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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지우마 바나 호세피(Dilma Vana Rousseff) 브라질 대통령

브라질 임두빈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지식정보실장 HK연구교수 2013/08/03

   2002년에 당선되어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대통령으로 기억되는 룰라는 8년에 걸친 집권기를 통해 경제성장, 빈곤층 감소, 일자리 증대, 국제적 위상강화 등 임기 말까지 지지율 80%를 기반으로 브라질의 ‘대국굴기’의 초석을 굳건히 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2010년 10월 대선을 통해 브라질의 ‘대국굴기’ 제2막을 지휘할 제36대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지우마 바나 호세피(Dilma Vana Rousseff) 대통령이 바로 그 주인공으로 브라질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전통적으로 남성우월주의 경향이 강한 브라질에서 정치적 입지가 대단하지 않으면서 이혼 경력까지 있는 여성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실은 가히 혁신적인 사건이었다. 이처럼 브라질은 지난 8년간 경제성장 외에 일부에 해당하지만 정치의 선진화라는 성과를 낳았다. 그 외에도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공식어로 사용하는 전 세계 총 8개 국가 중 최초로 여성대통령을 배출함에 따라 대통령을 지칭할 때 남성형인 'presidente'가 아닌 여성형  ‘presidenta'를 최초로 사용하게 되었다.

 

   호세피 대통령은 1947년 12월14일생으로 브라질 남동부 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is)주 주도인 벨로오리존찌(Belo Horizonte)에서 불가리아계 이민자 출신의 중상위층 가정의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군사독재정권(1964~1985년)시절, 당시 나이 16살부터 COLINA와 VAR-Palmares와 같은 반정부 무장투쟁조직에서 활동했고, 1970년에 당국에 체포돼 1972년 말까지 3년간의 수감생활을 통해 고문 등의 고초를 겪었다. 출감 후에 두 번째 전 남편이 수감 중이던 브라질 남부 히우그란데두술(Rio Grande do Sul)의 포르투알레그리(Porto Alegre)시로 터전을 옮겼다. 긴급조치 5호(Al-5)에 의해 미나스제라이스주 연방대학교(UFMG)에 복학하지 못하고 히오그란데두술연방대학(UFRGS) 경제학과를 다시 들어가서 1977년에 졸업했다. 집권 초기에 상파울루(São Paulo)주립대학인 우니깜삐(Unicamp)에서 경제학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동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이수중인 것으로 정부 홈페이지를 통해 알려졌지만 본인 역시 인정했듯이 두 과정 모두 수료는 했지만 학위는 받지 못했다.

  1980년에 포르투알레그리(Porto Alegre)시에서 민주노동당(PDT) 창당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1986년부터 2002년까지 시 재무국장과 주정부 에너지부 장관을 맡아 행정 관료의 틀을 잡았다. 2001년 노동자당(PT)으로 당적을 옮겨 2002년 대선에서 룰라 캠프에서 에너지 정책을 맡았고 룰라 당선 후 2003년에 연방정부 에너지장관에 임명됐다. 재직 당시 강력한 조직 장악력과 공격적인 업무스타일로 주변 동료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지만 광산과 에너지 분야에서 폭넓은 지식과 운영능력을 통해 행정 관료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관료가 아닌 정치인으로서 호세피가 대중 앞에 부각된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 룰라 대통령의 재선을 1년 앞두고 야당의원 매수사건이 터져 룰라 정부가 최대 위기에 빠졌던 시기였다. 룰라 대통령의 오른팔격인 주제 디리세우(José Dirceu) 정무장관이 사임하게 되면서 호세피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2006년에 룰라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차기 대선주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2007년에는 브라질 판 뉴딜 정책인 ‘경제성장촉진프로그램’(PAC)의 입안과 가동을 주관하며 룰라 대통령으로부터 ‘브라질 경제성장의 어머니’라는 칭송을 받으면서 차기대선 주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호세피 대통령의 이미지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는 행정 관료의 이미지가 훨씬 강했다. 그런 그도 본격적으로 대선에 진입하면서 이미지 변신을 꾀해 도수가 높은 안경 대신 렌즈를 착용했고 보톡스 시술까지 받아 부드러운 이미지를 갖추고 쉬운 어법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서는 노력을 기울였다. 대선 중간에 림프종으로 항암치료를 받는 와중에 가발을 벗어 흔드는 모습이 브라질 국민들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되기도 했다.

   2011년 1월1일부터 대통령 직무를 시작한 그는 점심도 집무실에서 해결하는 스타일이라고 알려졌다. 추진력이 강한 대통령의 일처리 스타일에 맞춰 관계 장관들 역시 도시락을 준비해 와 대통령의 호출이 오면 집무실에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우리 머릿속에 떠올리는 ‘남미 스타일’과는 동떨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통치 초기에 호세피 대통령이 얻은 별명이 ‘청소부’였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대부인 룰라 전 대통령과 그 측근이 연루된 의원 매수사건인 ‘멘살라웅(mensalão)사건’에 단호히 대처하면서 노동당이 저지른 부패 행위와 자신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2013년 6월부터 시내버스 요금인상안 반대로 촉발되어 광범위한 정치 및 사회개혁요구로 확장된 대규모 거리 시위 앞에서 현 정부의 수반으로서 국민의 요구에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에 처했다. 그러나 초기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시위가 과열되자 “정부 시책에 당당히 의견을 밝히는 우리 국민이 자랑스럽다”라는 담화를 밝혀 경찰 대응을 자제하고 정치개혁을 위한 국민투표를 제시하는 등 통 큰 포용력을 보여준 바 있다. 그 결과, 438개 도시에서 190만 명이 거리 시위에 나선 규모에 비해 사상자가 5명에 그쳤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다.
 
  2002년~2010년간 8년에 달하는 집권이 끝나는 시점까지 룰라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80% 이상에 육박했다. 이러한 사실은 2010년 말 룰라의 후계자를 표방하며 대선주자로 나섰던 호세피 후보에게 결정적인 도움으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또한 룰라로부터 정권을 이양 받은 호세피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큰 부담임에 틀림없다. 룰라 전 대통령의 영향력이 워낙 강해 향후 국정 운영에 있어 잘해도 룰라의 후광, 못하면 호세피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평가될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호세피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언론에 룰라의 재출마설이 등장했었고 룰라 전 대통령이 직접 출마설을 부인하고 현 대통령 지지를 공언했지만 당장 재선을 1년 6개월 남겨둔 지금까지 정치권 일부에서 룰라의 복귀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역사적으로 평가받는 브라질 대통령들의 업적은 보통 집권기 2년 반 정도를 지날 때 그 윤곽을 드러난다고 알려져 있다. 군사독재 정권 후 첫 민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퇴임 시 연간 인플레가 1,800%에 육박했던 주제 사르네이(1985-1990)의 업적은 ‘민주화의 정착’이었고, 그 뒤를 이은 페르난도 꼴로드(1990-1992)는 임기 중 부패사건으로 50만 명의 길거리 시위사태가 발생하고 탄핵을 당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기억되지만 ‘브라질 경제시장 개방’의 선구자로, 이따마르 프랑꾸(1992-1995)는 ‘헤알플랜’ 수립을, 페르난도 엥리께 까르도주(1995-2002)는 ‘민영화를 통한 경제 근대화’를,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2003-2010) 전 대통령은 ‘획기적인 사회정책으로 빈민구제를 통한 사회구조개혁’을 국정기조이자 주요 업적으로 평가받았다. 호세피 정부의 슬로건은 전 정권과의 연장선상에서 “빈곤이 없는 나라가 바로 잘 사는 나라”이다.


전 세계가 부러워할만한 성과를 거둔 전 정권이 처했던 기연에 비해 유럽경제 위기, 중국경제 둔화, 미국의 고이자 정책과 선진국들의 출구전략 등으로 신흥국들의 위기가 도래한 사정을 감안할 때 호세피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아직 시기상조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현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치가 하락한 것은 사실이다. 여론조사기관 Datafolha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3월까지 65%, 최근에 57%에 머물렀던 지지율이 30%로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에 전국을 휩쓴 대규모 시위뿐만 아니라 경제성장 둔화, 물가상승 등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지지율 하락이 호세피 정부 탓이라기보다는 브라질에 누적되어 온 고질적인 정치부패와 부실한 공공정책에 대한 불만이 과거에 비해 두터워진 중산층을 중심으로 표출되어 브라질 변혁의 시금석이 되는 과정으로 보는 긍정적인 시각 또한 공감을 얻고 있다. 어쨌든 현재 직면한 호세피 대통령의 최대 고민은 내년 6월에 개최될 월드컵 준비보다는 그 뒤를 이어 10월에 있을 재선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에 있다. 재선에 호재일 수 있는 월드컵 개최가 오히려 비수가 되어 목을 노리는 지금, 재선까지 남은 1년 6개월 동안 어떤 비방을 찾을 수 있을지 국내외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부록: 지우마 호세피 대통령의 측근
대선운동 당시 호세피 대통령의 최측근 멘토로 분류된 인물은 유년기 시절부터 친구였던 소니아 라세르다 마세두(Sônia Lacerda Macedo)이다. 그녀는 대선운동 당시 지우마의 지지자 블로그를 맡았던 인물로서 당선 이후에는 현 정부의 공직을 맡으면서 변함없이 대통령의 비공식적인 자문역할을 계속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두 번째 전 남편이자 외동딸의 친부인 까를로스 아라우주(Carlos Araújo)로서 호세피 대통령의 신뢰를 받는 소수 인물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호세피는 1969년 전국해방지휘본부(COLINA)가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로 본거지를 옮겼을 당시 변호사였던 두 번째 전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이 부부는 지난 2000년에 결국 헤어지게 되었지만 그들 사이에 태어난 외동딸 파울라 호세피(Paula Rousseff)에게 손자가 탄생하면서 비록 이혼한 사이이지만 전 남편과의 가족관계가 더 친밀해졌다고 한다. 호세피 대통령의 외동딸 파울라 호세피는 1976년 3월27일 생으로 법대를 나와 포르투알레그리 시청에서 노무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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