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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I : 짜이왈라(Chaiwala)에서 유력한 수상후보로

인도 고홍근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어과 교수 2013/07/26

현재 인도에서 나렌드라 모디 처럼 훼예포폄(毁譽褒貶)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흔히 ‘독재자’, ‘비즈니스와 행정의 달인’, ‘힌두국수주의자’, ‘개혁주의자’, ‘요가 마니아(Mania)’, ‘힌두 포퓰리스트(Hindu Populist)’, ‘청렴한 공직자의 상징’ 등이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로 등장한다. 불과 5-6년 전만해도 모디는 비교적 성공한 지방정치인의 하나로 간주되었을 뿐이었지, 2014년 인도 수상 후보 중의 한명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필자 역시 그를 괴팍하고 독선적인 지방 맹주 정도로 치부했었을 따름이었다.

모디는 1950년 현재 구자라뜨(Gujarat)주의 와드나가르(Vadnagar)에서  대대로 식료품상을 하는 힌두 중산층 집안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앙심이 깊어 한때 싼야씨(Sanyasi: 힌두 수도자)를 꿈꾸기도 했던 그는 학교에서 성적은 평범했지만 논쟁을 즐기는 학생으로 선생들과 동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10대 후반에는 아흐메다바드(Ahmedabad)의 버스정류장 앞 길거리 찻집에서 형을 도와 짜이(Chai: 인도식 홍차)를 팔았다. 이 당시 단골이었던 힌두국수주의 단체 RSS(Rashtriya Swayamsevak Sangh: 민족의용단) 간부의 영향을 받아 그 하부청년조직에 입단했다. 곧 그는 RSS의 상근 선전원(Pracharak)으로 임명되었고 한편으로는 학업을 계속하여 구자라뜨 대학교에서 정치학석사를 받았다. 모디의 정치적 관점은 이 당시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훗날 모디가 정치가로 발탁된 배경 그리고 선거 전략가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 것도 이때 얻은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청년 모디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전기들을 뒤져보아도 RSS의 촉망받는 간부로만 강조되어 있을 뿐이지 인생의 통과의례인 결혼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에도 모디는 자신의 결혼여부에 대해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있다. 2002년 언론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모디는 1966년경에 자신보다 3살 어린 여자와 결혼을 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부인을 외면한 채 살아오고 있다. 평생을 초등학교 교사로 홀로 보낸 그의 부인은 현재 구자라뜨의 인구 2,500명에 불과한 마을에서 빈한하게 살고 있다.  

1987년 RSS는 BJP(Bharatya Janta Party: 인도인민당) 구자라뜨 주 본부에 모디를 파견하여 당원의 충원과 각종 선거의 후보자 선정 작업을 담당하는 조직담당비서(Organisation Secretary)로 일하게 한다. 정치인으로서의 모디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모디는 앞으로 장래가 보장되는 선출직에 진출하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오로지 후보자 선정 작업, 선거운동 전략의 구상과 집행에만 몰두했다. 이와 같은 모디의 초연한 자세는 그가 ‘조직을 위해 개인을 헌신하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모디가 BJP로 옮긴지 8년만인 1995년 주의회 선거에서 BJP는 승리하여 주 정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승리는 종파 간 긴장상황을 적절히 이용하여 힌두들의 표를 결집시켜 BJP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고 승산있는 후보자를 선별해내는 모디의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모디는 BJP 구자라뜨 본부의 명실상부한 실력자로 부상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처음으로 정권을 획득한 구자라뜨 BJP는 권력투쟁에 휩싸여 분당의 위기까지 맞게 되었다. 이 혼란의 핵심에 모디가 있었던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델리의 BJP 중앙본부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모디를 뻔잡(Punjab)주를 비롯한 델리 근처의 4개주를 담당하는 총괄비서(General Secretary)로 임명하여 전출시켰다. 이것은 얼핏 지방정치인이 중앙 정치무대로 진출하는 승진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모디를 그의 정치적 기반에서 떼어 놓는 징계와 다름없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라고 했던가? 모디는 이 위기를 이용하여 중앙본부에서 인맥을 형성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고위당직자와 언론인들에게 호소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 시기, 모디가 집중적으로 접근했던 인물은 훗날 수상이 되는 바즈페이(A, B. Vajpayee)였다. 아마 두 사람 모두 RSS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모디의 접근을 용이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 바즈페이는 수상이 된 직후 모디를 전국 조직담당 비서(National Organization Secretary)로 임명하였다. 이번에는 허울만의 승진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BJP와 RSS의 교량 역할을 하는 지위에 오른 것이다. 이때부터 모디는 더 이상 무대 뒤편에서 활동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디 이전의 전국 조직담당 비서들은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정치적 사안에서 전면에 나서는 것을 피해왔었다. 그러나 모디는 1999년 까르길 전쟁(Kargil War)에서 파키스탄과의 평화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기자회견과 TV 출연을 거듭하여 호전적인 발언을 계속했다. 한 기자회견에서는 ‘파키스탄의 도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비리야니(Biryani: 무슬림들이 창안한 인도식 볶음밥)가 아니라 총탄과 폭탄을 대접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여 강경파 힌두들의 환호를 받은 일도 있었다. 아마 모디는 이때부터 대중정치인으로 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2001년 구자라뜨의 BJP는 겨우 정권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내분은 계속되었고 최근의 2차례의 보궐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하는 등 큰 위기에 빠져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할 새로운 주 수상으로 모디가 지명되었다. 모디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나는 1년 앞으로 다가온 주 의회 선거를 위한 구원투수일 뿐이다.’라고 자임했다. 사실 모디 자신도 10년 이상 그 직위를 연임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디의 취임을 가장 기뻐했던 것은 RSS였다. 일개 상근 선전원이었던 인물이 주 수상으로까지 출세한 것은 RSS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고 청년단원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자라뜨의 원로 정치인들은 모디를 좋아하지 않았고 관료들은 얼마 안 되어 떠나갈 낙하산으로 취급했다. 사면초가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모디는 반(反)정치인, 친(親)관료의 양면전술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이 행정의 문외한임을 자인하면서 주를 통치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데 모든 정력을 쏟았다. 관료들이 지칠 정도로 회의를 열었지만 그 자신이 발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관료들의 설명을 단어 하나, 억양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경청했고 그들의 발언이나 토론을 방해하는 일도 없었다. 행정조직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파악하는데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반면, 정치인들로 구성된 각료회의에서는 자신이 델리 중앙본부의 지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점을 은연중 강조하면서 논의보다는 명령으로 일관했다. 모디의 이 양면적인 태도에 대하여 관계설정이 복잡한 정치인보다는 상하관계가 분명한 관료들과의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주정부를 장악하려 했다는 정치공학적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모디가 주 수상으로서 적응하고 있을 즈음인 2002년 2월 27일 그의 경력에서 가장 치명적인 고드라(Godhra)사건이 발생했다. 고드라는 구자라뜨 주 동부에 위치한 인구 약 12만 명의 작은 도시로서 열차들이 30분에서 1시간 정도 머물며 물 등을 공급받는 간이역이 있다. 사건이 일어나기 몇 주 전부터 아요디아(Ayodhya)의 힌두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가는 힌두들과 역의 무슬림행상인들 사이에 잦은 충돌이 있어 왔었다. 이와 같은 긴장 속에서 사건 당일 무슬림 소녀 한명이 열차 승객인 힌두들에게 납치되었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흥분한 무슬림 행상인들이 열차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공방이 시작된 약 1시간 뒤 열차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20명의 어린이와 15명의 여성들을 포함하여 모두 58명이 소사(燒死)하였다. 이 화재의 원인이 무슬림들의 방화 때문인지 아니면 힌두들이 열차 내에서 사용하던 음식 조리기구에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다. 사건 다음 날, 모디는 사망자들의 장례식을 주 수도인 아흐메다바드에서 거행하도록 선포하는 기자회견에서 뉴튼의 제 3법칙을 인용하였다. 즉, '모든 운동은 같은 크기의 힘을 반대방향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슬림들에게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기자회견 직후부터 구자라뜨 전역에서 무슬림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약 1개월 이상 계속된 이 폭동에서 1,200명이상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했으며 약 14만 명이 집을 잃었다. 폭동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인 4월 모디는 BJP 전국회의에서 '모든 일의 원인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불을 붙인 것은 누구인가? 왜 불이 번져 나갔는가? 무슬림은 세계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 곳의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지 못한다. 그들은 테러로 위협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하고 있다.'고 무슬림에 대한 공개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어 참석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모디는 힌두 강경파와 BJP의 영웅이 되었다.

폭동 9개월 후에 실시된 구자라뜨 주 의회 선거의 선거운동 기간 중 모디는 '구자라뜨의 자존심(Pride of Gujarat)'이라는 선거구호를 내걸고 유세 연설에서는 구자라뜨의 무슬림들을 내부의 적을 의미하는 '제5열(第五列)'이라고 부르며 파키스탄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모디의 반무슬림 선동이 효과적이었는지 BJP는 주의회 의석의 2/3를 차지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1회용 구원투수’가 아니라 ‘4번 타자 겸 선발투수’가 된 것이다. 하지만 구자라뜨에서 모디에 대한 환호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국내와 국외에서의 비난도 강해졌다. 모디가 학살을 방조・조장하였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것은 2004년 연방의회선거에서 BJP가 패배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또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모디에 대한 비자발급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국제여론도 악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모디는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한다. 힌두강경파들과의 연대를 축소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변신의 화두는 ‘부패척결’이었다. 구자라뜨의 관료사회도 인도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부패 수준이 매우 높았다. 모디는 경찰을 동원하여 정치인들과 관료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게 했고 그것을 부패척결의 도구로 사용했다. 비록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방법이지만 효과적이었다. 지금도 구자라뜨에서는 ‘부패가 있으면 모디가 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고 한다. 구자라뜨 주에서 부패가 대폭 줄어든 이유 중에는 모디의 청렴한 처신도 한몫을 했다. 사실, 그의 어머니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고 그의 형제들은 하급관료, 소매상인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친인척을 둘러싼 비리가 끊이지 않는 인도 정계에서 매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2007년 주 의회 선거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로 승리한 모디는 세 번째 임기를 맞게 되었다. 주 수상으로서의 이 세 번째 임기 동안 모디는 ‘Modi means Business(모디는 비즈니스이다)’라는 전설을 탄생시켰다. 황무지에 불과했던 구자라뜨를 공업중심지로 만든 인물, 빠르게 성장하는 인도에서도 가장 빠른 성장을 달성하고 있는 인물, 해외투자를 가장 많이 유치하고 있는 인물 더 나가서는 구자라뜨 뿐 만 아니라 전체 인도를 급속히 발전시킬 인물이라는 어느 정도의 과장과 허구가 섞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모디는 성공했다. 모디의 업적이라고 칭송되는 많은 부분들의 사실여부는 현재 인도인들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모디에게서 꿈과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2년 12월 구자라뜨 주의회 선거에서 모디는 다시 한 번 압승을 거두어 구자라뜨 역사상 최초로 4연임을 하는 주 수상이 되었다. 모디의 일거수일투족은 전국언론들의 관심대상이 되었고 자타가 공인하는 인도 정계의 거물이 되었다. 2013년 3월 BJP는 당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의회위원회(Parliamentary Board) 및 중앙선거대책위원회(Central Election Committee)의 위원으로, 또 6월에는 중앙선거대책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모디의 이와 같은 승진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BJP의 가장 강력한 원로이자 1990년대 인도 정치의 핵심이었던 아드와니(L.K. Advani)는 자신의 모든 당직의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모디의 승진을 반대하였다. 아드와니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BJP가 최초의 결정을 관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밑에서부터의 압력(pressure from below)’때문이었다.

현재 BJP 내에는, 아니 인도 정계 전체에서 모디와 같은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은 없다. 모디가 가는 곳에는 수만 명의 군중이 운집하고 그 군중들이 ‘자이 모디(Jai Modi: 모디 만세)를    외치게 할 연설능력을 그는 가지고 있다. 지난 5월 CNN・IBN이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도 ’차기수상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은?‘이라는 질문에 응답자 38%가 모디를 지명하여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물론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다. 앞으로 어떤 변수가 나타날지는 예상하기는 어렵지만, 버스정류장 앞 길거리노점에서 차를 팔던 짜이왈라가 전체 인도를 통치하는 수상 직위에 아주 가깝게 다가서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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