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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에콰도르 라파엘 코레아(Rafael Correa) 대통령의 정치경제 리더십

에콰도르 하상섭 한국외국어대학교 한중남미 녹색융합센터 연구교수 2013/11/19

들어가며

현재 3선 성공으로 2017년까지 재집권이 가능해진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은 좌파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는 정치 지도자이다. 전체 국민 투표에서 56.7%를 득표하며 재선에 성공한 코레아 대통령은 2017년까지 4년간 새로운 임기에 들어가게 됐으며 이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에 이어 집권 시기 10년을 넘기는 좌파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 2013년 현재 다소 젊은 50세(1963년 출생)로 개발경제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경제학자이자 정치 지도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력은 이전 정권인 알프레도 팔라시오(Alfredo Palacio) 정부에서 재정경제부 장관을 역임(2005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으며 2006년 무소속으로 출마해 에콰도르 56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이후 2008년 대통령 중임을 허용하는 내용의 에콰도르 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찬성 63.9%로 통과시키면서 장기 집권의 시나리오를 마련했다. 특히 2009년 신헌법에 따른 대선에서 승리(지지율 51.9%)를 했으며 2013년에는 3선에 성공해 2017년까지 대통령 임기를 연장 받았다. 그가 속한 알리안사 빠이스(Alianza PAIS) 정치연합이 대선과 동시에 치러진 총선에서 90석(총 137석) 이상을 획득해 원만한 정국 운영 조건도 조성되어 있다.

코레아 정부는 남미의 여타 좌파 정부들처럼 제일 중요한 무역 및 교역 파트너인 미국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미 2006년 에콰도르-미국 간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논의를 중단한 바 있으며, 2013-2017년 동안 다시 자유무역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은 적다. 한편, 에콰도르-미국 양국 간 유지되던 안데안(Andean)무역진흥과 마약퇴치법(ATPDEA) 협정이 2013년 만료됨에 따라 그동안 대미 수출 시 적용되던 특혜 관세가 2013년 폐지되어 대미교역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며 더 나아가 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상 역시 정체되어 있어 통상확대를 위한 획기적인 조치가 요구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반면 남미 좌파 정부들의 국제정치 및 대외관계와 비슷하게 베네수엘라, 이란, 중국 등 국제정치적 친분이 두터운 국가와의 관계는 강화되어 왔다.

코레아 정부는, 2008년 에콰도르의 외채에 대한 국제사회와의 협상에서, 국가 부채가 이전 정부의 몇몇 부패한 관료들에 의해 발생했기 때문에 코레아 정부 입장에서 갚을 수 없다고 지불 자체에 대한 불법화를 선언하고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채권자들과의 소송을 제기할 것을 공표하며 마찰을 빚기도 했다(30억이 넘는 외채를 지불 불이행 선언). 2009년에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이 주장한 ‘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Bolivarian Alliance for the Americas; 일명 ALBA)에 가입하는 등 점차 급진적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적으로는 에콰도르의 주요 사회문제인 빈곤율과 실업률의 감축 등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다.
 
유년 시절과 대학 생활을 통한 경제와 경제발전 인식

라파엘 코레아는 에콰도르의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인 과야낄(Guayaquil)의 노동자 계급 가문에서 출생했으며 그리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대학 생활은 사립대학인 ‘산티아고 데 과야낄 대학(UCSG)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1987년 졸업을 했다. 대학 시절 그는 경제·회계 및 경영학부(AEAA) 학생회장을 맡았으며, 학부 학생총연맹(FEUC) 대표와 1986년 에콰도르 사립대학 학생총동맹(FEUPE)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코토빡시 지방(Cotopaxi Province)의 줌바우아(Zumbahua)에서 살레지오 수도원의 미션 수행(원주민 공동체의 문맹 문제 해결)으로 1년 동안 유치원을 운영하기도 했으며1) 소액창업 기업들의 발전을 돕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코레아는 대부분의 에콰도르 안데스 지역 원주민 공동체들의 언어인 께추아어(Quichua)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배웠으며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와 더불어 4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1990년에는 벨기에의 류벤(Louvain: 벨기에의 중부 도시)에 있는 카톨릭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91년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당시에 배우자인 앤 말허비 고셀린: Anne Malherbe Gosselin을 만나 결혼했으며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다).  

 

코레아의 경제적 인식과 정계 입문
 
실제로 1993년 코레아는 에콰도르 교육문화부(MEC)에 들어가 미주개발은행(IDB)의 지원 하에 국가 교육 시스템 개선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에 미국 어바나-샴페인에 소재한 일리노이대학교(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1999년과 2001년에 경제학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같이 경제학을 수학한 동료들에 의하면, 코레아는 비록 “몇몇 관점에서 시장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결국 시장의 확대는 오직 부자들에게 집중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라틴아메리카 동시대 발전에 대한 세 가지 에세이’를 주제로 한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을 보면, 코레아는 라틴아메리카 경제 발전을 위한 구조 개혁은 1980년대에 제도화되기 시작했지만 지역 발전을 견인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분석한다. 좀 더 경제학적 관점에서, 1980년대 개혁은 성장을 이루어내지 못했고 특히 노동시장의 자유화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생산성 감소를 가져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2005년 코레아는 알프레도 팔라시오 정부 하에서 에콰도르의 재정경제부에 새로운 임무를 부여 받았다. 특히 빈곤 감축과 경제적 주권을 주장하면서 그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상에 회의적이었으며, 국제통화기금(IMF)의 제안을 거부하고 여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석유수입안정화기금의 변화에 따른 세계은행(World Bank)의 차관 제공 철회 당시 코레아는 재정경제부 장관직을 사임했으며, 이러한 그의 결정은 에콰도르 국민들로 하여금 코레아에 대한 정치적 신뢰성 구축에 도움이 되었다(57% 지지율). ‘국가의 자존과 주권 동맹(Alianza PAIS:Patria Altiva y Soberana)’ 운동을 창설한 그는 2006년 대선에 도전했으며 이 운동 조직의 설립 모토는 정치적 주권 확립, 지역통합 그리고 에콰도르 빈민들에 대한 경제적 구제였다. 그의 정치적 정체성은 휴머니스트, 기독교 좌파, 그리고 21세기 사회주의 전도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대선 공약을 통해 코레아는 에콰도르 헌법 개정을 위한 제헌의회 구성을 요구했지만 그의 지지 세력들인 Alianza PAIS 운동조직이 의회에서 입후보자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를 국민투표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후 에콰도르 공산당과 사회당 등 군소 정당들(민주인민당, 민주적 좌파, 빠차꾸띡: Pachakutik 그리고 에콰도르 Roldista 정당 등)과 연합하면서 정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원주민 공동체들의 정치적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코레아 정부 등장과 에콰도르의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의 상관관계

 

집권과 더불어 코레아 대통령은 석유 산업에 대한 개혁을 중심으로 경제정책 변화를 예고했다. 특히 석유에서 발생하는 세입으로 빈곤 계층을 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정부 지출의 증가와 더불어 탄화수소법에 대한 제도를 개선했다. 동시에 에콰도르의 석유개발에 투자하고 있는 다국적 해외기업들을 환경 및 투자 규제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강력히 비난했다(예를 들어 한 인터뷰에서 ‘해외 기업들이 석유 5를 생산하면 1만 에콰도르에 남고 나머지 4는 해외기업들이 취하는 구조’라고 맹비난).   

사회주의 관점에서 코레아는 지속적으로 사회평등과 지역 평등에 대한 대중 연설로 유명하다. 노동착취의 모든 형태를 제거할 것이며 자본보다 인간의 노동이 더 위에 존재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비난했으며 특히 2000년에 이전 정권이 채택한 에콰도르 통화의 달러화 정책에 대해 반대(기술적 에러)를 공표했다. 하지만 당장 이 달러화 정책에 대한 폐기는 당분간 뒤로 유보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코레아 대통령은 2007년부터 매우 급진 좌파적인 정치경제 전략을 펴 왔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나 볼리비아의 모랄레스와 같이, 코레아 대통령은 권력을 집중시키고 반대파와 대중매체 및 여론의 거슬리는 비판들을 비난하였으며 사회동원을 반-코레아 그룹들을 위협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기도 했다. 코레아 대통령은 또한 주된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헌법위원회를 소집하여 기존의 의회를 봉쇄하고 새로운 법안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2008년 9월 국민투표 승리로 승인된 이 새로운 헌장은 대통령 재선을 가능케 하여 코레아 대통령으로 하여금 잠재적으로 2017년까지 대통령직에 머무를 수 있게 하였다.

새로운 헌법은 또한 대통령의 권력을 확장시켰는데, 그에게 의회해산권, 헌법재판소 장악권, 미디어 통제권 등을 부여하였다. 게다가 새로운 헌법은 지방 시장으로부터 권력을 빼앗고 대통령에 의해 통제되는 새로운 지방정부를 만들어 다시금 중앙집권화를 꾀하였다. 코레아 대통령은 짧은 임기 동안 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을 엄청나게 증가시켰다. 한 예로, 행정부는 석유 수익에서 발생하는 정부의 지분을 50%에서 99%로 올리면서 기업들에게 재계약 협상에 나서도록 강요함으로써 석유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한편, 국가의 새로운 헌법은 토지 집중을 금지하고, 중앙은행의 자치권을 폐지하고, 석유, 광산, 통신 그리고 수도와 같이 전략적 부문에서의 정부의 역할을 증대시켰다. 코레아 대통령은 또한 정부지출을 2007년 98억 달러에서 2008년 132억 달러로 증가시켰다. 대통령은 심지어 원유가격이 낮을 때만 이용하도록 되어 있는 국가안정화 기금에까지 손을 대었다. 국가의 대외부채에 대해서 코레아 정부는 재정 및 금융 관료들에게 강경노선을 취하여 반복적으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라고 강요하였고, 이는 외국인 채권자들을 겁먹게 하여 에콰도르로 하여금 대단히 삭감된 수준에서 외채를 청산할 수 있게 하였다. 코레아 대통령은 또한 관세를 올리고, 수입 쿼터를 설정하였으며, 에콰도르의 WTO 가입국으로서의 위치는 유지하고 ATPDEA를 통한 기존 미국과의 무역 특권을 유지하려 하면서도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은 거절하였다. 마침내 2009년 6월, 코레아 대통령은 에콰도르가 미주를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Bolivarian Alternative for the Americas; ALBA)에 가입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차베스 대통령이 미주개발은행(Inter-American Development Bank)과 같은 친미적, 시장 중심적인 지역 조직을 상쇄하기 위하여 만든 경제 연합이었다. 따라서 코레아 행정부의 경제정책은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급진 정부 정책들과 공통점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결론: 라파엘 코레아의 정치적 리더십

 

이러한 강한 정부 개입주의와 경제적 민족주의 정책은 지금까지 혼합된 결과를 가지고 왔다. 국제적인 유가 상승으로 코레아 정부는 첫 번째 해인 2007년에 2.5%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2008년에는 5%로 증가하였다. 빈곤은 근 몇 년간 감소해 왔지만, 만일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고 유가가 하락한다면, 공공지출 감소로 인해(거의 절반 정도가 석유수입으로 오는 관계로) 빈곤 감축 및 사회복지 지출은 힘들어 질 것이다. 에콰도르가 달러화를 통화로 설정한 이후 별로 심하지 않았던 인플레이션은 2008년 급격하게 상승하여 2007년 3.3%에서 8.87%로 올라갔다.

코레아 정부의 급진적 정치 전략 또한 혼란스러운 결과를 야기하였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통령의 정치에 대한 갈등과 대립적인 접근 방식은 정치권의 분극화를 심화시키고 민주주의의 ‘수평적 책임성(horizontal accountability)’을 약화시켰다. 코레아 대통령은 또한 대중매체나 미디어 등 그를 비난하는 다른 정치인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하면서까지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상당히 후퇴시켰다. 포퓰리즘 관점에서 보면, 카리스마 있는 정치적 리더가 빈곤계층을 정치적으로 동원시켰는데. 이들은 전통적으로 정치 참여에서 소외당했던 원주민 공동체들이나 소외 계층들이었다. 게다가 코레아 정부의 정책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중적 인기가 높은데 바로 이점이 대중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만족도를 높여주고 있다. 라티노바로메트로(Lationobarometro)에 의하면, 2005년 14%의 국민이 민주주의에 만족한 것에 비해, 2008년에는 이 수치가 37%로 증가한 바 있다. 일종의 포퓰리즘 민주주의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코레아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정부의 공공지출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되며 특히 2013년 하반기 야수니 국립공원의 석유광구에 대한 정책을 생태환경 보존보다는 빈곤 감축을 위한 석유개발로 선회한 이후 공공 지출은 다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입쿼터제 확대, 개인에 대한 신용대출 억제정책 등을 통해 과열된 경기를 조절할 것으로 보이며, 정부 공공지출이 여전히 에콰도르의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지만, 지난 집권기간 만큼 큰 규모의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전망된다. 특히 에콰도르 경제를 지탱하는 국제 유가의 경우 현재 점진적인 안정화에 돌입하고 있어 정부의 투자 여력이 크게 증가하지는 않을 것이며(만일 하락의 경우는 더욱 큰 악영향 초래), 2008년 거의 30억 달러가 넘는 채권에 대한 디폴트 선언 이후 해외로부터 차관도입 여건도 악화되어 있어 향후 투자에 대한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정치적으로도 국가의 통제 강화 및 중앙집권화를 통한 수평적 책임성의 악화와 더불어 미래 경제발전 전망마저 불투명하다. 에콰도르 미래 정치경제 발전을 위한 리더십의 변화가 요구된다.

1) 살레지오 수도회는 1845년 Turin에 창설된 성인 프란시스 데 살레스(St. Francis de Sales)를 수호성인으로 받드는 수도회로서, 주로 전도와 교육 활동을 함.

 

참고문헌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wiki/Rafael_Correa

쿠트 웨일랜드(Kurt Weyland), 라울 마드리드(Raúl L. Madrid), 웬디 헌터(Wendy Hunter), 하상섭(역),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들: 성공과 실패의 정치경제학, 한국학술정보(주) 2013. 6월, pp. 331-32.

마누엘 메다르도 피초 카브레라, “라파엘 코레아의 에콰도르와 포퓰리즘 민주주의”, 트랜스라틴 21호 (2012년 9월) in http://translatin.snu.ac.kr/translatin/1209/pdf/Trans12092106.pdf

유성준(에콰도르 키토 무역관), “에콰도르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 3선 이후 정책방향 전망”, 2013-02-19 in http://www.globalwindo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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