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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남미의 개벽을 꿈꾸는 사람들

중남미 일반 박호진 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2013/12/19

  2013년 12월 말 현재, 우리 국내 정치나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정세가 그렇듯이, 중남미 각국들도 좌우 내지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 사이에 있다. 우고 차베스 사망 후에 베네수엘라의 좌파 상황도 녹록치 않고, 룰라의 뒤를 이은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앞날도 밝지만은 않다. 또 한편으로 정통여당의 복귀로 보수가 우세한 듯 한 멕시코에서도 뻬냐 니에또 대통령은 학생들과 좌파 지식인들의 강렬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이런 와중에 지난 11월에 국내 모 대학에서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 남미 3개국 대사들이 남미의 독립영웅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특강을 열었다. 3개국 대사들이 시몬 볼리바르의 생애, 그의 여성, 그의 사상에 관해 각기 다른 주제로 특강을 하였지만, 세 대사들의 특강의 기조에는 안데스 지역 국가들 사이에 요즘 핫이슈가 되고 있는 이른바 수막 카우사이(Sumak Kawsay: 잘 살기 또는 웰빙) 사상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다.

  에보 모랄레스가 볼리비아의 대통령이 되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수막 카우사이 사상은 에콰도르, 볼리비아, 페루를 중심으로 한 안데스 지역 국가들이 펼쳐온 원주민 운동(indigenismo)의 일환이다. 현재 수막 카우사이 사상을 주창하는 일부 사상가들은 원주민 운동 또는 원주민주의로 번역이 되는 스페인어 “인디헤니스모(indigenismo)”라는 단어가 그릇된 표현임을 지적하며, 과거 원주민주의와의 단절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 중 가장 지명도가 높은 조세프 이스터만(Josef Estermann)은 스페인어 "인디헤니스모(indigenismo)"가 어원상 "인디헤나(indigena)"에서 왔고, "인디헤나(indigena)"는 어원상 "인디오(indio)"와 별 차이가 없으며, "인디오(indio)"라는 표현은 스페인어로 “인도의”란 뜻이기 때문에 "인디헤니스모(indigenismo)"라는 말 자체가 넌센스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사상을 께추아어로 “잘 살기”를 의미하는 수막 카우사이 사상으로 불러 주기를 원하며,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표현도 서구인들이 붙인 명칭이기 때문에 남미 대륙을 아이마라어에서 비롯된 아브야-얄라(Abya-Yala: 아이마라어로 번영의 땅이라는 뜻 )로 불러주기를 원한다.

  국내에서는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 연구소에서 서구의 헤게모니에 대항하는 새로운 대안 사상으로 연구를 하고 있으며, 중남미, 특히 안데스 지역 국가들에서는 기존 철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사상에 기초한 대안학교들이 속속들이 생겨났으며 급기야 볼리비아에서는 원주민 출신 대통령이 당선되어서 볼리비아 헌법을 바꾸기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최근에 볼리비아를 방문한 볼리비아 정치 연구가 문남권 교수는, 실제로 볼리비아에서조차 수막 카우사이 사상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며, 반대세력도 많아 에보 모랄레스 이후 과연 볼리비아에서 진보적 흐름이 지속될지 의구심까지 갖게 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볼리비아 대사를 수행했던 안또니오 블라디미르 따보아다(Antonio Vladimir Taboada)씨는 헌법이 바뀌었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어도 수막 카우사이 사상은 유효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수막 카우사이 사상이 무엇인지는 에콰도르 대사가 특강 마지막에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를 인용한데서 알 수 있다:

“최고의 문맹은 정치적 문맹이다..........정치적 문맹자는 자신의 무지에서 창녀, 최악의 정치집단, 다국적 기업의 하수인이 나온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브레히트를 인용한 것 자체가 수막 카우사이 사상이 과거 중남미에 뿌리내렸던 사회주의 사상이나 원주민 운동과 다른 게 무엇이 있겠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안데스 지역 고유 사상의 전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수막 카우사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안데스 지역 원주민의 전통철학을 서구에서 비롯된 사회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과 차별화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수막 카우사이 사상의 핵심원리는 크게 4가지로 정리된다: ①관계성의 원리, ②상응성의 원리, ③상보성의 원리, ④상호성의 원리.
 

  사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관계성, 상응성, 상보성, 상호성이 모두 같은 말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이 4가지 원칙이 지극히 “관계”를 중시하고 결국 윤리적인 면을 말한다는 생각을 그칠 수 없다. 수막 카우사이 사상의 주창자들도 수막 카우사이 사상이 “함께 살자”는 정치 윤리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안데스 고유의 철학적 사유를 꿈꾸는 이론가들은 안데스의 건축물과 공예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십자 모양의 도안을 차까나(chakana)로 부르고 이를 바탕으로 서구철학과 다른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다.
   얼핏 보기에 서양의 십자가 모양처럼 보이는 차까나는 잉까 제국의 우주관과 사회 질서를 잘 보여준다. 일단 세상은 상하로 나뉘고 우리 동양 사상과 마찬가지로 하늘은 남성을, 땅은 여성을 상징한다. 또, 태양은 남성적이고 달은 여성적이어서 상하좌우를 중심으로 잉카제국은 네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우리 동양의 소음, 소양, 태음, 태양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일명 南십자가라고 불리는 차까나와 수막 카우사이의 4대원칙에 관해서 지면 관계상 더 언급은 할 수 없으나, 동서양의 철학과 구별되는 안데스 고유의 철학을 세우고 이를 실현하려는 안데스지역 주민들의 꿈이 야심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멸망한 잉카제국이 과연 이상사회였는가의 논란을 떠나, 지구 반대편에서 함께 잘 살자는 통합의 꿈을 염원하는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에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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