 위해  “헌법 개정을 위한 의회”의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학생들이 체제 개혁을 주장하게 된 배경은 1980년과 1990년의 교육법 개정을 통한 수 십 년간에 걸친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의 결과 소득의 차이에 따른 공사립 학교 사이의 교육 차별이 특히 중 고등학교에서 엘리트 사립학교/보조금을 받는 사립학교/시립학교 등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사유화와 경쟁의 강화로 차별은 점점 더 심해지고 이 같은 차별이 장래 직업 선택, 소득 차별, 사회 계급의 고착화로 진행된 것에 학생들이 저항한 것이다. 그렇게 2006년과 2011년의 대규모 시위를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특히 2011년의 대규모 학생시위는 까밀라 바예호라는 학생운동 지도자를 급부상시키기도 하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헤게모니를 가져온 칠레 대중의 문화지형을 바꾸고 싶다는 언급을 함으로써 새로운 세대의 문화 정치적 인식을 보여준바 있다. 신자유주의와의 투쟁은 대중의 순응주의와 탈정치화를 극복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글로벌 정보화의 덕택에 이웃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변화 즉, 아르헨티나, 브라질, 에콰도르,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등의 교육과 의료부문에서 “사회적 공공성”의 강화 흐름에 학생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것이다.

기성세대의 정당, 노조, 지식인 중심의 기존 사회운동 단체나 시민사회 진영이 독재에서 민주로의 이행에서 거둔 제도적, 형식적 변화에 만족하고 실질적 민주체제로의 개혁을 회피해온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민주 개혁세력이 이렇게 중도적인 개혁을 추진하게 된 맥락은 과거 1970년 아옌데의 “민중연합”정부도 그 안에 좌파적인 사회당 등의 세력이 우파적인 기독교 민주당과 동거했었기 때문이다. 이들 기독교 민주당 세력은 1973년의 피노체트 쿠데타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기독교 민주당의 세력이 피노체트가 권력을 이양했을 때에는 “민주연합”정부의 핵심세력이 되어 여러 번 대통령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런 칠레의 정치 지형의 흐름을 보면 칠레는 오랫동안 우파 또는 중도파가 훨씬 우세한 정치지형을 가져왔고 아옌데의 출현은 연합정치를 통해 일시적으로 잠시 출현했던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우파 또는 중도우파 사이 양당 구도의 오랜 흐름이 2006년, 2011년의 학생운동의 출현으로 균열될 수 있는가가 칠레의 역사학자들 또는 사회 과학자들의 큰 관심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0년의 칠레 대선은 매우 중요했다. 이 대선에서 우파 정치인인 세바스티안 피네라가 집권했다. 1958년 이후 합법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최초의 우파 정부였다. 그만큼 칠레는 중도지향적인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2010년 대선에서 오랜 양당구도가 깨지면서 사회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 3의 득표를 한 나이가 무척 젊은 후보인 엔리케스-오미나미가 출현했다. 이 같은 제 3의 좌파 정당의 출현은 2011년의 대규모 학생운동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는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과거의 혁명적 급진좌파와 성격이 다른 문화 정치적, 비판적 좌파의 형성을 암시하고 있다. 70년대 말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칠레 대중의 개인주의와 소비주의의 문화를 사회 공공성을 중시하는 문화로 바꾸고자 하는 시도를 말한다. 파편화된 개인들의 무기력을 깨트리고 사회개혁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현재 칠레는 2013년 11월 대선을 앞에 두고 있다. 이미 한번 집권한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바첼렛 여성 후보가 우파 후보에 비해 유력하다고 한다. 이 같은 중도좌파와 새로운 좌파의 부상이라는 정치지형의 변화와 대규모 학생운동의 출현은 칠레 사회의 진보적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2010년 대선에서 사회당 좌파 세력과 군소 좌파 세력이 독자 대선 후보를 냄으로써 비록 득표율은 적지만 유의미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 같은 새로운 변화는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피노체트-반 피노체트의 수사로 민주연합정부가 칠레 시민사회에서 정당성을 가져온 것의 한계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경제, 사회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를 지속시키는데 대해 칠레 사회의 소외되고 배제된 대중의 상당부분이 반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그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칠레 정치의 보다 심도 있는 개혁이 가능한가 여부를 놓고 칠레 학생운동이 계속해서 주목받고 있다. 2011년부터 학생운동의 힘이 지식인과 정치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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