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영역 건너뛰기
지역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오피니언

발칸반도 평화 정착의 초석, 마케도니아 위기 진단

세르비아 / 크로아티아 / 중동부유럽 기타 김철민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대학 교수 2013/09/22

 올해 초 3월 2일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프예(Skopje)에서 마케도니아계와 알바니아계 두 민족 간의 충돌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경찰 13명을 포함해 최소한 22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날 시위의 배경은 시위 발생 2주일 전, 마케도니아 정부가 알바니아계를 설득하기 위해, 지난 마케도니아 내전에서 알바니아 반군을 이끈 주요 인물 중 하나로 지목되어 왔던 탈라트 자페리(Talat Xhaferi)를 국방장관에 임명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케도니아계 주민들은 2001년 발생한 알바니아계 소수 민족과의 내전과 이를 종결 시킨‘오흐리드 협정(Ohrid Agreement, 2001년 7월 5일)’이후 오랫동안 자국 내에서 알바니아계의 권리가 무분별하게 증진되고 그 목소리 또한 계속해서 신장되는 것에 대해 일련의 위기의식과 함께 반감을 지녀왔던 게 사실이다. 이러한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한데 집약된 것이 바로 이번 마케도니아계의 반(反)정부 및 반(反)알바니아 시위라 할 수 있다. 이웃인 코소보 등 과거 발칸지역들에서 발생한 민족 간의 충돌이 그러했듯이, 주민족인 마케도니아계 주민들의 시위 확대는 곧 바로 소수 민족인 알바니아계의 반발과 시위로 확대되었다.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마케도니아계 시위자들이 2명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집단 구타하였으며, 알바니아 국기 및 상징물들을 불태웠다고 주장하였고, 이것은 곧 이어 폭력 시위로 발전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 시위에 따라 마케도니아 정부 경찰차들을 비롯해 상당수의 차량들이 파괴되었고, 버스정류장 등 공공시설들이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오늘날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 정치, 사회적으로도 큰 위기를 겪고 있는 마케도니아는, 실질적으론 미국과 서방의 지원 및 관심이 없이는 국가 존립 자체가 매우 위태로운 여러 국가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마케도니아는 독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독자적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도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실제, 오늘날 마케도니아를 둘러싼 위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첫째는‘대내적인 어려움’으로 위에서 언급하고 있듯 알바니아 소수 민족과의 민족 갈등과 빈번한 충돌을 들 수 있으며, 또 다른 하나로는 지난 2012년 12월 새해 예산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일어난 여당 야당 지지자들 간 투석전 및 올해 9월 간첩단 사건에 대한 야당의 강력 반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정치권내 갈등 심화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을 들 수 있다. 둘째로는‘대외적인 어려움’으로 마케도니아란 국호 명칭을 둘러싼 논쟁, 고대 알렉산더 대왕의 여러 상징물 사용과 국기 채택, 역사적인 영토적 범위를 둘러싼 논쟁 등 마케도니아 민족 정체성을 둘러싼 그리스 등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발칸반도의 역사를 고려해 볼 때, 마케도니아 현실에 있어 이 두 가지 어려움은 실질적으론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그리스와의 갈등으로 인해 야기된 대외적인 문제는 대내적으로도 마케도니아 정부의 소수 민족을 향한 포용 정책에 일련의 경직성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오랜 동안 이어진 마케도니아에 대한 국제 사회의 독립 국가 인정 논쟁 및 민족 정체성을 둘러싼 불안정성은 마케도니아 정부로 하여금, 자국내 알바니아 소수민족이 내걸고 있던 자치권 요구 및 더 나아가 독립 국가 요구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게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불안정성이 증폭되는 와중에 발칸반도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공화국들의 이탈을 막으려는 세르비아와 한편 독립해 나가려는 공화국들 간의 유고 내전(1991년 9월-1995년 10월)과 보스니아 내전(1992년 3월-1995년 10월)이 발생해 발칸반도의 위기감이 한층 더 고조되고 있었다. 따라서 국제사회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의 민족 간 충돌의 여파가 마케도니아 등 다른 지역들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며 이 사태를 주시해 왔었다.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1991년 3월 마케도니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직후부터 계속해서 알바니아계가 다수 거주하고 있는 서부 마케도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자치권 및 독립을 요구해 왔었다. 독립 마케도니아를 이끌며 처음 대통령에 오른 키로 글리고로프(Kiro Gligorov, 1917-2012, 재임 1991-1999)는 국제 사회의 도움 없이는 자체적인 국가 존립이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와 함께 전체 약 200만명의 인구 중 25%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알바니아계의 존재를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발칸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알바니아계와의 평화로운 공존이 필요하다는 국제 사회의 요구를 뿌리치기가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취임 초기 알바니아계와의 공존을 위해 부수상을 비롯한 2개의 장관직에 알바니아계를 임명했다. 하지만, 1992년 1월 알바니아계는 이에 만족하지 않은 채 자체 투표를 통해 서부 마케도니아 자치국가 수립을 선포하게 된다. 이어, 1993년 11월 마케도니아 정부 전복을 목표로 하는‘일리리다(Ilirida) 자치국’건설을 위한‘알바니아 무장조직(AAA: All Albanian Army)’ 결성이 발각되었고, 1995년에는 알바니아 비밀단체에 의한 키로 글리고로프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하는 등 갈등과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1998년 이후로 확대되던 코소보내 민족 갈등이 NATO와 세르비아 간의 전쟁(1999년 3월 23일- 6월 10일)으로 이어지고 이웃하고 있던 코소보로부터 대규모 알바니아 난민 진입이 시도되자, 마케도니아 정부와 마케도니아계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2000년에 들어와선 코소보로부터 마케도니아 알바니아계에 대한 무기 유입이 확대되면서, 이어 2001년 3월 초 테토보(Tetovo)를 수도로 정한 알바니아 민족 해방군(NLA: the National Liberation Army)들에 의해 마케도니아 내전이 발생하게 된다. 당시 마케도니아 정부군은 알바니아 해방군에 비해 무기와 군사 조직 면에서 매우 열악하고 자체 진압 능력이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국제 사회는 내전으로 인해 마케도니아가 무너질 경우, 전략적인 요충지인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과거 제 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 불리는 제 1, 2차 발칸전쟁(1912, 1913) 때처럼 전쟁이 발칸유럽 전체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였으며, 따라서 이것은 미국과 NATO 및 러시아의 신속한 군사적 참여로 이어졌다. 그 결과 2001년 7월 5일 양측은 마침내 ‘서부 마케도니아에 대한 자치권 논의와 알바니아 반군의 무장해제’라는 국제 사회의 중재안인 ‘오흐리드 합의안(Ohrid Agreement)’을 받아들임으로써 내전이 종식되게 된다.

 실제, 오늘날 국제 사회는 마케도니아의 문제를 둘러싸고 발칸반도의 영구적인 평화 정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바로미터 혹은 그 시험대로 인정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인식은 과거 역사를 되짚어 볼 때 마케도니아가 항상 발칸유럽 분쟁의 주요 핵심지역이었고, 전략적 요충지인 이 지역을 둘러싼 치열한 영토 전쟁이 곧 바로 유럽 열강들의 군사적 개입을 불러옴으로써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된데 서 비롯된 우려라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국제 사회는 마케도니아내에서 민족 간 갈등이 고조되고 이로 인한 내전이 장기전으로 이어질 경우 이것은 곧 바로 마케도니아 국가 존립의 위기를 불러올 것이고, 더 나아가 오랜 동안 이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여 왔던 발칸 유럽내 주변 국가들의 군사적 야심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는 점에서 마케도니아 위기 문제는 매우 큰 관심들 중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 하겠다.

 그리스의 반대와 여러 외교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흑해를 통한 러시아의 팽창 전략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현재 발칸 반도의 정 중앙에 자리하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마케도니아를 친(親)미 전략 국가로 설정해 놓은 듯 보인다. 실제, 미국은 냉전 시절이 걷힌 이후로, 오랜 동안 유럽과 러시아의 영향력 하에 나뉘어져 있었던 발칸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대규모 경제 지원과 미군 주둔을 위한 군사 시설 확보, 전폭적인 외교 지원 등을 통해 이곳 마케도니아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계속해서 추진해 왔다. 하지만 미국의 이러한 전략은, 과거 역사 속에서 보이듯 자국의 이해득실에 따라 마케도니아가 이용되고 버려지는 역사적 악순환의 반복 과정에 불과할 것이라는 자조 섞인 비판을 함께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실제, 근대 이후로 마케도니아 지역은 계속해서 러시아를 비롯해 서구 열강들의 첨예한 이해 접합 점에 위치하여 왔고, 따라서 강대국들의 지속적인 개입과 간섭으로 인해 마케도니아 문제를 둘러싼 진정한 해결책들이 제시되지 못하여 왔었다. 이와 함께 강대국들은 매번 자신들의 전략적 이익에 따라 마케도니아가 주변의 어느 국가나 민족에게 완전히 편입되는 것을 방해하여 왔으며, 그 결과 제 1, 2차 발칸전쟁과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강대국들의 역학구도에 따른 영토, 민족적 분열과 합병이 쉼 없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마케도니아는 EU 후보국으로써 EU 가입을 국가의 최우선 정책 목표로 설정해 놓고 있다. 이를 위해, EU에서 요구하는 여러 경제 정책 및 사회 정책 등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런 와중에 여러 어려움 및 사회적 마찰에 부딪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13년 올해 7월 EU 가입을 힘겹게 성공한 크로아티아의 경우처럼, 아니면 EU 가입을 강력히 부르짖고 있지만 그 가능성이 멀어 보이는 세르비아의 경우처럼, 마케도니아가 대내적인 민족 갈등의 골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실천 의지와 가능성을 국제 사회에 보여주지 못한다면 마케도니아의 EU 가입은 요원한 과제로 남게 될 것이다. 마케도니아 정부의 EU 가입에 대한 애착과 선전이 현재 여러 대내외적인 갈등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국민들에게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해주는데 그칠지, 혹은 그 장애물을 이겨내고 진정한 희망을 안겨주게 될 지는 마케도니아계와 알바니아계간의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할지에 대한 물음표에 달려있다 하겠다.

본 페이지에 등재된 자료는 운영기관(KIEP)EMERiCs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