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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 대학살, 그 배경과 교훈

중동부유럽 일반 김철민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대학 교수 2013/08/28

지난 7월 9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Bosna i Hercegovina, 이후 ‘보스니아’로 축약) 수도인 사라예보(Sarajevo)에서 보스니아 내전 당시 스레브레니차(Srebrenica)와 인근에서 집단 학살당한 보스니아 무슬림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제가 거행되었다. 특히, 이번 추모제 중요 행사 중 하나로, 학살 당시 희생자 중 그 동안 신원 파악이 되지 못했던 희생자 409명을 위한 안장식이 세르비아 주재 미국 대사를 비롯해 유럽연합 고위 관계자 등 약 5만명이 참석한 가운데‘스레브레니차 집단 학살 기념 센터(Srebrenica-Potočari Memorial and Cemetery for the Victims of the 1995 Genocide)’에서 11일 거행되었다. 18주기 추모식을 겸해 열린 이날 안장식에는 내전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14세-18세 사이의 어린 소년들의 시신 44구와 여성 희생자 3구, 영아 1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2013년 8월 현재, 스레브레니차에서 북서쪽으로 약 6km 정도 떨어진 포토차리(Potočari)에 자리한 ‘스레브레니차 집단 학살 기념 센터’와 묘지에는 이번에 안장된 409구의 시신을 포함해 내전 당시 스레브레니차 지역 등 인근 지역에서 희생된 것으로 판단되는 6,066명의 희생자들이 안장되어 있다. 당시 세르비아 민병대는 희생자들을 집단 매장 후 사건 은폐를 위해 희생자들의 시신을 훼손해가며 여러 곳에 나눠 옮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국제 사회는 현재까지도 유해 발굴의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DNA 검사를 통한 희생자들의 신원 파악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실종자를 위한 보스니아 연방위원회(Bosnian Federal Commission for Missing Persons)’의 보고서에 따르자면, 1995년 7월 11일부터 13일 사이 스레브레니차 인근 지역에서 실종되고 희생된 수가 총 8,372명에 달하며, 이 명단에는 유아부터 청소년까지 약 500여명의 어린 아이들과 수십여 명의 부녀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스레브레니차에서 집단 대학살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1992년 3월부터 1995년 10월까지 총 3년 8개월간 이어진 보스니아 내전이 자리하고 있다. 2개의 문자(키릴, 라틴), 3개의 주요 종교(정교, 이슬람, 가톨릭), 6개의 공화국과 2개의 자치주 등 유럽내‘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인 사회주의 유고 연방을 이끌어왔던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 재임 1939-1980)가 1980년 5월 사망한 후, 연방 내 대표적 모자이크 지역이었던 보스니아는 민족 간, 종교 간 첨예한 갈등 선상에 자리하게 된다. 동유럽의 자유화와 개방이 확대되던 시점인 1989년 강력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던 밀로쉐비치(Slobodan Milošević, 1941-2006, 재임 1989-2000)가 권력을 잡게 되면서, 연방내 구성 공화국이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가시화 되었고, 1991년 마침내 유고 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보스니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던 크로아티아에서의 내전 발발과 세르비아 민병대의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는 보스니아내 보스니아 무슬림과 가톨릭 크로아티아계를 자극하였고, 이어 이들을 중심으로 1993년 3월 독립이 추진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독립 선언은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와의 갈등을 촉발시켰고, 곧 이어 서로 간의 장기간 내전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보스니아 내전이 이토록 장기화되고, 잔인한 민족 분쟁으로 이어진 배경에는 대내적 요인과 대외적 요인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대내적 요인으로는 보스니아의 종교와 문화 구성 자체가 동유럽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매우 복잡하고 서로 간의 영토적 경계가 불분명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제, 보스니아 민족은 각 종교에 따라 크게 보스니아 무슬림,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가톨릭의 크로아티아인 등으로 나눠지는 데, 과거 역사 속에서 이들은 혼란이 대두될 때마다 서로 간의 인종 청소 및 종교 개종을 강요해왔었다. 즉 과거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공포는 서로 간의 불신과 집단적 자위 의식을 낳았으며, 이러한 점이 바로 이 지역 내 내전이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간, 잔인하게 이어진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대외적 요인으로는 바로 내전 초기 국제 사회의 적절한 대응 전략의 부재, 그리고 내전과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UNPROFOR(UN Protection Force)의 무기력함을 들 수 있다. 내전 초기 국제 사회가 보스니아 내전 해결을 위해 제시한 대표적인 평화안인 ‘벤스-오웬안(Vance-Owen Plan)’은 1992년 9월 런던(London) 회담과 제네바(Geneva)회담에서 제시된 유럽측 평화안을 기초로 이루어졌다. 이 안에 따르자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보스니아 영토를 10개 구역으로 나누어 세 민족 집단들이 각자 3개씩 나누어 가지게 하고, 인종적, 종교적 혼합으로 그 구분이 어려운 ‘제 4지대(Fourth estate)’사람들을 위해 사라예보를 비롯한 인근 지역을 중립 지대(Buffer Zone)로 두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평화안 발표는 세 민족 간의 내전을 보다 격화시켰고, 종교, 문화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던 보스니아의 현실을 무시한 서유럽 국가들의 일방적 편의적 발상에서 비롯되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특히, 서유럽 각 국들은 내전의 장기화와 함께, 파견 병사 사망 및 전비 확대에 따른 여론 악화로 내전 개입에 소극적 자세를 보이게 된다. 이에 따라 UNPROFOR는 점차‘핑크 존(Pink Zone)’이라 불렸던 세르비아 민병대 관할지역에 대한 작전 수행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오히려 내전을 피해 이주한 난민들의 안전지대(Safe Zone) 관리와 보호조차도 어려운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보스니아 시민들에게 UN의 권위 실추와 평화 유지군의 무용론을 불러일으켰으며, 무엇보다도 국제 사회가 오히려 대량 학살과 난민 양산을 용인하고 있다는 인식 확산을 불러오게 하였다. 실제, 이러한 현실에 대해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총사령관이자 전범인 믈라디치(Ratko Mladić)를 비롯해 세르비아 민병대들이 UNPROFOR 군을 “UN Self PROFOR (UN 자기보호군)”라며 조롱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것은 UNPROFOR에 대한 보스니아 난민들의 급격한 신뢰 추락을 불러왔으며, 이후 내전의 확대와 장기화로 이어져, 결국 더욱 더 큰 대량 학살과 난민 문제 발생을 초래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하였다.

   그 결과 빚어진 대표적인 사건중 하나가 바로 네델란드 군이 관할하고 있던 안전지대에서 1995년 7월 보스니아 무슬림 8천여 명이 세르비아 민병대인 ‘드리나(Drina) 부대’에 의해 대량으로 학살된 ‘스레브레니차 비극’이다. 당시, UNPROFOR 소속으로 파견된 약 400명의 네델란드군 중 150여명의 병력이 약 4만 명의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집단 난민 지역이자 UN이 안전지역으로 설정한 스레브레니차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델란드군은 학살이 일어나기 직전 이미 30여명이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해 포로로 잡히는 등 난민들을 보호하고 안전지대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어 1995년 7월부터 세르비아 민병대의 본격적인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자, 스레브니차 주둔 네덜란드군 사령관이었던 톰 카레만스(Thom Karremans) 대령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UN군 소속 네덜란드 공군을 통해 공습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7월 11일 네덜란드군 소속 F-16기 두 대의 공습 이후, 추가 공습시 30명의 네덜란드군 포로들을 사살하겠다는 세르비아 측의 경고에 따라 이 공습 또한 중단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 네델란드 군의 방조와 UNPROFOR의 무기력함 속에 UN이 정한 안전지대 안에서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한 보스니아 무슬림 대량 학살이 자행되는 참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비공식적 통계에 따르자면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 당시 희생자 수는 25,000명-30,000명에 달한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이것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큰 집단 학살로 비난되고 있다. 이에 대한 처벌로 학살을 주도한 믈라디치와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 등은 인도주의에 반한 범죄 혐의로 기소돼 국제 유고전범재판소(ICTY)에서 재판을 받고 있으며, 학살과 관련해 기소된 자들은 모두 합쳐 50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상태다. 또한 그 동안 크로아티아에서의 부코바르(Vukovar) 학살(1991년 11월)등 내전 당시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해 저질러진 과거사들에 대한 사과를 표명해 왔던 세르비아의 타디치(Boris Tadić) 전 대통령은 물론, 세르비아 민족주의 성향이 다소 강한 니콜리치(Tomislav Nikolić) 현 대통령 또한 사과 표명을 거듭해 왔으나, 희생자 유족들의 반발과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보스니아는 물론 현 발칸반도에서의 영구적인 평화와 미래 발전을 위해선 우선, 내전 당사자들 간의 진정한 화해와 미래 협력을 위한 전폭적인 합의가 전제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역사를 통해 반추해 볼 때, 과거 내전 당시 저지른 인종 학살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와 지속적인 반성만이 오늘날까지도 고통이 가시지 않고 있는 내전의 희생자 및 그 유족들에게 아픔을 잊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게 하는 작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Herodotus, BC 484-BC 425)는 <역사> 편에서 “평화로운 시기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묻지만, 혼란의 시기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묻는다”라는 말로 전쟁과 내전의 아픔을 묘사하였다. 보스니아와 발칸반도에서 이러한 비극적 문구의 비장함을 더 이상 되새기지 않도록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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