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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후스주의 혁명

체코 김장수 관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2013/09/12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였던 후스(J.Hus)는 1414년 12월 6일 콘스탄츠(Contanz)에서 체포되었다. 이후부터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로부터 교회에 대한 이단적 입장을 철회하고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라는 일방적 요구를 받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1415년 7월 6일 후스는 화형장으로 가면서 그의 저서들이 소각되는 것을 보았다. 형장에 도착한 직후 후스는 팔츠(Pfalz) 백작 루트비히(Ludwig)로부터 기존의 이단적 입장을 철회할 경우 화형 역시 중단될 수 있다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는 ‘인정하지도 확인하지도 않는다(non convictus et non confessus)’라는 문구로 대응했다. 이에 따라 황제 대변인은 후스에 대한 화형집행을 명령했고 그것에 따라 장작더미에 불이 붙여졌다. 이때부터 후스는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불길이 그의 얼굴을 가릴 때 까지 계속되었다. 후스가 처형된 후 그의 골분은 라인(Rhien) 강에 뿌려졌는데 이것은 후스를 성인으로 간주하던 그의 추종자들에게 성유물의 어떠한 잔재도 남기지 않겠다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 같다.


후스의 처형은 체코인들의 강한 반발을 유발시켰고, 보헤미아 지방에서는 혁명적 징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체코인들은 보헤미아 지방을 이단 지방으로 규정한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이에 따라 1415년 9월 2일 452명에 달하는 귀족들이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한다는 결의문, 즉‘죄 없이 돌아가신 이웃을 회상한다’를 발표했고 후스의 가르침에 따라 보헤미아 지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끝까지 수호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그리고 결의문에서 귀족들은 3명의 대표를 선출한 후 이들로 하여금 보헤미아 종교문제를 감시하게 하고 보헤미아 지방에서 설교의 자유도 보장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또한 이들은 향후 제기될 로마 교황청의 파문에 공동으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했을 뿐만 아니라 프라하 대학이 종교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법원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견해도 피력했다. 이렇게 보헤미아 귀족들의 결의문이 발표된 이후 모라비아 지방 귀족들의 대다수도 결의문 이행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귀족 계층의 이러한 시도는 로마 교황청에 대한 공개적 도전내지는 봉기의 신호로서 프라하(Praha) 대학 교수들을 비롯한 사회 각 계층의 광범위한 지지도 점차적으로 받게 되었다.

이 당시 후스의 지지자들은 영성체 의식에서 빵과 포도주의 양종제도를 도입했다. 이후부터 포도주를 담는 성배(kalich;chalice)는 후스주의 운동의 상징으로 부각되었고 후스를 추종하던 후스주의자(husita; Hussite)들은 성배주의자(Kališnctví; Calixtinism) 또는 양종주의자(utrakvismus; Utraquism)라고 부르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됨에 따라 로마 교황청은 빵과 포도주의 양종을 불허한다는 교령을 1415년 7월 6일과 1418년 2월 28일 두 차례에 걸쳐 발표했다. 로마 교황청의 이러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1419년 초반부터 프라하의 대다수 교회들은 체코어로 성찬식과 예배를 진행했고 지방에서도 그러한 현상이 점차적으로 확인되었다. 1419년 초반부터 바츨라프 4세(Vaclav IV)는 양종주의를 추종하던 성직자들을 프라하에서 강제로 추방시켰고 로마교회의 성직자들로 하여금 설교를 담당하게 했다. 아울러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는 성직자들을 체포· 구금하는 강경책도 펼쳤다. 이에 따라 후스주의자들은 산악성지순례(pouty na hory)라는 방법을 활용했고 여기서 일부 성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기 때문에 과거와의 결별이 필요하다는 천년왕국설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1419년 7월 30일 얀 젤리프스키(Jan Želivský)가 주도하는 일련의 강경파 후스주의자들은 양종주의를 거부한 슈테판 교회를 공격했고 이어 프라하의 노베메스토(Nové Město)로 이동했다. 여기서 이들은 동료 후스주의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펼치다가 그것을 거절하는 시장과 판사를 창문 밖으로 던졌다. 이어 13명으로 구성된 시의회 배심원들 역시 창문 밖으로 내던졌는데 이들 중의 일부는 추락 후에도 살아남았지만 거리에 있던 시위대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는데 이것을 지칭하여 제1차 프라하 창문 밖 투척사건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후스주의 혁명(husitská revoluce)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충격적 사건을 접한 바츨라프 4세는 실신했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8월 16일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보헤미아 지방에서는 혁명적 상황에 대응하던 세력들이 일시에 붕괴되었고 이것은 후스주의자들로 하여금 교회들을 습격한 후 교회 재산을 강제로 약탈하는 등의 비이성적인 행동도 펼치게 했다. 이후 후스주의자들은 짧은 시간 내에 보헤미아 지방을 장악한 후 인접 지방들까지 자신들의 영향 하에 놓이게 했다.


후스주의자들은 1420년 프라하에 모여 4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른바‘프라하 4개 조항 프로그램’을 제시했는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율법 정신에 따른 교회 및 사회의 제도 개혁이 거론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성체식에서 신부 및 일반 신도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상징인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권리를 가지며, 둘째, 하느님 말씀에 대한 자유스러운 설교권을 가지며, 셋째, 교회 소유 재산을 강제로 몰수하고 세속 정치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을 배제시키며, 넷째, 성직자들이나 일반인들이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할 죄를 범할 경우 누구나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것이다. 후스주의 혁명가들은 이 개혁 프로그램을 보헤미아 지방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른 지역까지 확산시키려고 했지만 당시의 상황 하에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다.


비록 후스주의자들이 4개 조항 프로그램에 대해 의견적 일치를 보였지만 이들은 통합된 상태가 아니었다. 이 당시 후스주의자들은 일련의 귀족들과 프라하 대학 교수들이 이끄는 온건파, 대다수의 프라하 시민들과 보헤미아 지방 내에서 다수의 지지자들을 확보한 중도파, 그리고 원칙을 고집하던 급진파로 분리된 상태였다. 특히 급진파 중에서 동부 보헤미아파와 타보르파(Táboři; Taborites)가 유명했는데 이중에서 남부 및 남서부 보헤미아 지방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타보르파는 1420년 성서에서 차용한 타보르(Tabor)라는 이름의 도시를 건설하여 불완전한 인간의 법을 거부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형제와 자매들’의 공동체적 삶의 터전을 건설하려고 했다. 이들은 당시 제시된 천년왕국설에 따라 타보르를 예수님 왕국의 중심지로 만들고, 절대 평등과 무소유의 공동체적 낙원으로 건설하려고 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소유물 모두를 포기하고 기존의 가족관계를 단절한다면 1420년 2월 14일부터 시작될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지배를 받게 될 천년왕국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은 보헤미아 지방민들, 특히 하층민들의 관심을 유발시켰고 이것은 이들의 발길을 타보르로 향하게 했다. 이렇게 타보르파의 세력이 크게 확산됨에 따라 이 파의 일부 성직자들은‘불과 검’으로 기존세계의 잔재를 강제로 제거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후 타보르 내에서 엄격한 성직사회가 형성되었고 재산공유 및 종교적 관습의 근본적 개혁도 요구되었다.


이 당시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은 후스주의를 이단으로 간주했고 그것에 따른 십자군파병에 대해서도 동의했다. 십자군의 선두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헝가리 국왕이었던 지크문트(Zikmund Lucemburský)와 로마 교황청이 나란히 섰다. 1420년 지크문트는 자신이 바츨라프 4세의 동생임을 내세워 보헤미아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지만 후스주의자들은 그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그문트는 모라비아, 슐레지엔, 그리고 라우지츠(Lausitz) 지방에서 자신의 통치권을 인정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Martin V)와 지크문트는 1420년, 1421년, 1422년, 1427년, 그리고 1431년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했다. 1420년 7월 10일부터 프라하를 향해 진격한 10만 대군의 십자군은 대부분이 독일인들로 구성되었지만 프랑스, 이탈리아, 헝가리에서 온 지원병들도 있었고, 영국에서 건너온 용병들까지 포함했다. 그러나 이들은 7월 14일 프라하의 비트코프(Vřtkov) 언덕에서 당시 불세출의 영웅으로 부각된 외눈박이 얀 지슈카(Jan Žižka z Trocnova)의 후스주의 군에게 패배를 당했다. 이후 비후스주의파 성직자들과 독일계 도시귀족들은 프라하를 떠나게 되었고 이들의 저택과 재산은 후스주의 군에 의해 몰수되었다. 이렇게 십자군을 격파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지슈카는 1370년 체스카 부데요비체(Česka Budějovice) 근처의 트로크노프(Trocnov)에서 태어났다. 성년이 된 이후 이 인물은 용병으로 활동했고 그 과정에서 전투경험도 많이 하게 되었다. 지슈카는 자신을 추종하던 세력을 잘 훈련된 병력으로 변형시켰고 이것으로 인해 유럽의 국가들은 그와 그의 후스주의 군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1422년 지슈카의 후스주의 군은 동부 보헤미아의 니메츠키 브로드(Nĕmeckš Brod)에서 십자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 인물이 1424년 흐라데치 크라로베(Hradec Kralove)근처의 호레브(Horeb)에서 사망함에 따라 프로코프 홀리(Prokop Holý)와 프로코프 말리(Prokop Malý)가 후스주의 군을 통솔하게 되었다. 후스주의 군은 1427년 서부 보헤미아의 타호프(Tachov)와 스트지브로(Stříbro)에서, 1431년 국경 도시인 도마줄리체(Domažlice)에서 십자군을 물리쳤다. 나아가 이들은 보헤미아 지방을 벗어나 슐레지엔, 작센,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프랑켄(Franken),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여러 지방을 공략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후스주의 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됨에 따라 1433년 1월 지크문트는 프로코프 홀리와 포스투피체(Postupice) 남작의 후스주의 군과 바젤(Basel)에서 협상을 펼쳤지만 양측 간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특히, 교회재산 박탈 문제는 양측 간의 첨예한 대립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후스주의파 내부에서도 분열징후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지친 대다수의 온건파 후스주의자들이 협상 타결을 지향한 반면, 타보르파와 동부 보헤미아파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데서 확인되었다. 이후 양측은 무력 대결을 하게 되었고, 1434년 5월 30일 중부 보헤미아의 리파니(Lipany) 전투에서 보헤미아 지방 내 비후스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던 온건파가 승리했다. 이에 따라 타보르파와 동부 보헤미아파는 빵과 포도주의 양종제도 도입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436년 7월 5일 이흘라바(Jihlava)에서 바젤 종교 회의 대표들과 체코 후스주의파 대표들 간에 이흘라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후스주의자들은 부분적인 승리로 만족해야 했고 17년간의 전쟁도 막을 내렸다. 이흘라바 협약에서는 보헤미아 및 모라비아의 성인 남녀들이 후스주의 교회와 로마교회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후스주의 교회를 로마교회의 한 부분으로 인정한다는 것도 명시되었다. 그러나 후에 로마 교황이 협약승인을 거부함으로써 분쟁의 불씨는 계속 남게 되었다. 협약이 체결된 후, 지크문트는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했고, 그 대신 교회 재산의 몰수, 소 귀족과 도시 대표들의 보헤미아 의회 진출, 보헤미아 의회에서 교회의 대표성 배제 등에 동의했다.
이제 보헤미아 지방에서는 후스주의 교회와 로마교회라는 두 종교가 한 나라에서 공존하는 그 때까지 유럽 기독교 역사상 전대미문의 상황이 전개되었고, 세속정치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 배제되었으며, 의회에서 교회가 대표성을 상실하게 됨에 따라 대 귀족, 소 귀족, 그리고 도시 대표들이 보헤미아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고 그것은 보헤미아 왕국에서 귀족 정치의 등장도 예견하게 했다. 또한 후스주의는 도시의 급격한 위상증대를 가져왔고, 또한 도시의 민족적 구성에도 변화를 끼쳤다. 프라하, 자테츠(Zatec), 쿠트나 호라(Kutná Hora) 등 후스주의자들이 장악한 도시에서는 후스주의 전쟁 초기부터 독일계 시민들이 도시를 떠나기 시작하여 이들 도시들의 보헤미아화는 급속히 진행되었다. 특히 1436년에 체결된 바젤협약에 따라 귀족들과 도시민들은 로마교회에 대한 재산 몰수권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이들의 경제적 위상을 크게 증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후스주의 전쟁에 가장 커다란 공헌을 한 농민들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자신들의 농토를 다시 개간해야 하는 부담만 진 채 더욱 농토에 예속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후스주의 혁명은 교회의 위상을 퇴조시키고 귀족 계층과 도시 계층을 부상시키면서 중세 봉건사회의 몰락을 재촉했고 그것은 새로운 사회의 도래도 예고했다. 그리고 이 혁명을 통해 자유에 대한 불굴의 신념도 부각되었다. 또한 사상 및 믿음의 자유에 대한 신념은 후스주의 혁명이 유럽 정신사에 남긴 불멸의 유산이 되었다. 비록 후스가 자신의 종교개혁에서 강조한 ‘하느님의 말씀은 성서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다’라는 성서지상주의를 실천시키지 못했지만 그의 이러한 관점을 추종한 루터(Luther)와 칼뱅(Calvin)에 의해 종교개혁은 완결되었다.

 

 1) 콘스탄츠 공의회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바츨라프 4세의 동생이었던 지크문트(Zikmund Lucem- burský:1411-1437)의 제안에 따라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요한 23세(John XXIII: 1410-1415)가 소집했는데 여기에는 300여 명의 주교, 100 여 명의 대수도원장, 다수의 고위 성직자들, 신학자들, 교회법학자들, 그리고 세속 통치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공의회 참석자들은 당시의 대분열(동·서 교회의 분열:1378-1417)을 종식시키고 이단을 추방시켜 교회개혁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 이 당시 교회는 로마계 그레고리오 12세(Gregory XII: 1406-1415), 아비뇽(Avignon)계 베네딕토 13세(Benedict XIII:1394-1417)와 공의회파 요한 23세의 3파로 분리되어, 각기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이른바 교황정립시대를 맞아 교회 사상 최대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에 교회의 일치를 최대의 목표로 설정한 공의회는 우여곡절 끝에 ‘공의회가 분열된 전 교회를 대표하며, 그 권능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부여받은 것’임을 선언하고 베네딕토 13세를 폐위시키고, 그레고리오 12세를 설득하여 자진 퇴위케 했다. 그리고 후임으로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함으로써 유럽 교회의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난국을 극복했다. 이 공의회는 또한 회의 자체가 공의회 지상주의를 채택한 특징을 가졌다. 중세 말기에 등장한 이 주의는 분열 등으로 인해 야기된 교황권 실추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이 공회의가 당시 최대 현안문제로 부각된 분열수습에 성공함으로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2) 후스는 로마 교회에서 믿고 있던 성찬식에서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빵과 포도주는 변하지 않는다는 잔류자기이론(Remanenztheorie)를 제시했는데 이것은 후스가 영국의 종교개혁가 위클리프(J.Wycliffe)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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