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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 마을, 키프로스 섬 암모호스토스의 바로시아

중동부유럽 기타 최자영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HK교수 2013/07/31

암모호스토스는 키프로스 동부에 있는 아름다운 해변도시이며, 같은 이름을 가진 주(州)의 본청 소재지이다. 터키어로 ‘가지마우사’, 고대 그리스에서는 ‘살라미나’, 라틴어로는 ‘파마구스타’로 불렸고, 헬레니즘시대의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왕조 그리스계 왕비 아르시노에(2세 필라델푸)를 기려서 ‘아르시노에’, 또 그 후에는 ‘콘스탄티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곳 암모호스토스에 바로시아(바로시)라고 작은 마을은 약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거주하던 곳이었으나, 1974년 7월 제2차 터키 군대가 점령한 이후 그리스인들은 이곳을 떠났다가, 지금은 빈 마을로서 사람이 살지 않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이들 실향민들의 귀환 문제는 그리스 본국은 물론 유럽연합(EU), 미국을 비롯하여 UN까지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암모호스토스가 갖는 역사적 애환은 이 지역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명칭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는 소아시아의 남동쪽 연안에 자리한 에게 해의 섬 키프로스가 지정학적으로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도 멀지 않으며, 또 고대 바다를 항해하던 조잡한 수준의 배들이 바다 한 가운데가 아니라 육지에 붙어서 근해를 항해하곤 했으므로 교통의 요지에 있었던 탓이기도 하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세력이 충돌, 교차하던 키프로스의 과거 역사는 지금도 터키-그리스 간 영토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암모호스토스가 고대 그리스에서 살라미나로 불린 것은 그리스 본토 아테네 연안에 있는 살라미나 섬과 관련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미 트로이 전쟁(기원전 13세기 말로 추정)이 끝난 직후 그리스의 살라미스 섬 출신, 텔라몬의 아들이며 아이안다스의 형제인 테우크로스에 의해 이곳이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은 3대륙 세력 쟁탈전의 중심이 되었다. 헬레니즘시대에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로마 제국을 이은 중세 비잔티움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에 이 곳 암모호스토스는 매우 번창했다. 이곳 출신인 그의 황비 테오도라가 이곳에 부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647년에 이슬람 교도 사라센 인의 침략을 받아 주변 도시들이 파괴당하게 되자 그 유민들이 암모호스토스로 몰려 들어와 이곳 항구도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붐비게 되었다. 아랍인들이 기독교의 성지를 점령한 다음부터 암모호스토스는 기독교인들의 피난처가 되는 동시에 동부 지중해 중요한 교역의 한 중심지가 되었다.

13~14세기가 되면 유럽의 프랑크인 기사들이 이곳을 점령했고, 이들이 건설한 요새는 지금까지 남아서 이곳은 요새로 둘러싸인 항구의 모습을 갖고 있다. 당시 십자군으로 영국의 사자왕이 이곳을 처음 점령했으나, 프랑스의 Guy de Lousignan(1159~1194)이 바로 이곳을 탈취하여 ‘키프로스와 예루살렘의 왕’으로 등극했다.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젠노바, 나폴리 등 이탤리 상인은 물론 스페인의 카탈로니아, 프랑스의 마르세이유, 또 동방의 시리아 상인들까지 이곳에 출입 거주하면서 암모호스토스는 동․서방 지중해의 교역 중심지가 되었다. 급기야 1373년에 암모호스토스는 제노바 상인들의 손으로 넘어가서 한 세기를 보내고, 1489년에는 베니스 상인이 이곳을 점령하여 동부 지중해의 행정과 군사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 때 세워진 유명한 탑은 세익스피어의 비극 <오텔로>의 마지막 장면의 배경으로서 ‘키프로스의 한 항구’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마침내 오스만 터키가 1570년 암모호스토스를 점령했고, 암모호스토스 인들의 필사적인 저항은 1571년 8월로 끝이 났다. 이 때 성 아래 죽어 쓰러진 터키인의 시신이 8만에 이르렀으며, 성에 갇혀서 저항하던 암모호스토스 인은 굶주림으로 죽거나 항복 후 거의 다 살육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게 암모호스토스는 무슬림의 오스만 터키의 지배 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1878년 키프로스는 오스만 터키의 종주권 하에 있었으나, 그 행정권(주권이 아닌)은 영국(당시 대영제국)에 양도되었다. 영국은 1906년 암모호스토스 항구를 근대화하고, 이곳을 자국의 인도 식민지로 연결되는 수에즈 운하를 지키는 해군 기지로 삼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 편에 서자 영국은 키프로스를 병합했으며, 1925년 영국의 왕령식민지(Crown colony)로 선언했다. 1960년 8월 영국, 그리스, 터키 간 취리히 및 런던 협정으로 키프로스는 독립을 얻게 되었으나(1961년 영국연방에 가입), 아크로티리와 데켈리아의 두 군사기지는 그대로 영국이 보유하게 되었으며, 현재 <키프로스 공화국>도 이곳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1974년 그리스의 우익 군사 정권 파파도풀로스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키프로스 섬을 그리스에 병합하고자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에 반발한 터키가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섬의 37%를 점령했다. 암모호스토스의 바로시아에 살던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이 고향을 잃고 유민이 된 것도 이 즈음이다.

1983년에 터키계 키프로스 인들이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터키의 지지를 제외하고는 UN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고 있는 남부의 키프로스 공화국은 2004년에 EU(유럽연합)의 회원국이 되었고, 2008년 1월 1일에는 유로존에 가입했다.
바로시아의 실향민 문제를 두고 암모호스토스의 그리스계 주민은 물론 EU, UN 등에서 <터키계 북키프로스>는 물론 터키 정부와 다각도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터키의 EU 가입 가능성을 미끼로 양보를 얻어내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시아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터키-그리스 간에 벌어지는 전체 키프로스 문제의 해결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2012년 3월 이후 터키 측이 이른바 ‘유령 마을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마을)’ 바로시아 항구를 7월 1일경 개방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하면서 고무적인 분위기가 지배했으나, 결국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스 측 키프로스는 터키 측의 이런 태도를 진정성 없는 고의적인 기만술로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올 2013년 5월 들어 키프로스 공화국(그리스계 키프로스) 외무부장관 이와니스 카술리디스는 워싱턴과 뉴욕에서 미국 외무부장관 존 케리와 UN 사무총장 반기문과 각각 회동한 다음 그들의 도움을 청하고 나섰다, 그리스계 키프로스 측은 올 가을 이후 키프로스 문제에 대한 새로운 협상의 장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것도 지금까지 동의한 사안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 그리고 암모호스토스 실향민을 귀환시키는 대신 그 반대급부로서, EU(유럽연합)의 감독 하에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에게 즉각적으로 상업 활동을 허용할 의사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존 케리 미 외무부장관은 키프로스의 <배타적 경제수역(EEZ)> 분쟁이 키프로스 사태 해결의 일환이라는 점을 환기하고, 배타적 경제수역의 에너지 자원에서 나오는 수입은 양(兩) 키프로스(터키계와 그리스계) 측에 똑같이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이 워싱턴의 확고한 입장이라는 점을 밝혔다. 이에 대해 키프로스 공화국 외무부장관 카술리디스는 미 대통령 오바마와 의회 의원들과의 접촉을 통해, 천연가스 문제는 키프로스 문제 사태와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점을 천명하고 또 자원 문제와 관련해서는 오히려 키프로스와 이스라엘과의 전략적인 문제가 개재되어있음을 강조했다.


※참고자료
Kathimerini, 2010.9.1 [http://kathimerini.gr]
Kathimerini, 2013.5.12 [http://kathimerini.gr]
Kathimerini, 2013.6.9 [http://kathimerini.gr]
키프로스관광청(http://www.visitcyprus.com/wps/por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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