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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마티체 체스카(Matice Česká; 1831)의 결성과 지향목표

체코 김장수 관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2013/11/07

일반적으로 민족 역시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이것은 다른 집단들과는 달리 그 자신만의 독특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것의 규모는 매우 광범위하며, 수백만 명 이상의 성원을 중심으로 계층․, 직종, 그리고 다양한 지방적 하부문화까지 포함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상이한 종파가 확인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언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생각하고,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을 외국인이라 간주하는 민족은 그러한 유대감을 유발시키는 과거 또는 현재에 무엇인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민족은 다른 민족과 그들을 뚜렷이 구별하려는 의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異) 민족의 지배를 혐오하며 그들의 주권국가를 요구하는 성향도 부각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것이 근대정치발전에서 중요한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말부터 민족주의(Nationalismus)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오스트리아 제국은 점차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제국에서 민족 운동이 크게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제국 내 비독일계 민족의 선각자들은 민족 운동을 통해 그들 민족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직시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독일 민족과 그들 민족 간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재정립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고 그러한 관점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던 빈(Wien) 정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여러 민족이 혼거한 지방에서 전개된 민족 운동은 제국을 와해시킬 정도로 격렬했는데, 그 중에서도 독일 민족과 체코 민족이 혼거한 보헤미아 지방에서 진행된 민족 운동과 그러한 과정에서  부각된 문제점들은 다른 지방에 비해 매우 심각했다.
 
이 당시 체코 민족이 전개한 민족 운동은 제국 내 비독일계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초기, 중기, 그리고 말기 단계를 거쳤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초기 단계: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40-1780)에 이어 오스트리아 위정자로 등장한 요제프 2세(Joseph II:1765-1790) 시기부터 체코의 민족 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이 시기부터 제국의 독일화 정책이 보다 구체적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보이그트(N.Voigt), 펠츨(F.M.Pelcl), 도브네르(G. Dobner), 그리고 도브로브스키(J.Doborowsky) 등이 이 시기의 민족 운동을 주도했는데 체코 민족의 언어, 역사, 그리고 문화가 이들의 연구 및 관심대상이었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헤르더(J.G.Herder)에서 비롯된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당시 헤르더는 루소(J.Rousseau)의 영향을 받아 독일 민족의 독자성을 강조했고 거기서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중시하는 이론도 정립했다. 헤르더는 문명이라는 것이 인류 및 개인보다는 민족이라는 집단에 의해 형성되고 창조력 역시 그러한 집단 내에서 발휘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렇게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민족의 선각자들은 그들 민족의 과거를 올바르게 재조명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을 근거로 그들 민족이 처한 상황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선각자들은 그들 민족에게 민족 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의 학문적 순수성과 부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여건, 즉 메테르니히(Metternich) 체제(1815-1848)하에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중의 일부는 이러한 학문적 관심에서 벗어나 민족적 감정 내지는 자긍심을 그들 민족에게 부여하려는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2)중기 단계: 중기 단계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에 태어난 인물들이 주도했는데 팔라츠키(F. Palacký), 샤파르지크(P.J.Šafarík), 그리고 하브리체크-보로프스키(K. Havlíček-Borovský)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라 하겠다. 독일 대학에서 수학한 이들은 낭만주의와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고 거기서 민족적인 자긍심을 그들 민족에게 부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이후부터 이들은 왜곡된 체코 민족의 과거를 재 기술하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그것은 체코 민족의 원초적 감정을 자극시켜 민족적 연대감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민족 운동이 그들만의 관심이 아닌 민족 전체의 관심으로 승화될 수 있게끔 노력했고 그것을 실천시키기 위한 조직결성, 즉 민족운동이 저변으로 확산되는데 기여할 수 있는 독서협회결성에도 열의를 보였다. 이에 따라 ‘보헤미아 국립박물관(1826)’과 ‘마티체 체스카(Matice Česká; 체코의 어머니, 1831)’라는 독서협회가 결성되었다.

3)말기 단계: 중기 단계에 결성된 ‘보헤미아 국립박물관’과 ‘마티체 체스카’의 활동이 이 단계에서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게 되는데 이것은 민족 운동이 민족 성원 모두의 관심 및 실천 대상으로 부각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체코 민족운동의 중기 단계에 결성된 마티체 체스카는 1831년 1월 1일 ‘보헤미아 박물관지’의 부속기구로 출발했다. 출범한 직후 팔라츠키는 이 독서협회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이 협회 창설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프레슬(J. S. Precl)은 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 팔라츠키 이외에도 사파르지크, 하브리체크-보로프스키 등의 저명한 체코 인사들도 이 독서협회에 참여했는데 그것은 이 협회가 당시 체코 지식인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지향노선을 예측․가능하게 했다. 마티체 체스카의 임원진과 이 독서협회 활동에 깊이 관여한 인물들은 체코 민족이 처한 상황과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 즉 체코 민족의 자치권 쟁취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 당시 메테르니히는 비독일계 민족들이 그들 민족의 특성, 즉 인종적, 문화적, 그리고 언어적 특성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독일 민족의 선진적 제 특성을 수용하여‘사회적 일체감’을 조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기본적 관점을 실천시키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펼쳤지만 팔라츠키를 비롯한 마티체 체스카의 핵심인물들은 메테르니히의 그러한 정책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즉각적인 중단도 요구했다.

마티체 체스카는 자신들의 활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접어들면서부터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비교적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뎨디츠트비 스바토얀스케(Dědictví svatojánské; 성 요한의 유언)’라는 종교문학지와 차별화를 모색했는데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독일화 및 중앙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이 종교문학지가 비독일계 민족의 관심사에 대해 등한시하는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1) 또한 마티체 체스카는 민족 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문학 작품 및 역사서 출간에 주력했다. 그리고 이러한 출간에 필요한 재정적 부담은 민족 운동에 관심을 보인 기부자들에게 전가시켰는데 그것은 이 독서협회가 독자적으로 문학 작품 및 역사서를 출간할 만큼의 재정적 여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티체 체스카의 이러한 시도에 재정적 지원을 한 인물들은 정기적으로‘보헤미아 박물관지’에 게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직업과 사회적 지위 등이 자세히 언급되었다.
 
‘보헤미아 박물관지’에 게재된 마티체 체스카에 대한 재정지원자 들의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분석한 결과 귀족 및 성직자 계층, 즉 구질서 체제의 특권 계층들이 민족 운동의 초반부를 주도했지만 점차적으로 시민 계층과 대학생 들이 이들을 대신하여 민족 운동을 이끌어 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당시 대학생들 모두가 민족 운동에 대해 관심을 표명한 것은 아니었다. 신학이나 철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민족 운동에 대해 관심을 보인 반면 의학이나 법학을 공부한 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즉 민족 운동에 대한 관심도는 전공학과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대학생들의 참여가 증가된 이유로는 첫째, 이들이 민족 개념을 빨리 정립할 수 있었다는 것. 둘째, 이들이 민족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마티체 체스카에 대한 귀족 계층의 지지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감소한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2) 성직자 계층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3). 이렇게 귀족 계층의 참여가 급속히 줄어든 이유로는 마티체 체스카가 초기에 표방한 보헤미아 주의를 견지하지 않고 점차적으로 체코적 요소를 부각시킨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 계층의 기부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신교와 구교간의 대립, 즉 종교적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신교를 신봉한 보헤미아의 성직자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구교와 신교의 평등화가 불가능하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성직자들은 민족 운동에서 부각된 자치권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생각했던 자치권은 지역적인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보헤미아 지방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일부 선각자들의 주장과의 타협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전체 기부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미미하지만 농민 및 노동자 계층이 184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민족 운동에 대해 관심을 표방하고, 동참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체코의 민족 운동이 서서히 중기단계를 벗어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라 하겠다. 아울러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기부자의 수가 1839년부터 1841년까지 급격히 감소된 것인데 그것은 메테르니히 체제 말기에 진행된 강도 높은 반동적 민족정책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의 경제적 침체 현상 역시 기부자 수를 급격히 감소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비록 마티체 체스카에 대한 재정지원자들의 명단을 통해 당시 어떠한 계층이 민족 운동에 대해 관심을 표방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여기에는 다음의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들도 들어 있었다.

첫째, 마티체 체스카 기부자들 모두가 민족 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스트리아 제국, 특히 보헤미아 지방의 사회적 분위기를 파악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당시 상류 계층의 인물들은 주변을 의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한 것은 마티체 체스카의 재정적 부담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즉 민족 운동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도 주변을 의식하여 기부금을 냈고 이들 중의 일부는 저명한 민족주의자들과 더불어 민족의 선각자 내지는 추앙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둘째, 기부자들의 사회적 성분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마티체 체스카에 대한 기부금은 1 년 단위로 모금되었고 그것의 최저 하한선은 50 프로린(Florin)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일반인들이 50 프로린을 일시불로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는데 이것은 이들의 연 수입이 20 프로린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금액을 일시적으로 납부하는 계층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기부자들은 당시 허용되었던 분납제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일시에 완납한 기부자들은 ‘보헤미아 박물관지’에 단 1회 기재된 반면, 분납을 선택한 기부자들은 완납할 때까지 그들의 이름이 실리는 모순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마티체 체스카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이 단체는 체코 민족의 장래를 거론하는 적극성도 보이기 시작했다. 즉 이 독서협회를 주도한 인물들은 그들 민족이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자치권(samospráva)을 획득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이것은 3월혁명(1848)이후 체코 정치가들이 제시한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와도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그러한 자치권을 획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당시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체코 민족주의자들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표방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지향한 완전 독립과 정면으로 대치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코수트(L. Kossuth)는 당시 헝가리 민족주의지로 간주되던 ‘페슈트 히르럽(Pest Hirlap)’에서 체코 민족주의자들의 구상을 강력히 비난했다.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마티체 체스카의 활동과 유사한 활동들이 펼쳐졌는데  거기서는 강대국들의 도움보다는 가능한 한 빨리 민족적 역량을 증대시켜 국권회복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애국계몽단체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들 단체들은 점차적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는 주체적인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1) 여기서 지식인 계층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라는 문제점이 부각되는데 이것에 대한 정의는 학자들 간의 차이점으로 인해 쉽게 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간의 주장에서 공통분모가  확인되는데 이것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블라하(A.Blaha)는 대학 수준 이상의 학력을 갖춘 사람들을 지식인 계층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고, 체코의 역사가 흐로흐(M.Hroch) 역시 그러한 관점에 대해 동의했다. 나아가 흐로흐는 지식인 계층을 구질서체제와 연계된 계층(귀족 및 고위관료), 자유업 종사자 및 소시민 계층(의사,법률가,예술가,학자,언론가,상인,수공업자), 그리고 하위 관료계층, 교사, 대학생으로 세분화시켰고 이 과정에서 지식인 계층을 주도하는 세력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진다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즉 그는 민족 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구질서 체제와 연계된 계층을 대신하여 구질서 체제와 전혀 무관한 새로운 계층들, 즉 산업 혁명과 그것에 따른 자본주의체제의 활성화 과정에서 생성된 계층들이 민족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최근 들어 볼렌베크(G. Bollenbeck)은 지식인 계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기도 했는데 그에 따를 경우 지식인 계층의 대다수가 민족의식(naáodní uvědoměn)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의식은 소수 민족내지는 피지배 민족의 지식인 계층에서 더욱 부각되는데 그러한 것은 이들이 제기한 ‘기존질서 체제에 대한 의문제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1831년의 귀족 계층의 참여율은 13.5%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율은 시간이 지날수록 축소되었고 1847년에 이르러서는 불과 1.5%에 불과했다.    
3) 1847년의 성직자 계층의 참여율은 28%이었는데 그것은 1831년의 참여율보다 17% 정도 감소된 비율이었다. 이러한 감소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계층은 마티체 체스카 후원회에서 우위를 주장할 수 있었지만 다음 해인 1848년, 즉 3월혁명 이후 그들의 우위권을 대학생들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다. 이후부터 이들의 참여율은 급격히 감소되었다.  
4) 일반적으로 기존의 질서체제와 대립하는 정치적 목표들이 구체적으로 설정될 경우 성직자들은 민족 운동에서 이탈하게 되는데 그러한 현상은 보헤미아 지방을 비롯한  동․중부 유럽에서 쉽게 확인되었다.    
5) 체코 노동자들이 민족 운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보헤미아 지방의 산업화로 그들의 경제적 여건이 다소나마 호전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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