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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파워 쉬프트(power shift), 아르바트의 총격전과 세 마리 고래 사건

러시아 배규성 - - 2013/11/20

올리가르히도 제거될 수 있다. 아르바트의 총격전(1994)

제국의 흥망에서와 같이 국가적 권력도 부침을 거듭한다. 소련공산당을 중심으로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해왔던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하자, 혼돈상태의 이행기가 진행되었고, 그 와중에 옐친 대통령을 둘러싸고 엘리트 간의 권력이동이 이루어졌다. 조직된 힘이 특히 가치 있는 시장적 자원이었던 1990년대 중반 다양한 반 자율적인 무장조직들이 경제와 정치 분야에서 적극적인 행위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1)

1996년 여름까지 가장 강력했던 조직은 1985년 이래 옐친의 개인 경호원이었던 알렉산더 코르사코프(Alexander Korzhakov) 장군이 이끄는 대통령 경호실(SBP, Sluzhba bezopasnosti prezidenta)이었다. SBP는 1993년 11월 공산당 지도부의 경호를 맡았던 전 KGB 제9 총국인 호위총국으로부터 창설되었다. SBP는 재빨리 750명 이상의 장교들로 구성된 급여수준이 높은 엘리트 보안기구가 되었다. 1995년 6월 SBP는 대통령행정실의 한 부서로 위상이 격상되었고, 코르사코프는 장관의 서열에 올랐다. 또한, 새로운 보안 기구는 FSB의 감시와 정보자료를 활용할 수 있는 공식적 권리를 획득했고, FSB의 국장인 알렉산더 바르수코프(Alexander Barsukov)와 코르사코프의 개인적인 긴밀한 관계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FSB의 지원을 받았다.

코르사코프와 그의 부관이었던 전 내무부 대령 발레리 스트렐레츠키(Valerii Streletsky)의 회고록에 의하면, SBP는 대통령과의 긴밀한 관계, 기동성이 뛰어난 어마어마한 무장부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도청과 감시기회를 활용하여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휘둘렀다.2) 옐친 정부 내 부패가 만연했고, 그 결과 상대를 협박할 수 있는 정보는 일종의 정치적 통화가 되었다. 코르사코프와 스트렐레츠키는 수많은 부정부패자료를 축적할 수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실재 공식적 조사와 법원의 청문회를 거쳤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SBP의 활동 중 하나는 사적인 보호의 공급자였다. SBP는 민간 기업들에 석유수출 쿼터를 배정하는 권한을 획득했고, 당연히 자신의 회사인 “로스토플리보(Rostoplivo)”를 설립했다. SBP는 또한 국영 귀금속수출기구인 “로스콤드라그메트(Roskomdragmet)”를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넣고, 공식적으로는 귀중한 국가자원의 불법적 수출을 막는다는 명분을 가졌지만, 실질적으로는 귀금속 수출업에 대한 SBP의 독점을 이루었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SBP는 무기 수출에도 상당히 개입되어 있었다.3)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활동들은 SBP의 공식적 업무가 아니었다.

폭력관리기관(violence-managing agencies)의 수가 많아지자 그들은 다른 기관의 힘 증가를 자신의 이익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경쟁자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자신의 잠재적 폭력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러시아 정치/경제 엘리트 간의 권력투쟁의 형태로 나타났고, 올리가르히도 제거될 수 있다는 극적인 예는 코르사코프의 회고록에 나타난다.

1994년 12월 2일 SBP와 모스크바 지역 FSB(당시 FSK)의 지원을 받던 모스트 금융그룹의 자체 보안기구(PSS: Private or Company Security Service)가 극적인 대결을 벌인다. 코르자코프는 안하무인격인 모스트그룹의 회장인 구신스키에게 압력을 넣으라는 옐친의 비공식적인 지시가 있었다고 말했다.4) 코르자코프에 따르면, 그것은 정치적 영향력을 다투고 있던 또 다른 타이쿤인 보리스 베레좁스키에 의해 야기된 음모였고, 그가 이런 무모한 명령을 촉발했다. 동시에 코르자코프는 자신과 구신스키와의 불화도 숨기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대통령과 SBP의 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모스트 금융그룹의 PSS에 의해 공공연하게 보여진 힘의 과시였다. 구신스키는 무장경호원을 대동한 장갑차량의 경호를 받으며 모스크바 주변을 순회하곤 했다. 1,500명 이상의 요원을 가진 PSS 모스트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민간보안회사 중 하나였다. 모스트 그룹의 비공식적 보안조직은 1989년에 이미 설립되었으나, 1993년 이데올로기 문제(반체제인사)를 담당했던 KGB 제 5총국의 창설자이자 부국장이었던 필립 보브코프(Philip Bobkov)가 장이 될 때까지는 유능한 조직이 되지 못했다. David Remnick에 따르면, 이런 수상한 선택에 대해 구신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안전만 확보해준다면, 우리는 악마라도 고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5) 표준적인 보안과 집행기능에 더해 PSS는 정치적 기업적 정보활동에도 개입하여 협박용 정보들을 수집했다. 당시 모스트의 본사는 모스크바 시장의 본부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다.

보안업무는 모스트 금융그룹 업무의 단지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이론적으로 다른 어느 곳엔가 압력이 가해졌을 것이다. SBP가 모스트 그룹의 보안 부서를 주 타켓으로 설정했다는 사실은 민간 경제주체들의 권력행사 능력의 중심축을 잘 보여주었고, 사업관계의 폭넓은 구조를 반영했다. 1999년 예프게니 프리마코프 총리시절에도 국가보안기구가 베레좁스키의 보안기구인 PPC 아톨(Atoll)을 목표로 삼았었다.

적절하게 무장한 코르자코프의 요원들은 다챠에서 본사까지 구신스키와 그의 경호원들을 바짝 뒤쫓았고, 전형적인 기습을 감행했다. 구신스키의 경호원들은 모스크바시 중심지에 있는 모스트 건물 바로 밖에서 스키 마스크를 쓴 ‘괴한’들에게 얻어맞았고, 모스트 사무실은 수색 당했다. 경호원들은 눈밭에 얼굴을 파묻고 2시간이나 그렇게 있어야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구신스키는 우선 모스크바 RUBOP(Regional Organised Crime Combating Department, 조직범죄와 경제범죄를 다루는 러시아 내무부 산하 엘리트 경찰조직)에 전화를 걸어 범죄집단의 습격을 알렸다. RUBOP 특수부대가 도착했지만, ‘괴한’들의 신원을 확인한 후 조용히 사라졌다. 사무실 창문을 통해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구신스키는 자신의 옛 친구, 모스크바 FSB의 장인 예프게니 사보스챠노프(Evgenii Savostyanov)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르자코프는 이 전화를 도청해 들었다. “제냐, 도와줘. 괴한들이 나를 쫓아와 경찰에 전화했더니, 출동한 다음 아무런 조치도 없이 가버렸어. 네가 나의 마지막 희망이야.”6) 사보스챠노프는 즉각 대응했다. 사보스챠노프의 지휘를 받는 모스크바 FSB의 또 다른 특수부대가 현장에 급파되었고, 공중에다 사격을 가했다. 보고된 바에 따르면, 코르자코프 요원의 차에도 몇 발이 명중하였다. 다행히 모스크바 FSB팀의 한 대원이 막 대응사격을 하려고 하던 SBP 요원 중 이전의 동료를 확인했다. 총격전 이후 중무장한 코르자코프의 요원들이 도착하여 FSB 팀을 구속하고, 무기를 압수했다. 다음 날 모든 신문이 모스크바 중심부에서 발생한 미스터리한 총격전을 보도했다.

이 소규모 전쟁의 결과는 그렇게 막강한 경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올리가르히도 더 막강한 정치권력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구신스키는 해외로 도망했고, 그들 도와주려 했던 모스크바 FSB의 장인 사보스챠노프는 해임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SBP는 다른 보안조직들에 대해 자신의 우위를 과시했다. 서로 경쟁하고 있던 올리가르히의 권력은 일시적으로 축소되었다. 이 사건은 미디어의 보도와 관련 조직들의 위상으로 볼 때, 아주 이래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 자체는 이전에는 국가에 속했으나, 나중에는 관련 경제주체를 보호하고 다양한 경쟁자를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지방의 권력자들에 의해 이용당하는 지방 무력행사조직들(local force-wielding organization)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다른 많은 유사한 갈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7)

러시아 자본주의의 ‘와일드 이스트(wild east)적인’ 단편을 잘 보여준 이 모스크바 총격사건은 한편으론 경제 엘리트에 대한 정치 엘리트의 우위를 잘 보여주었고, 다른 한편으론 국가의 힘이 아니라 국가의 취약성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러시아의 신흥 엘리트, 실로비키들의 부패와 권력투쟁, 세 마리 고래 사건(2006)

앞서 언급한 ‘아르바트 거리의 총격전’이 러시아 자본주의 이행 초기의 엘리트들간의 권력투쟁 또는 권력이동을 보여주었다면, ‘세 마리 고래 사건’은 경제권력/엘리트, 즉 올리가르히로로부터 정치권력/엘리트, 실로비키로의 권력이동 이후 실로비키들간의 권력투쟁과 그들 내부의 부패상황을 잘 보여준다.
   
‘세 마리 고래 사건’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8) 가구수입회사인 ‘세 마리 고래(Three Whales)’가 FSB와 세관의 고위관리가 연루된 무기 및 원유밀매 뿐만 아니라 돈세탁으로 기소되었다. 그러자 FSB와 검찰 고위관리들은 부하직원들의 이 사건 조사를 중지시켰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결국 수사방해와 사건은폐가 알려졌고, 2006년 6월-9월 FSB와 세관의 고위관리들이 줄줄이 사임했고, 검찰총장도 사임했다. 게다가 이 사건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거나 의문스럽게 사망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살해의 위협을 받거나 직장을 잃었다.

이 사건은 2006년 6월 검찰총장 블라디미르 우스티노프(Vladimir Ustinov)의 사임에서 시작된다. 그 후 이 사건은 러시아연방 대통령부와 러시아 정부 및 의회, 그리고 검찰청과 국세청의 많은 고위급 간부의 사임을 야기한 초대형 정치 스캔들이 되었다.

이들 고위관리들 중에는 이전에 연방보안국(Federal Security Service, FSB)의 “건드릴 수 없는(untouchable)” 고위관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해 9월 13-18일, 러시아 언론은 세르게이 쉬쉰(Sergei Shishin)과 블라디미르 아니시모프(Vladimir Anisimov)의 사임을 보도했다. 이들 두 사람은 ‘FSB내의 FSB’로 불리는 보안총국(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의 전임 국장들로 FSB 중장(colonel generals)들이었다. 당시 보안총국장인 FSB 소장 알렉산드르 쿠프리아쥬킨(Aleksandr Kupryazhkin) 또한 직을 잃었다. 푸틴 행정부 내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또 다른 한 고위직 인사와 내각 스태프 내의 그의 상대역도 사임명령을 받았다.    

러시아연방 검찰청의 몇몇 고위직과 더불어 우스티노프 검찰총장의 몇몇 부관들도 직위를 상실했다. 이들 중에는 러시아 거대 석유기업인 유코스(Yukos) 사건을 맡았던 검사들인 드미트리 쇼킨(Dmitry Shokhin)과 카밀 카샤예프(Kamil Kashaev)도 있었다.

그들의 협의는 무엇이었을까? 이들 모두에게 씌워진 혐의는 직권남용(abuse of office)과 소위 말하는 ‘세 마리 고래 사건’의 은폐였다.

세 마리 고래(Three Whales)

세 마리 고래는 가구수입회사였다. 이 회사는 밀수의 의심을 받고 있었다. 2006년 9월 15일 검찰총장 유리 차이카(Yury Chaika)는 흑해의 소치로 날아가 푸틴 대통령에게 수사과정을 브리핑했다. 그는 푸틴에게 거의 모든 보안기구와 법집행기관이 이 사건과 관련된 범죄활동과 뒤이은 은폐활동에 관련되어 있고, 당시 진행되던 푸틴의 전 FSB 동료들로 구성된 내부서클(inner circle), 즉 ‘실로비키’ 9) 에 대한 정화활동이 계속되어야만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미 몇 달 전인 6월 15일 상해에 있던 푸틴 대통령은 언론인들에게 자신이 직접 이 사건에 관여하겠다고 말했었다. 그는 모스크바의 법집행기관의 상층부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레닌그라드 주의 수사관이자 푸틴의 동급생이었던 블라디미르 로스쿠토프(Vladimir Loskutov)에게 이 사건을 부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푸틴이 설명하지 않은 것은 왜 러시아의 대통령이 그런 중형급 사건에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는가? 였다. 사실, 세 마리 고래 사건은 포스트 소비에트 역사상 그렇게 많은 면책권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고위직 인사들이 범죄활동에 관여했는가 하는 관점에서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가구회사에 대한 수사, 외압 그리고 은폐

이 사건은 2000년 10월 통상적인 밀수사건으로 시작되었다. 모스크바 내무부 소속 수사관이었던 파벨 자이체프(Pavel Zaitsev) 대위가 세르게이 주예프(Sergei Zuev)와 그랜드사(Grand)가 소유한 가구회사인 리가 마르스(Liga Mars)와 그 쇼룸인 세 마리 고래(Three Whales)를 입건했다.

자이체프는 이 회사가 또한 불법적으로 무기와 원유를 밀수하고, 돈세탁을 한다고 의심했다. 동시에 세관 수사관 올렉 볼코프(Oleg Volkov)와 마라 페이줄린(Marat Faizulinn)도 프랑스, 이태리, 독일 등과 의심스런 수입거래에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는 같은 기관의 동료 몇 명에 대해 병행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상대국 수사관들에게도 그들 측에서 이 사건을 수사하라고 요청했다.   

세 마리 고래의 후원자는 FSB 부국장인 유리 자오스트롭체프(Yury Zaostrovtsev) 대령과 그랜드(Grand)의 보안을 책임지고 있던 그의 아버지이자 퇴역한 FSB 소장 예프게니 자오스트롭체프(Yevgeny Zaostrovtsev)였다. 아버지 자오스트롭체프는 또한 당시 FSB국장인 니콜라이 파트루쉐프(Nikolai Patrushev)의 KGB 상관이었다. 자이체프는 부패한 러시아 관료가 1990년대 리가 마르스와 뉴욕은행을 통해 수백만 달러의 돈을 세탁하려 한 사실을 발견했다.

자이체프의 수사에 대한 반응은 거의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2000년 11월 말, 러시아 대검찰청은 자이체프에게 수사중단을 명령했고, 사건관련 서류들을 압수했다. 이 일이 있기 전, 자이체프와 내무부의 그의 동료들은 쥬에프(Zuev)와 FSB 고위장교간의 전화대화를 도청했다.

그리고 그들은 2002년 11월 “노바야 가제에타(Novaya gazeta)”가 보도한 것처럼, 수사 대상 이들 인물들이 대검찰청 관리들에게 수사를 중단하라고 2백만 달러의 뇌물을 먹인 것을 알았다. 사실 2001년 5월 대검 차장 유리 뷰류코프(Yury Buryukov)는 “사법적 증거 부족”이라는 이유로 ‘세 마리 고래’ 사건의 수사를 중단하라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동시에 볼코프와 페이쥴린이 이끄는 세관 수사도 중단되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대검찰청이 자이체프와 볼코프 그리고 페이쥴린에 대해 ‘직권남용’ 및 ‘피의자 인권남용’으로 기소를 했다는 사실이다.

쉐코치킨 사건(Shchekochikhin Case)과 핵심증인 살해

앞서가는 러시아의 탐사 저널리스트(investigative journalists) 중 한 명이자 러시아 하원 안보위원회(Duma Security Committee) 부의장이기도 했던 유리 쉐코치킨(Yury Shchekochikhin)은 그의 동료 의원이자 1980년대 조직범죄와의 투쟁에서 이름을 날린 경찰 장성, 알렉산드르 구로프(Aleksandr Gurov)와 함께 2002년 3월 이 사건에 대한 의회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검찰총장 우스티노프와 차장 뷰류코프는 모든 부패고발사건을 기각하고, 적법한 이유로 모든 수사가 종결되었다고 말했다. 대검찰청 또한 수사관들의 입장을 지지하며 개입하려 한 당시 내무장관 보리스 그리즐로프(Boris Gryzlov)와 국세청장의 시도를 저지시켰다. 

마침내 쉐코치킨과 구로프와 전 FSB 국장 니콜라이는 2002년 4월 푸틴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써 이 사건에 개입하라고 요청했다. 푸틴은 이 사건을 직접 챙겼으나, 2003년 6월 쉐코치킨은 “노바야 가제에타”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기고했다. 쉐코치킨은 유럽과 미국에서 ‘세 마리 고래’의 파트너들이 구속되고 처벌 받았지만, 러시아의 법집행당국은 서구 카운터파트의 조회에 응답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썼다. “나에게 법관의 독립 같은 동화를 이야기하지 마라. 이 사건의 경우 우리가 공정한 재판을 보기 전에, 사건 서류들이 폐기되고, 증인들이 협박을 받거나 암살될 것이고, 수사관들조차도 처벌받을 것이다.”

이 기사가 나간 한 달 후, 쉐코치킨은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의심스런 알레르기였지만, 그의 친구들과 동료들은 그가 ‘세 마리 고래’ 사건에 대한 핵심적 정보를 수집했고, 그것을 막 서구 수사관들에게 전달하려 했기 때문에 독살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때 이래로, 쉐코치킨이 이 사건에 대해 글로 쓴 많은 예언들이 사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이체프는 모스크바 법원에 의해 2003년 11월 수사 중인 피의자 인권남용 대해 2년의 보호관찰 형을 받은 뒤 사임했다. 이 소송은 대검찰청에 의해 기소되었다. 현재 자이체프는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인권재판소(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의 항소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세관의 고참 수사관인 볼코프와 페이쥴린은 직권남용 협의를 받았고, 직장을 잃었으나 결국 무죄방면되었다. 그들을 무죄방면한 판사는 그와 그의 가족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2003년 가구업협회 회장인 퇴역 해군장교 미하일 페레베르세예프(Mikhail Pereverseev)는 최고의 보안을 자랑하는 모스크바 뷰덴코 중앙군사병원에 누워 있다가 갱단 스타일로 살해되었다. 그는 ‘세 마리 고래’ 사건의 핵심 증인이었다. 2003년 ‘세 마리 고래’ 사건과 관련된 또 다른 핵심인물, 안드레이 사엔코(Andrei Saenko)의 메르세데스가 총격을 받았고, 사옌코의 운전기사는 사망, 그는 중상을 입었다. 내무부의 비밀 ‘안전가옥’에 숨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핵심 증인도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2004년 자이체프가 무죄라고 판결한 하급법원의 판사인 올가 쿠데쉬키나(Olga Kudeshkina)는 직업을 잃었다. 그녀는 러시아 대법원의 압력을 받았다고 말했다. 2004년 세관수사를 시작했던 전 국세청장(director of Customs Service) 미하일 바닌(Mikhail Vanin)과 국세청 차장 보리스 구틴(Boris Gutin) 중장도 직업을 잃었다. 국세청은 완전히 해산되었다. 그 후 상원의원에 당선된 구틴은 상원 의장인 세르게이 미로노프(Sergei Mironov)에 의해 부패혐의로 고소되었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사건 재개, 그러나

마침내 2006년 6월 15일, 푸틴 대통령이 직접 이 사건에 관여하겠다고 말한 바로 그날, 대검찰청은 ‘세 마리 고래’ 사건을 재개했다. 얼마 후 쥬에프를 포함하여 5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미디어의 보도에 따르면, 초기 200권의 수사파일들은 이제 20권만 남았다. 구로프는 6월 18일 NTV에 출연했다. 그는 크레믈린이 사건수사에 주저했고, 외국의 정보기관들이 이 사건 조사에 착수하자, 수사를 재개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세 마리 고래’ 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FSB를 포함하여 검찰청, 국세청 등 정보기관의 정화작업을 통해 적어도 두 가지 결론이 도출될 수 있었다.

첫째, 푸틴 권력의 핵심이자 기둥인 실로비키 내부의 심각한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내부 투쟁은 기관 대 기관의 투쟁이 아니었고, 거의 모든 정보기관 내에 심각한 내부적 균열을 창출했다. 지금까지 푸틴은 정보공동체 내의 힘의 균형을 회복하고자 노력했고, 가장 부패한 요소들을 척결해 왔다. 그러나 당시 푸틴을 서로 갈등하는 두 실로비키 그룹 사이에 위치시키는 것은 국가의 기능을 일시 마비시킬 수도 있는 아주 위험스런 일이었다.

둘째, 이 사건은 다시 한 번 부패가 러시아의 사법부나 법집행기관에 얼마나 뿌리 깊게 퍼져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사회를 보호해야 할 이들 기관들이 오히려 사회에 위협을 야기하는 일이 이렇게 때때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푸틴 집권 2기에 실로비키를 중심으로 벌어진 정경유착, 권력형 비리, 실로비키의 부패와 내부 권력투쟁 등은 러시아의 국가적 취약성을 명백하게 보여주었고, 푸틴 스스로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국가기관의 핵심요소들에 대한 통제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인정하게 했다. 푸틴의 자인은 2006년 6월 언론인에 대한 성명에서 보여진다. 이 성명에서 언급된 ‘세 마리의 고래’ 사건을 계기로 푸틴은 더 이상 모스크바의 핵심 법집행기구조차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푸틴 통치하에서 실로비키들이 올리가르히를 대체하여 러시아의 가장 강력한 집권세력이 되었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러시아 엘리트들 사이의 파워 쉬프트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FSB의 몇몇 최고위 간부들이 숙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FSB는 필요 이상으로 여전히 강력한 기구로 남아 푸틴 권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1) 예를 들면, 1993년 자신의 준군사적(paramilitary) 조직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코사크연맹(Russian Union of Cossacks)은 모스크바의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인 다닐로프스키(Danilovskii) 시장에 보호(protection)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Soyuz kazakov vzial Danilovskii rynok”(코사크연맹이 다닐로프스키 시장을 장악하다), Izvestiya, 20 July 1993.
2) Alexander Korzhakov, Boris Yeltsin: Ot rassveta do zakata (보리스 옐친: 새벽에서 황혼까지) (Moscow: Interbook, 1997); Valerii Streletsky, Mrakobesie (무지몽매함) (Moscow: Detektiv-Press, 1999)
3) Alexei Mukhin, Informatsionnaya voina v Rossii: Uchastniki, tseli, tekhnologii (러시아의 정보전쟁: 참가자, 목표, 기술) (Moscow: Tsentr politicheskoi informatsii, 2000) p. 65
4) “구신스키의 발 아래 땅이 불타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라.” Alexander Korzhakov, Boris Yeltsin: Ot rassveta do zakata (보리스 옐친: 새벽에서 황혼까지) (Moscow: Interbook, 1997); Valerii Streletsky, Mrakobesie (무지몽매함) (Moscow: Detektiv-Press, 1999) p.285.
5) David Remnick, Resurrection : The Struggle for a New Russia (New York: Random House, 1997) p. 186.
6) Alexander Korzhakov, Boris Yeltsin: Ot rassveta do zakata (보리스 옐친: 새벽에서 황혼까지) (Moscow: Interbook, 1997); Valerii Streletsky, Mrakobesie (무지몽매함) (Moscow: Detektiv-Press, 1999) p.286.
7) 언론은 또한 모스크바 FSB가 보리스 베레좁스키의 주력기업인 Logovaz의 본사를 수색하려고 했던 RUBOP를 격퇴한 충돌사건도 언급했다. Izvestiya, 14 April 1995. 4면.
8) Yasmann, V. (2006) ‘Russia: Corruption Scandal Could Shake Kremlin’, Radio Free Europe/Radio Liberty, (September 26, 2006), http://www.rferl.org/featuresarticle/2006/09/33cc2719-2ad5-4a45-a326-72828b9baf64.html, (검색일: 2008.01.21.)
9) 실로비키(силовики́, people of force)는 힘(force, power)을 뜻하는 러시아어 сила와 1990년대 초 옐친시기 군, 경찰(내무부), 정보기관(KGB/FSB) 등 군대 스타일의 제복을 입는 기관들을 의미하는 단어인 силовые структуры/министерства(structures of force)에서  파생된 силови́к(man of force)의 복수형이다. 실로비키는 때때로 “권력자(strongman)”로 번역되는 데, 이것은 위에 언급한 실로비키들의 특정한 경력을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에 잘못된 번역이라 본다. 따라서 실로비키란 푸틴 대통령 시절 권력을 장악한, 군(국방부), 경찰(내무부, 연방마약단속국 포함), 정보기관(KGB/FSB) 및 기타 보안기구(security services) 출신 고위 정치인, 관료 및 기업가를 총칭한다고 볼 수 있다.

 

배규성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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