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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제 2차 프라하 창문 밖 투척사건(1618)

체코 김장수 관동대학교인문대학사학과 교수 2013/08/01

체코 민족이 주로 살았던 보헤미아(Böhmen) 지방은 지리적인 호조건과 경제적인 활성화로 인해 항상 주변 국가들의 관심 및 침투대상으로 부각되곤 했다. 따라서 중부 유럽을 지배하려던 합스부르크(Habsburg) 가문이 16세기 초반부터 이 지방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실제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16세기 초반부터 러시아 및 독일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Poland)를 압박했고 그것은 폴란드가 보헤미아 및 헝가리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포기하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이에 따라 보헤미아․헝가리 국왕이었던 블라디슬라프 2세(Vladislav II:1471-1516)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야겔로(Jagiello) 왕조(1383-1572)가 가졌던 주도권 역시 같은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516년 블라디슬라프 2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루드비크(Ludvík: 1516-1526)가 보헤미아․헝가리 국왕으로 등극했는데 이 인물은 헝가리에서 러요시 2세(Lajos II)로 지칭되었다. 그러나 이 인물 역시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튀르크의 압박을 효율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 더욱이 루드비크가 1526년 8월 29일 남부 헝가리의 모하치(Moháčs) 전투에서 오스만 튀르크군에게 패배함에 따라 보헤미아·헝가리 왕국은 매우 급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그러한 상황은 루드비크가 퇴각과정에서 목숨을 잃게 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야겔로 왕조는 단절되었고 유럽의 많은 군주들은 그 후계자 선정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1526-1564) 역시 자신의 부인 안나(Anna Jagiellonica)가 블라디슬라프 2세의 딸이었음을 부각시켰는데 그것은 자신도 보헤미아· 헝가리 국왕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지금까지 헝가리방어에 부담을 느껴왔던 보헤미아 귀족들 역시 모하치 전투이후 보헤미아-헝가리 연합유지에 대해 회의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들은 1526년 9월 헝가리와의 결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자신들의 제 권한을 보장해 줄 군주모색에 나섰다. 그리고 이로부터 얼마 안 된 10월 24일 이들은 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에 따라 보헤미아 지방은 1526년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는 보헤미아 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오스트리아의 다른 지방들과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지방에 절대왕정체제를 도입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구교로의, 즉 가톨릭으로의 단일화정책도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이 인물에 이어 보헤미아 왕국의 위정자로 등장한 막시밀리안 2세(Maximillian II: 1564-1576) 역시 가톨릭 지향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후스주의 전통에다 루터교의 개혁적 요소들을 가미한 체코 컨페션(Confessio Bohemica; Česká konfese)과 이것을 토대로 한 독립교단의 설립요청을 거부했다. 이 당시 막시밀리안 2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보헤미아 귀족들이 크게 반발하리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그는 보헤미아 지방 내의 가톨릭 세력과 이 세력과의 합의를 모색하던 구우트라퀴스트(staroutrakvista)의 강력한 반발, 에스파냐의 신속한 개입, 그리고 교황 비오 4세(Pius IV)의 반대 입장 표명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만 했다. 이어 왕위를 계승한 루돌프 2세(Rudolf II:1576-1611)는 이전의 위정자들과는 달리 보헤미아 귀족들과의 대립을 가능한 한 회피하려고 했지만 종교적 문제에 있어서는 타협을 포기하는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 이 인물의 동생이었던 마티아스(Matthias: 1611-1619) 역시 보헤미아 왕국 내 비가톨릭 세력에 대한 탄압을 보다 강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향후 보헤미아 지방에서 종교적 분쟁이 더욱 심화되리라는 것도 예견하게 했다.

 

실제적으로 보헤미아 지방 내 비가톨릭 세력에 대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1617년 일부 신교 교회들, 브라우나우(Braunau:북부 보헤미아)의 베네딕드파 수도원(Benediktinerabtei) 내에 세워진 교회와 프라하 대교구 소속 영지에 건설된 클로스터그라브(Klostergrab) 교회가 강제로 폐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일부는 파괴되기도 했다. 이 당시 보헤미아 지방의 신교도들은 1609년 7월 루돌프 2세가 그들에게 교회를 세워도 된다고 허락했을 때 그들은 어느 곳에서나 교회를 세워도 무방하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마티아스의 이러한 정책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반발 강도도 증대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됨에 따라 마티아스는 1618년 3월 21일 국왕 소유의 지역에서만 신교 교회를 세울 수 있을 뿐 가톨릭교회 영지에 그러한 교회를 건립해서는 안 된다는 유권적 해석도 내렸다. 다음 날 비가톨릭 세력은 프라하에 집결한 후 1609년의 칙서를 위배한 국왕에게 항의하는 절차를 밟았으나 마티아스는 자신의 허가 없이 그러한 집회를 개최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와 더불어 당시 진행된 경제적인 이권쟁탈 역시 보헤미아 귀족들과 마티아스와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618년 5월 21일 보헤미아 귀족들과 프라하 시민들은 당시 부각된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교집회를 개최했지만 마티아스는 그러한 집회활동을 불허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됨에  따라 다음날, 즉 5월 22일 보헤미아 형제교단의 부도바(V.Bodova)와 보헤미아 귀족들을 주도하던 투른(Thurn) 백작이 스미리키(Smiřicky)의 집에서 향후 대책에 대한 논의를 했고 거기서 보헤미아 총독을 살해하기로 합의했다. 5월 23일 중무장을 한 투른 백작과 슐리크(v.Schlick) 백작은 일련의 보헤미아 귀족들과 더불어 프라하 성, 흐라드신(Hradschin) 왕궁으로 출발했다. 프라하 성에 도착한 이들은 즉시 궁중사무국(Hofkanzlei)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4명의 핵심인물, 대성주대리 슈테른베르크(Sternberg), 기사단 부단장(Grossprior) 로브코비치(Lobkowicz), 마르티니츠(Martinic), 그리고 슬라바타(Slavata)를 억류하는데 성공했다. 여기서 보헤미아 귀족들은 황제의 부적절한 답변서작성에 관여한 인물들을 찾아내려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러한 것에 대해 언급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보헤미아 귀족들은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것은 억류자들로 하여금 답변서의 내용 모두가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입장을 표명하게 했다. 이러한 회피적 언급에 대해 보헤미아 귀족들은 강한 분노를 표시했을 뿐만 아니라 전날 합의에 따라 구금자들의 일부를 창밖으로 던지는데도 동의했다. 여기서 중도적 성향의 슈테른베르크와 로브코비치는 창밖투척대상에서 배제되었고 마르티니츠와 슬라바타가 프라하 창밖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귀족명감작성자(Landtafel- schreier)였던 파브리키우스(P. Fabricius)도 이들과 같이 투척되었다. 약 20미터 아래로 던져진 3인 모두는 크게 다쳤다. 특히 슬라바타는 머리를 크게 다친 후 황제 중재관의 저택으로 피신했고 거기서 로브코비츠 부인의 간호를 받았다. 보헤미아 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투척된 3인은 목숨을 잃지 않았는데 이것에 대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측의 설명은 달랐다. 가톨릭의 설명을 따를 경우, 성모 마리아가 20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마르티니츠, 슬라바타, 그리고 파브리키우스를 자신의 옷자락으로 받아 안전하게 땅에 내려놓아서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프로테스탄트는 그들이 분뇨더미 위로 떨어졌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다는 세속적인 언급을 했다. 30년 종교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 사건은 후에 ‘제 2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다〔훼네스트라(fenestra)는 ‘창문’을 뜻하는 라틴어이고, 'Defenestration'은 ‘창문 밖으로’라는 의미를 가진다. 대화 과정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상대방을 창밖으로 던지는 것은 보헤미아 지방의 오랜 관습(nach altem böhmischem Brauch)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이것은 기존 질서체제와의 관계를 파기하는 상징으로도 간주되었다. 1419년 7월 30일 프라하의 노베메스토(Nové Město)에서 젤리프스키(Zelivský)가 주도하는 일련의 강경파 후스주의자들이 동료 후스주의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펼치다가 그것을 거절하는 시 의회 의원들을 시청 창문 밖으로 내던졌는데 이를 지칭하여 ‘제 1차 프라하 창문 밖 투척’이라고 한다. 그리고 제 3차 프라하 창문 밖 투척사건은 1948년 3월 10일에 발생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외무장관이었던 얀 마사리크(Jan Masaryk)가 로레탄스케(Loretánské) 광장에 위치한 외무장관 공관의 정원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자살로 결론이 내려졌지만 몇 년 후 체코의 비밀정보원이었던 아우구수트(F.August)가 서방으로 망명한 후 얀 마사리크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모스크바 당국의 사주로 자신의 집무실에서 창밖으로 던져졌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에 따를 경우 얀 마사리크가 장관직에서 사퇴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외로 떠나려 했기 때문에 암살되었다는 것이다.〕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 이후 프라하 시민들은 교회 및 수도원에 대한 방화를 자행했고 거기서 다수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승들이 살해되기도 했다. 그리고 하층민들 역시 유대인 거주 지역을 습격하여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생활필수품을 가져가기도 했다. 거의 같은 시기 보헤미아 귀족들은 ‘30인 집행위원회(Direktoren)’를 구성했는데 거기에는 대귀족, 기사, 그리고 도시의 대표들이 각기 10명 씩 참여했다. 그러나 이 집행위원회의 실제적 권한은 몇몇 대 귀족 들이 장악했다. 이러한 폭동적 상황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30인 집행위원회’는 보헤미아 총독과의 접촉을 통해 빈 정부의 양해를 구하려는 온건적인 방법도 동시에 추진했다. 당시 빈 정부 역시 프라하 사건을 하나의 우발적 재앙 또는 정치적 과실로 간주했기 때문에 크레슬(Kresl) 추기경(1599년부터 마티아스 황제의 최측근인물로 활동했다)은 협상을 통해 보헤미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1618년 7월 20일 크레슬이 마티아스의 후계자로 등장한 페르디난트(Ferdinand) 대공에 의해 실각됨에 따라 분위기는 일시에 반전되었다. 더구나 1619년 3월 20일 마티아스가 사망함에 따라 ‘30인 집행위원회’는 보헤미아 왕국을 승계할 인물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혀야만 했다. 여기서 이들은 문서로 보장된 자신들의 선거권을 부각시켰지만 빈 정부는 단순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인물을 새로운 위정자로 선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거권행사에서 배제된다는 유권적 해석을 내렸다.

 

빈 정부의 이러한 입장표명을 통해  ‘30인 집행위원회’는 더 이상의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이것은 이들로 하여금 독자적인 헌법 제정과 군대 소유를 선언하게 했다. 이에 따라 ‘30인 집행위원회’는 칼뱅 계통의 헤르보른(Herborn)대학에서 법률학을 강의하던 알트후시우스(Althusius)에게 헌법제정을 요청했다. ‘단지 신의 영광을 증대시키거나 또는 동맹체〔보헤미아, 모라비아, 오버라우지츠(Oberlausitz), 그리고 니더라우지츠(Niederlausitz)로 구성된 동맹체: 첨가〕에 가입한 제 지방의 특권을 지속적으로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Allein zu Beförderung Gottes Ehre, zu beständigen Schutz und Rettung eines jeden Landes Privilegien)’라는 머리말로 시작된 1619년 7월 31일의 헌법, 즉 보헤미아 연방문서(die böhmischen Konföderationsakten)에서는 귀족들의 제 특권이 다시금 부각되었는데 그러한 것은 보헤미아 국왕의 권위 및 위상이 크게 제한 된데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향후 국왕은 귀족동맹에서 선출되고, 이렇게 선출된 국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 선전포고를 하거나 외국으로부터 차관도입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울러 헌법에서는 신교도들만이 고위관료로 임용될 수 있다는 것과 신교지역 내에서 가톨릭교회를 건립할 수 없다는 것 등도 명시되었다. 또한 헌법에서는 연방체제구축에 필요한 일련의 기본적 골격도 제시했는데 이것은 향후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헌법제정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 당시 ‘30인 집행위원회’는 프라하에서 예수회원들을 추방했을 뿐만 아니라 국왕을 지지했던 인물들의 재산도 강제로 몰수했다. 이어 이 위원회는 1619년 8월 22일 페르디난트가 승계한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지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밝혔는데 그것은 ‘오스트리아 국왕이 보헤미아 귀족들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는다’ 라는 1526년의 합의각서에서 비롯된 것 같다. 보헤미아 귀족들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들을 지원할 외부 세력들, 즉 신교국가들이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 같다. 실제적으로 네덜란드는 ‘30인 집행위원회’에게 50만 굴덴(Gulden)의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을 뿐만 아니라 6천명의 병사를 이미 보헤미아 남부지방에 파견하는 적극성도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고무된 ‘30인 집행위원회’는 영국의 제임스 1세(James I)의 사위였던 팔츠(Pfalz) 선제후(Kurfürst)의 프리드리히 5세(Friedrich V:1619-1620)와 접촉한 후 8월 26일 그를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에 앞서 같은 날 ‘30인 집행위원회’는 보헤미아 왕국이 선출왕국이라는 것을 다시금 부각시켰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1619년 11월 4일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한 프리드리히 5세는 1608년 5월 신성로마제국내의 신교 제후들과 더불어 일종의 군사동맹체제인 유니온(Union)을 결성한 이후부터 구교세력과 대립하고 있었다.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한 직후 프리드리히는 보헤미아-팔츠의 연합군을 이끌고 빈을 공격했으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제공격은 유럽의 구교국가들로 하여금 페르디난트 2세를 지원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가 보헤미아-팔츠와의 대립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1620년 11월 8일 안할트(v.Anhalt)는 보헤미아-팔츠 연합군을 이끌고 빌라 호라(Bilá hora)에서 틸리(Tilly)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및 그  동맹국가 군들과 대접전을 펼쳤으나 끝내 패하고 말았다. 이후 항쟁을 주도한 인물들이 처형된 이후 보헤미아 전 지역에서는 재산몰수, 추방, 그리고 재가톨릭화가 2년 이상 지속되었고 그러한 상황은 특히 프라하의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경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실제적으로 페르디난트 2세는 몰수한 신교귀족들의 영지를 자신의 추종세력과 보좌관들에게 하사했고 후스전쟁이후 영토적 손실을 입었던 프라하 인근의 수도원들과 고위성직자들에게도 분배했다. 이 당시 몰수 및 배상을 전담한 황제몰수연합위원회은 680명의 귀족들의 재산과 50 여개의 도시들이 보유한 자산을 강제적으로 몰수했다. 또한 항쟁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재산의 20%에서 50%정도를 포기해야만 했다.

 

체코의 저명한 역사가였던 코치(J.Kočí)는 프라하 창문 밖 투척사건에 대해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는데 그에 따를 경우 프라하 창문 밖 투척사건으로 체코 민족의 재난과 불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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