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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10월 칙령 (Řjnov diplom)과 2월 헌법 (norov stava)

체코 김장수 관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2013/12/11

1848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3월 혁명(Märzrevolution)이 발생함에 따라 메테르니히(Metternich) 체제는 붕괴되었다. 이후 새로운 질서체제가 도입되었는데, 그동안 배타 시 되었던 자유주의적인 요소들이 크게 부각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도외시되었던 민족문제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을 위협하게 됨에 따라 그것의 해결 대안이 모색되었고 거기서 연방체제의 도입 필요성도 거론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도나우 제국에서 우위권을 행사했던 독일 정치가들은 그러한 질서체제도입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제국의 슬라브화가 급격히 진행될 수 있다는 판단 내지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전체 인구에서 독일 민족이 차지하던 비율은 단지 21%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슬라브 민족은 50% 이상을 차지했다.

이에 반해 슬라브 정치가들, 특히 체코 정치가들은 연방체제의 도입을 통해 그들 민족의 법적·사회적 불평등을 종식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시각 차이에 따라 슬라브 정치가들과 독일 정치가들은 대립하게 되었고 그 강도 역시 심화되어 타협의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848년 10월 빈(Wien)에서 발생한 소요로 구질서체제의 회귀가 본격화되었고 1849년 초 혁명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에는 구질서체제의 근간이 그대로 유지된 질서체제가 다시금 유입되었는데 그것을 지칭하여 신절대주의(neoabsolutismus)체제라 한다. 그런데 이 질서체제는 3월 혁명 기간 중 쟁취한 자유주의적 요소들의 일부를 실제 정치에 반영시켰기 때문에 이전의 질서체제인 절대주의체제와 구분되고 있다.

신절대주의체제가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슬라브 정치가들, 특히 체코 정치가들은 더 이상 그들의 정치적 관점을 공개석상에서 언급할 수 없게 되었다. 아울러 이들의 상당수는 빈 비밀경찰의 감시대상으로 선정되어 사회생활의 여러 부분에서 압박 및 제한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은 외부적 요인, 즉 오스트리아 제국이 1859년 프랑스와 피에몬테-사르데냐(Piemonte-Sardegna)와의 전쟁에서 패함에 따라 사라지게 되었다.

전쟁에서 패한 오스트리아 제국은 1859년 11월 10일에 체결된 취리히(Zürich) 평화조약에 따라 제국 내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선진화되고, 부유한 롬바르디아(Lombardia)지방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러한 상황은 빈 정부를 더욱 궁지에 몰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빈 정부는 이러한 난국타개에 필요한 방안들을 모색했고 거기서 제국 내 제 민족의 협조 및 동의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빈 정부는 1860년 10월 20일 ‘10월 칙령(Oktoberdiplom; Řjnovýdiplom)’을 발표했는데 이 칙령은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 I)의 지시에 따라 당시 내무 장관이었던 고루호보-고루호프스키(Goluchowo-Goluchowski)가 결성한 ‘59인 헌법준비위원회’에서 준비, 작성된 문서였다. 따라서 이 칙령에서는 지난 3월 혁명 기간 중 팔라츠키(F. Palack), 샤파르지크(P.Šafařk), 그리고 하블리체크-보로프스키(K.Havliček-Borovsk)를 비롯한 일련의 슬라브 정치가들이 요구한 연방주의적 요소들이 많이 거론되었다. 이 당시 헌법준비위원회에 참석한 인물들의 일부가 지방의 자치권을 확대시키는 것 보다 제국의회의 권한증대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그러한 관점은 헌법준비위원회에서 수용되지 않았다. 10월 칙령에서 거론된 중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방군 편성에서 역사적 요인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둘째, 각 지방군 의회의 활성화를 통해 지방민의 절실한 요구들을 가능한 한 빨리 국정에 반영시킨다.
셋째, 향후 법률제정에서 지방군 의회와 제국의회는 동등한 입장에서 상호 보완․협력한다.
넷째, 제국의 단일화 유지에 부담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각 지방군의 특성 및 필요에 따른 자치권을 부여한다.
다섯째, 빈 중앙정부는 향후 외교 문제, 화폐발권문제, 관세문제, 체신문제, 교통문제, 그리고 국방문제만을 전담한다.
여섯째,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이다. 따라서 이 지방이 그동안 향유했던 특별 제 권한(Sonderrechte)은 이전보다 축소시킨다.

빈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제국 내 슬라브 정치가들에게, 특히 체코 정치가들에게 민족적 희망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 활동의 재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했다. 그리고 그동안 중단되었던 민족정신의 부활이 가시화되었고 그러한 것은 프라하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후부터 체코 지식인들 역시 체코어를 사용하여 학문적 활동을 펼쳤다. 프레슬(Precl)이 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과 칼로우체크(J.Kalousek)와 토메크(V.VI.Tomek)가 역사의 중요성을 그들의 저서에서 강조한 것이 그 대표적 일례라 하겠다. 특히 칼로우체크와 토메크는 보헤미아 국가법을 비중 있게 다루어 보헤미아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사이의 동등성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아울러 이 시기에 민족음악도 강조되었는데 그것은 스메타나(B.Smetana)와 같은 인물의 등장도 가능하게 했다.1)

10월칙령이 공포된 이후 팔라츠키를 비롯한 대다수의 슬라브 정치가들은 빈 정부의 획기적 조치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는 신중성을 보였지만 이들은 일단 10월 칙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슬라브 정치가들의 우려는 다음 해 2월 21일에 발표된 ‘2월 헌법(Februarpatent; norovástava)’에서 가시화되었는데 그것은 이 헌법이 연방체제 대신에 중앙체제를 다소 완화시킨 형태를 지향했기 때문이다.2) 그런데 2월 헌법의 초안은 1860년 12월 13일 고루호브스키(Agenor Graf Goluchowski) 백작의 후임으로 빈 정부의 수상으로 임명된 쉬멜링(Anton Ritter v. Schmerling)의 법률 보좌관이었던 페르탈러(Hans v. Perthaler)로부터 나왔다. 페르탈러는 자신의 초안에서 10월 칙령이 보장한 지방군의회의 중요한 제 권한을 백지화시켰다. 즉 그는 지방군 의회가 10월 칙령을 통해 인정받은 ‘법률제정 참여권(Die Beteiligung am Gesetzgebung)’을 무효화시켰던 것이다. 아울러 페르탈러는 절대주의적인 요소들을 자신의 초안에 첨부시켰는데 그러한 것은 헌법에 대한 황제의 절대적 위상이 견지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황제의 통치권을 헌법 위에 놓이게 하여 황제가 앞으로 제정될 모든 법률적 조치에 대해서도 절대적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끔 했다. 또한, 2월 헌법은 양원제도〔(상원; Oberhaus)과 (하원; Herrenhaus)〕를 채택하는 외형상의 변화도 모색했다. 그렇지만 이 헌법은 향후 정치 활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될 하원을 경제적 능력에 따른 차등 선거로 구성하게 함으로써 입법부의 실제적 권한을 독일인 수중에 놓이게 했다.3) 즉 2월 헌법은 빈 정부가 10월 칙령을 공포한 후 제국 내 독일 정치가들이 지적한 그들 민족의 법적․사회적 지위 격하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법률제정에 적극적으로 반영시킨 결과라 하겠다.4)

2월 헌법이 발표된 이후 팔라츠키와 리게르를 비롯한 대다수의 체코 정치가들은 이 헌법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지만 빈 정부의 위정자들은 그러한 반응을 무시하고 그들이 발표한 헌법을 정당화시키는 데만 주력했다. 그것에 대한 일례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1862년 7월 빈에서 개최된 ‘독일 법률가 총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그의 연설에서 우선 슬라브 정치가들이 주장하는 그들 민족과 독일 민족 간의 법적·사회적 평등실현이 당시의 현실적 상황에서 불가능하다는 관점을 피력했다. 여기서 그는 연방체제를 오스트리아 제국에 도입시킬 경우 위에서 거론된 제 민족의 법적·사회적 평등화가 구현되지 못하리라는 언급을 했는데 그것은 독일 민족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슬라브 민족들이 연방체제하에서 그들 민족의 이익만을 추구하리라는 분석에서 비롯된 것 같다. 따라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0월 칙령의 시행으로 야기될 수 있는 부작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2월 헌법을 제정했다는 입장을 밝혔던 것이다. 또한,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 내 독일 정치가들의 과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그것은 이들이 슬라브 정치가들의 정치적 요구에 현혹되지 말고 독일 민족의 통합을 가시화시키는데 일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제국 내 독일 정치가들이 이러한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독일 민족의 신성한 의무를 포기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관점이었다. 여기서 그는 특히 독일권의 통합이 구 오스트리아주의의 원칙에 따라, 즉 오스트리아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는데 이것은 향후 소독일주의를 지향하던 프로이센(Preußen)과의 대립도 예견하게 했다.

팔라츠키를 비롯한 체코 정치가들은 제국의 정치적 상황이 신절대주의 시기보다 개선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중단했던 정치활동을 재개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1850년대 말부터 제국 내에서 꾸준히 거론되었던 ‘이중체제(Dualismus)’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그것을 막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 같다.5) 그러나 이들은 그들의 정치활동 범위를 보헤미아 지방에 국한했는데 그 이유는 제국 전역을 자신들이 지향하던 연방체제로 전환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주장이 계속 펼쳐질 때 이중체제의 논의가 더욱 가시화 될 수 있다는 우려도 했기 때문이다.6)

다민족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은 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슬라브 민족의 법적·사회적 지위향상에 대해 전혀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3월 혁명 이후 크게 대두된 민족문제해결의 저해요인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종국적으로는 제국해체를 유발시키는 결정적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사례를 통해 다민족국가 또는 어떤 사회에서 특정 민족이나 집단이 우선시 될 경우 어떤 상황이 초래되는지를 예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역사의 교훈적 기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1) 스메타나는 1874년 여름 숲 속에서 아름다운 플루트 소리가 들리는 환청을 느꼈고, 이를 토대로 자신의 대표작인 ‘나의 조국(Má vlast)’을 작곡했다. 모두 6개의 교향시로 구성된 ‘나의 조국’은 무엇보다도 보헤미아의 민족 음악과 애국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중 ‘높은 성’이란 뜻이며 과거 프라하의 옛 성으로 지칭되고 있는 제1곡인 ‘비셰흐라드(Vyšehrad)’와 우리들의 귀에 가장 익숙하면서도 유명한 제2곡 ‘몰다우(Vltava)’는 창작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완성해 그의 천재성을 회자시킨 작품이기도 했다. 
2) 페르탈러는 3월 혁명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제기된 구 오스트리아주의(Altösterreichertum)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빈 신문(Wiener Zeitung)’을 통해 그것에 대한 당위성도 부여하고자 했다. 페르탈러를 비롯한 구오스트리아주의자들은 이 기간에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Frankfurter Nationalversammlung)가 제시한 독일 통합방식을 반대했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우위가 독일권에서 계속 보장되는 방법, 즉 오스트리아 제국의 전역이 새로운 독일에 편입돼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3월 혁명이 끝난 후 페르탈러는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관료로서 재출발했다. 즉 그는 1852년 법무부 고문으로 취임했고 점차 빈 정부에 법률적 자문을 제공하는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페르탈러는 중앙정부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그것은 정부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는 쉬멜링을 보좌하면서부터 빈 정계의 실세인물로 등장할 수 있었다.
3) 이러한 선거제도의 도입으로 제국 신민의 6%만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4) 하원의 정원은 343명이었고 이 중에서 보헤미아 지방에 할당된 인원은 54명이었다. 그런데 이 지방의 소수 민족이었던 독일인들은 조세 능력에 따른 선거제도의 시행으로 34명의 대표를 빈 제국의회로 보낼 수 있었다.
5) 빈 정부는 그들이 프랑스와 피에몬테-사르데냐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세체니(A.Sźechenyí) 백작을 비롯한 일련의 현실적이고, 온건한 헝가리 정치가들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슬라브 화를 막는 방안으로 대두된 이원체제의 도입을 심도 있게 협의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행보를 예의 주시하던 팔라츠키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이중체제가 도입될 경우 다음의 유형 중에서 하나가 채택되리라는 관점을 피력했다. ①빈과 부더(Buda)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수도로 정하고 제국을 완전히 이분화시킨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상호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그들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 그렇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양국의 공동황제의 지위를 상실하지 않는다.〔군합국(Reine Pesonalunion)〕②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특별한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끔 공동헌법을 마련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양국이 독립국으로서 활동하는데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양국의 공동황제의 직무를 수행한다.〔부분적 정합국(Teilweise Realunion)〕③제국의 공통 사안이라 할 수 있는 국방, 외교, 재정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양국의회의 의원으로 구성된 제국의회를 적어도 1년에 한 번씩 빈과 부더를 번갈아 가며 개최한다. 그 이외의 국정 사안들은 양국 의회와 정부가 독자적으로 입안하고, 시행한다. 그리고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대외적으로 양국을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정합국(Volle Realunion)〕
6) 팔라츠키를 비롯한 체코 정치가들은 1862년 4월 개원된 제국의회에 참석했지만, 이들은 빈 정부가 제국의회를 통제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 제국의회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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