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영역 건너뛰기
지역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오피니언

알바니아의 민족주의와 벡타시(Vektash) 파

중동부유럽 기타 최자영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HK교수 2013/11/25


알바니아는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같이 섞여있으며, 기독교도는 정교도와 카톨릭교도으로 나뉜다. 중세 정교의 비잔티움 제국하에 있다가 11세기 이후 기독교는 동쪽의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정교와 서쪽의 로마 교회로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무슬림이 들어온 것은 15세기 오스만 터키의 진출로 비잔티움이 몰락한 이후이다.

20세기 근대국가가 들어서면서 민족주의가 또 하나의 ‘종교’와 같이 알바니아 인을 결속하는 중심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 민족주의가 전통적으로 존재한 종교적인 대립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섭렵하는가 하는 것이 화두가 되었다.
N. 맬콜름(Malkolm)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신화>에서‘종교적 문제를 초월한다는 것은 허상(myth)에 불과하다’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와 반대로 P. 바사(Pashko Vasa)1는 <오, 가난한 내 알바니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깨어나라! 알바니아 인들이여, 깊은 잠에서 깨어나라. 형제같이 모두 모여서 교회(기독교 사원)인가 자미(무슬림 사원)인가를 따지지 말고 서약을 하자. 알바니아 인들의 신조는 ‘알바니아 (민족)주의’라.”

바사가 주창한 이 말은 알바니아 ‘중흥(르네상스)’을 기리는 모든 글에 인용되었다. 그러나 단일민족의 정체성 형성은 물론 민족 단합을 추구하는 데 여전히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오스만 터키 지배 하의 4-5세기를 이어져 내려온 정교도와 무슬림 간의 종교적 문제였다.
알바니아 ‘중흥’의 대부인 M. 코니차(Konitsa)는 종교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취지의 글을 적었다.

“알바니아 인이 서로 다른 종파로 분리되어 한 나라를 구성할 수 없다는 거짓 주장이 횡행하고 있다. 그러나 알바니아는 유럽에서  종교적 문제가 사람들을 분열시킨 것이 없은 유일한 나라이다. 알바니아 인들은 그 민족사에서 언제나 하나로 뭉쳐왔다. 알바니아에서는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서로 혼인하는 사례가 흔하고, 한 가정에서도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같이 한 지붕 아래서 평화롭게 산다. ... 알바니아 인은 언제나 알바니아 인으로 존재해왔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허상(myth)으로 간주되었던 민족주의가 종교적 차이를 봉합하는 것으로 현실화하게 되었다. 오히려 같은 종교집단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되었다. 그 예가 위계적 정교회 성직자들과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알바니아 인 기독 정교도(Orthodox Christianity)들 간의 갈등, 그리고 위계적 수니파 성직자들과 남부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벡타시 종파 간의 갈등이다.

알바니아 민족주의가 종교의 차이를 초월하게 된 것은 특히 공산주의 체제하에서이다. 사회적 문화적으로 광범하게 영향을 미치는 종파로 갈라지게 되면 민족주의가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합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선구자로 대표되는 3인은 실로 여러 상이한 종파에서 배출되었다. 프라셰리 (Naim Frasheri)는 무슬림이었고, 놀리(Fan Noli)는 정교도, 피스타(Gjergj Fista)는 카톨릭교도였다. 이렇게 알바니아 ‘중흥’의 민족주의 이념은 종교를 초월하게 되었다.
알바니아 인들 가운데 정교도들은 스스로 가정 정통의 알바니아 인으로 자처하는데, 그 이유는 오스만 터키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어왔다는 것이다. 반대로 무슬림의 다수는 오스만 쪽과 유대하고 지금도 터키 인으로 자처한다. 뿐 아니라 자신들이 더 순수한 알바니아 인이라고 생각하고, 민족 ‘중흥’의 주축이 되어 알바니아를 잠식하려 하는 세르비아 인들에게 맞섰다. 한편, 기독교 인들 가운데서는 정교도는 그리스 인, 카톨릭은 이탈리아 인들과 친화성이 있는 가운데, 카톨릭 교도들도 자신들을 진정한 알바니아 인으로 자부하는데, 그 큰 이유는 알바니아의 도덕, 관습법 등이 전통적으로 카톨릭교의 영향을 받아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알바니아 인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은 종족과 언어(구어 및 알파벳)로, 이 두 가지가 공동의 민족의식이 발전할 수 있는 핵을 이룬다. 그래서 알바니아 인은 같은 교과목의 학교, 단일한 민족의 문학 등을 보유한다.

공산체제 하의 알바니아에서 민족주의의 선구자로 각인된 것은 중세의 게오르기오 카스트리오티-스칸데르베이(Gjergj Katrioti-Skanderberg)2이다. 그는 기독교의 봉건 귀족 가문 출신이었는데, 무슬림이 알바니아로 들어오던 15세기에 인질로 븥들려가서 콘스탄티노플에서 교육을 받으며 무슬림 교도가 되었다. 그러나 1443년 오늘날 서북쪽 알바니아로 돌아온 다음 무슬림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리고 그곳 귀족들과 연대하고 또 바티칸의 카톨릭과 베네치아의 세력과 연대하여 오스만 터키 정부에 대항했으며 이런 상태는 그가 죽을 때(1468)까지 계속되었다.
스칸데르베이를 민족주의의 선구자로 설정한 공산체제에서는 그 종교적 입지의 의미를 축소하고 정복자 오스만 터키에 저항한 전사로서의 모습을 강조했다. 즉 스칸데르베이가 기독교도로 무슬림에게 대항한 것이 아니라, 알바니아 인으로서 터키 인에게 대항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종교가 한 민족의 단합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 일환으로 너무나 독실한 종교적 전통을 가진 스코르다에 ‘무신(無神) 박물관’을 세웠다.

1991년 알바니아 공산체제의 붕괴와 함께 종교와 민족주의 이념 간의 관계가 새 국면을 맞게 되었다. 민족주의는 세속적 의미로서 종교와 직접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종교간 문화적, 나아가 정치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크게 서쪽 유럽의 기독교와 동쪽 이슬람 교간의 대립이 존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알바니아에서는 크게 세 가지 주장이 등장했다. 하나는 유럽중심주의적인 것으로, 유럽과 일체가 되기 위해서 카톨릭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정교는 유럽 가장자리의 일부에 불과하므로 입지가 허약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칸데르베이가 한 상징으로서 등장한다. 둘째는 여러 가지 종교적 경향을 정치와 분리시키려는 경향, 그리고 셋째는 이슬람교를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이른바 ‘이슬람-알바니아 주의’로서, 이는 반 유럽적임과 동시에 슬라브주의 및 그리스 정교를 모두 배격하는 입장으로, 이런 주장을 지지하는 수가 세 가지 입장 중 가장 적다.

그런데 알바니아가 처한 이런 이념 간, 혹은 현실 정치적 입장 간의 차이를 해소할 수 있는 한 실마리를 ‘벡타시 파(派)’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벡타시 파는 무슬림의 한 분파로 간주되는데, 13세기 벡타시(Haji Bektash Veli)에 의해 창설되었고, 오스만의 정복으로 발칸 반도에도 들어왔다. 이것이 알바니아에 들어와 퍼지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 17세기 중엽 경인 것으로 간주된다.

당시 순니(Sunni)파는 정통 이슬람 및 오스만 제국의 권력, 아랍어 등과 연관이 된 반면, 벡타시 파는 지역적 특색의 문화, 지역의 고유 언어에 대한 애정과 연관된다. 19세기 알바니아 민족 혹은 지역주의에 주역을 담당한 것은 벡타시 파였던 알리 파사(Ali Pasa)였다. 20세기 초에 벡타시 파는 전체 알바니아 인 가운데 약 15%, 전체 무슬림(약 60%) 가운데는 약 1/4 정도이다. 벡타시 파는 알바니아 민족주의 동향의 중심이 되었고, 오스만 치하에서 불법적으로 알바니아 언어를 가르치는 교육의 중심이었다.

1922년 스크라파르(Skrapar)의 프리슈타(Prishta)에서 있었던 첫 번째 민족 회합에서 알바니아 벡타시 파는 터키 벡타시 파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1925년 터키에서 벡타시 파를 불법적인 것으로 금지한 다음에는 세계 벡타시 파의 회합이 알바니아의 수도인 티라나에서 열렸다.

벡타시 파의 특징은 자유의 이념을 극대화한 것이다. 술을 마실 수 있고, 또 벡타시 사원에서 술을 직접 생산하기도 한다. 남녀는 평등하며, 다른 종교적 요소, 특히 정교의 요소들을 수용한다. 기본적으로 벡타시 파는 여러 가지 종교를 융합한 만신(萬神)적인 특징을 가지면, 신비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기까지 한다. 한 예로 그리스 정교의 전통이 강한 흑해 연안의 무슬림 벡타시 파의 일부는 사실 ‘은밀한 기독교인들(cryptochristianoi)’로 간주되기도 한다. 오스만의 지배 하에서 기독교인들이 불이익을 피하기 우해 무슬림으로 개종하면서 벡타시 파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한 선구자인 N. 프라셰리는3 벡타시 파에 대해 자유와 만신(萬神)적인 여러 종교의 복합적 요소가 알바니아 ‘민족주의’ 발달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벡타시 파에 보이는 코란과 성경의 복합적 요소는 알바니아 내 종교적 차이를 봉합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벡타시 주의’는 일정 종교 혹은 민족 집단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 대한 형제애를 근본 이념으로 하고 있다. 자유와 제(諸)종교 융합적 성격을 지닌 벡타시 파는 상이한 종교적 갈등은 물론 상이한 민족 간 갈등까지도 봉합할 수 있는 한 이념적 장치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알바니아에는 세 가지 종교가 공존했으나 이들 간의 종교분쟁의 역사는 없었으며, 그 종교적 믿음이 민족의식의 형성을 방해할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종교는 정복자 오스만 터키 인이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강요한 이념으로서 작용한 점이 강하다. 이런 점에서 알바니아 벡타시 파의 존재는 표면적으로 종교적 혹은 민족 간의 분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종교나 민족주의로 포장한 집단 이기주의의 산물인 경우가 적지 않은 데 대한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겠다.


참고자료:
Sergis, M.G. ed. Pontos: Themata Laographias tou Pontiakou Ellinismou (Athina: Alitheia, 2008)
Zegkinis, E.X., Mpektasides, derbisides kai ethniko kinima stin Albania (Ioannina: Isnaphi, 2005)
http://argolikivivliothiki.gr/2012/01/23/religion/  [2013.11.1.일 검색]  


1) 파슈코 바사 (Pashko Vasa: 1825-1892) [출처: http://argolikivivliothiki.gr/2012/01/23/religion/pashkovasa/]
2) 게오르기오 카스트리오티-스칸데르베이(Gjergj Gjergj Katrioti- Skanderberg: 15세기) [출처: http://argolikivivliothiki.gr/2012/01/23/religion/371px-skanderbeg2]
3) 나임 프라셰리 (Naim Frasheri: 1846-1900) [출처: http://argolikivivliothiki.gr/2012/01/23/religion/naim frasheri]

본 페이지에 등재된 자료는 운영기관(KIEP)EMERiCs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