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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제2의 석유이권 쟁탈이 가시화되고 있는 리비아

리비아 홍성민 중동경제연구소 소장 2013/11/14

혼란 지속되는 리비아


리비아에 새 정부가 수립된 지 만 2년의 세월이 흘렀다. 2011년 10월 23일 카다피 정권이 붕괴되고 국가과도위원회(NTC)가 출범할 당시만 해도 ‘아랍의 봄’과 중동의 민주화 열풍은 큰 탄력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해방이후 리비아에서는 아직도 유혈충돌은 계속 되고 있으며, 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며 혼미한 정국은 계속되고 있다.

아랍의 봄이 중동을 휩쓸던 당시만 하더라도 카다피 정권의 붕괴를 예측한 분석가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69년 혁명이후, 카다피는 42년간 리비아를 철권통치하며 54개국 아프리카연합(AU)의 맹주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정부시위 8개월 만에 카다피는 무참히 살해됐고 철옹성의 카다피 정권도 최후를 맞이했다.

 

마치 2003년의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의 몰락을 다시 보는 듯하다.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리비아에서는 아직도 유혈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유혈충돌이 계속되던 가운데 카다피를 체포했다고 알려진 ‘샤아반’이라는 청년이 지난해 7월 카다피 추종세력에게 붙잡혀 무참히 살해되기도 했다. 그는 2011년 10월 20일 리비아 시르테의 하수구에 숨어 있던 카다피를 붙잡은 장면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2012년 11월에는 무장단체가 미대사관을 공습하여 리비아 주재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대사 등 미국인 4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리비아에서는 반미시위가 불붙기도 했다. 최근 11월에도 수도 트리폴리에서 경쟁관계인 두 무장단체가 총격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1명이 숨지고 최소 12명이 다쳤다. 

 

민병대간의 유혈충돌은 리비아의 치안부재와 불안정한 정국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비록 리비아가 공식적으로 해방된 지 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같은 일련의 유혈충돌과 무장세력 간 권력다툼은 아직도 리비아의 안정이 멀었다는 신호로 풀이된다. 알리 제이단 리비아 총리가 지난 10월 트리폴리의 한 호텔에서 무장단체에 억류됐다가 풀려난 사건은 리비아의 혼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와중에 리비아에서 자치권을 요구하는 동부지역 부족들이 몇몇 원유수출 항구를 장악하고 지난 11월 10일 독자적인 원유판매회사 설립을 발표했다. 그들은 권력을 공유하는 연방정부 설립을 요구하고 있으며, 석유회사 설립으로 리비아 석유의 재장악을 모색하고 있는 알리 제이단 총리의 과도정부에 도전하고 있다.

 

리비아 안정의 열쇠는 독특한 사회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리비아는 140여개 가문(家門)과 500여개 부족(部族)으로 이뤄진 복잡한 인종적, 문화적 집합체이다. 여기에 내부적으로는 아랍인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베르베르족과의 인종갈등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리비아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각 분파와 인종을 포용할 수 있는 국가적 가치(價値)가 필요하고 각 부족 간의 경제적 이권분할이 효율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 중심에 ‘석유자원’이 있다.

 

카다피가 42년 동안 철권통치를 할 수 있었던 배경도 ‘강력한 부족연대와 효율적인 석유자원 분배’에 있었다. 이러한 점이 과거 사담 후세인 정권의 몰락과 카다피 정권의 몰락을 같은 배경에서 볼 수 있는 요인이 된다. 반정부시위가 촉발되자마자 미국을 위시한 유럽 국가들이 리비아사태에 즉각적으로 개입한 동기도 이점에서 찾아야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리비아의 안정은 석유자원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타날 때 찾아올 것이다.

 

리비아 안정, 이라크에서 해법 찾아야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임박하던 시기,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3년 내에 이라크가 안정되고 민주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리비아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수출이 정상화 되는데 1년 정도, 내전 이전수준으로 석유생산을 재개하는 데는 2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측하였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아직 정정은 불안하고 유혈사태가 지속되고 있다.

리비아 안정화의 해법을 이라크 사태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한다는 논지가 다소 무리가 있기는 하지만, 두 나라 모두 유사한 사회구조와 에너지자원을 갖고 있기에 비교가 가능하다. 물론 두 나라가 이슬람을 가치규범으로 채택하고 있지만, 국가의 가치기준(價値基準)을 논외로 하면 사회구조는 매우 유사한 측면을 갖고 있다.

 

이라크는 150개의 부족으로 이뤄진 부족사회로 이슬람 순니파와 시아파로 분화돼있으며, 여기에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이 있다. 리비아 역시 500여 부족집단과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베르베르족과의 갈등을 갖고 있다. 사담 후세인에 있어서 원유는 ‘정권의 젖줄’이었고, 그로부터 파생한 오일달러는 통치의 핵심이었다.

 

카다피 역시 같은 맥락에서 원유가 정권의 젖줄이었다.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이라크에 쿠르드문제가 있다면, 리비아에는 베르베르문제가 있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리비아의 안정도 리비아의 석유에서 찾아야 한다.

 

이란-이라크전쟁 직후 미국은 이라크 전후복구 사업의 선결조건으로 이라크의 대외채무 해결을 요구했고, 그 방법으로 국영석유산업의 민영화를 제시했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은 정권의 돈줄인 석유주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미국이 걸프만에 개입하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걸프전으로 이어졌다. 그 후 미국과 유엔의 경제제재조치가 이어졌고 드디어 핵무기개발이 구실이 되었다. 대량살상무기 제거와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2003년 이라크전쟁이 발발하였고 사담 후세인이 제거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법이 다르긴 하지만, 미국의 경제제재조치를 받아오던 리비아는 서둘러 2003년 12월 대량살상무기(WMD) 포기선언을 하긴 했지만, 2011년 ‘아랍의 봄’ 와중에 발발한 반정부 시위에 NATO군이 반군을 즉각 지원함으로써 정권의 붕괴를 도왔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두 국가 모두 막대한 통치자금이 석유자원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이다. 460억 배럴의 원유가 매장된 세계 8위의 리비아 원유의 85%가 유럽에 수출돼왔다는 점 또한 이를 반증하고 있다.

 

최근 발생한 동부지역 부족들의 원유수출항 장악과 독자적인 원유판매회사 설립발표는 “리비아 안정에 석유자원이 깊이 관여돼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동부 자치정부의 총리를 자처한 압드-라보 알-바라시는 전국에 중계된 TV 생방송을 통해 석유회사 설립을 발표하고 이 회사는 당분간 토브루크에 본부를 두고 장래에 벵가지로 이전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과도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원유판매에도 큰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제이단 총리는 리비아 전체생산량 125만 배럴 가운데 현지 생산량의 비중이 그리 많지 않으나 원유시설을 되찾지 못하면 11월부터 정부운영비 조달이 어려워 질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결국 석유자원을 관리하는 부족이나 집단이 리비아의 새로운 통치 집단이 될 것이며, 그 목표는 국영석유법인(NOC)을 장악하는 세력이 될 것이다.

 

원유시장을 둘러싼 제2의 이권분쟁 가능성


리비아 경제는 수출의 약95%, GDP의 약80%, 정부소득의 99%를 차지하는 에너지부문으로 구성된다. 국토면적에 비해 적은 인구 약500만 명의 함께 에너지부문으로부터의 추가적인 수입(收入)은 아프리카에서 높은 1인당 GDP를 가능케 해주고 있다 (12,300달러, 2012년 기준). 기후조건과 사막은 농업생산물에 제약이 되고 있어 식량의 약80%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수자원은 인공댐(Great Manmade River; GMR)이 중요한 공급원이다. 

리비아 원유의 탐사는 최초의 채굴권이 양도된 1955년 ‘석유법’이 적용된다. 총체적인 관리는 과거 석유성이었던 '석유국'(secretariat of petroleum)에 의해 이루어진다. 1960년대 급속한 원유생산 증대는 1973년까지 리비아를 중동 및 북아프리카 생산국가운데 4번째 생산국으로 끌어 올렸다. 원유생산은 1970년 일량 332만 배럴로 최고에 달했고, 정부의 원유 절약정책 선언과 함께 1975년 원유생산은 일량 148만 배럴로 감소되었다.

 

리비아 석유산업의 관리, 감독 및 참여기관은 1968년 설립된 '국영석유법인'(The National Oil Corporation; NOC)이 생산, 정제, 분배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1986년 보복조치로 확대된 미-리비아간 분쟁이 있기 이전에는 Occidental, Conoco, Marathon, Amerada Hess 및 W. R. Grace 등 5개의 미국계 석유회사가 리비아에서 조업하였다. 리비아 당국에 의한 이들 석유회사에 대한 자산 동결과 함께 1986년 이들은 리비아에서 철수하였다.

 

리비아에는 세계8위의 약 500억 배럴의 원유가 매장돼있다. 비록 OPEC 매장량의 4%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유황성분이 적은 저유황 경질유의 생산량은 세계1위다. 유럽은 리비아가 수출하는 원유의 85% 이상을 수입한다. 이탈리아가 전체 원유 수입의 20%, 프랑스는 16%를 수입하고 미국은 5% 정도를 수입해왔다. 유럽 국가들이 리비아 내전에 즉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리비아는 2017년까지 원유 생산능력을 대폭 확충하는 계획을 추진해온 데다 새 정부가 약1,200억 달러에 달하는 국가재건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원유개발권을 확대할 가능성이 있어 리비아의 원유시장은 제2의 전쟁터가 될 가능성이 짙다.

 

이 과정에 미국은 리비아의 권력이양과 민주화 과정에서 직접적인 개입은 피하겠지만, 경제적 이권을 챙기는 데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중국도 과거 진행하던 188억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 계약을 지켜나가기 위해 다시 뛰어들 것이고, 러시아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약1,200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전후 재건비용에 약400억 달러의 수주가 예상되는 리비아시장의 진출은 한국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위 사실을 잘 간파하고 과거 대수로공사(GMR)를 기억하며 장단기 진출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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