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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socialismus s lidskou tvář)

슬로바키아 / 체코 김장수 관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2014/01/08

2월정변(1948)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는 빠른 속도로 공산당에 의한 일당 독재체제로 바뀌었다. 이러한 독재체제는 독립적 권력 기구들의 견제 기능을 완전히 박탈했고 소수의 지배 계층은 헌법적, 법률적 책임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지위까지 확보했다. 당과 국가의 핵심 부서들은 노동자들로 교체되었고 내각을 비롯한 국가 요직에 임명되었던 소련 고문관 역시 초법적인 지위를 부여받았다. 특히, 군과 경찰에서 이들이 발휘한 영향력은 막강했는데 그것은 체코슬로바키아 정치가 소련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하겠다. 이렇게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국가권력을 독점적으로 장악한 이후부터 불법, 숙청, 그리고 체포는 공산주의 정권유지에 필요한 수단으로 부각되었고, 독재체제로의 전환과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위해서 강제와 전횡 역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주도로 시행된 국유화 경제체제가 실패로 끝나게 됨에 따라 책임자들에 대한 정치적 문책과 함께 과거 스탈린(J.Stalin) 체제시기에 수립된 지나친 중앙집중적 경제 시스템의 문제점에 대한 개선 방안 등이 논의대상으로 부각되었다. 1963년 초부터 개혁적 성향의 지식인들은 체코슬로바키아 경제에서 확인되던 구조적 문제를 공론화시키기 시작했다. 같은 해 2월 경제학자 셀루츠키(Seluck)는 중앙계획경제의 효율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계획의 우상화’를 ‘개인의 우상화’로 빗대어 계획경제와 스탈린주의를 동시에 공격했다. 또한 11월에 개최된 한 경제세미나에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개선책으로 시장경제원리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12월의 당 중앙위원회에서는 과학 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이었던 시크(O.Šik)가 소련경제모델대신에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혼합형을 제시하기도 했다. 시크의 모델은 1964년에 구성된 특별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다음해인 1965년 당 중앙위원회의 승인도 받았다. 이렇게 출범된 시크의 신경제모델은 중앙의 계획경제를 대폭적으로 제한하고 생산, 투자, 가격, 그리고 임금의 가이드라인만을 제시했다. 그리고 시크는 자신의 모델에서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른 생산 및 가격의 결정, 이윤의 추구와 임금의 차등화라는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했다.

1967년 6월 프라하에서 개최된 제 4차 작가동맹대회에서 쿤데라(M. Kundera)와 클리마(I.Klima)를 비롯한 일련의 작가들은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상황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금기사안이었던 공산당의 핵심 인물들에 대한 비난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특히 쿤데라는 당시 작가동맹의 회장이었던 헨드리흐(J.Hendrych)에 대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감행했는데 그것은 이 인물이 작가세계에서 자유주의적 성향이 증대되는 것과 공산당에 대한 작가들의 충성심이 이전보다 약해진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점차적으로 기존의 사회주의적 틀을 유지하려던 보수 세력과 새로운 정치 시스템 도입을 지향한 개혁 세력 간의 공개적 충돌이 야기되었다. 10월에 접어들면서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도 펼쳐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스트라호브(Strahov)기숙사의 열악한 시설에 대한 항의 과정에서 비롯되었다.1)

이 당시 동유럽의 맹주국 역할을 담당하던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발생한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 대해 심한 우려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소련 공산당 제 1서기 브레즈네프(L.Breschnew)는 1967년 12월 8일 극비리에 프라하를 방문하여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였던 노보트니(A.Novotn)와 독대를 펼쳤는데 여기서 그는  노보트니에 대한 자신의 지지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프라하 체류 중에 브레즈네프는 헨드리히, 둡체크(A.Dubčeck: 1921-1992), 도란스키(Doransk) 등과도 접촉했는데 여기서 그는 소련에서 성장하고 러시아어에 능통한 둡체크에 대해 큰 호감을 표시했다. 브레즈네프의 프라하 방문이후 노보트니는 결국 실각했고 그 후임으로 슬로바키아 공산당서기였던 둡체크가 1968년 1월 5일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 1서기로 취임했다. 2) 그러나 둡체크에 대한 브레즈네프의 기대와는 달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공공토론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정보자유도 확대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3) 즉 1968년 3월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개혁운동(reformní hnut)으로 검열제도는 폐지되었고, 이전의 정치적 실책들에 대한 비판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가 재건되었고, 새로운 사회단체들도 탄생했다. 민주적 사회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제시한 비공산당 앙가주 클럽(Klub angažovaných nestraníků)이 등장했고, 정치적 재판을 통해 숙청된 사람들이 K-231, 즉 231조 위반 정치범 집회라는 단체를 조직했으며, 사회민주당 역시 재창당에 착수했다.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교체 및 당 지도부의 변화가 있었고, 3월말에는 스보보다(L. Svoboda)를 대통령으로, 스므르코프스키(J. Smrkovsk)를 새 의장으로 선출했으며, 내각도 개혁파인 체르니크(O.Černík)가 주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보수파의 노보트니는 당과 정부 양쪽에서 실권하게 되었고, 체코 사회는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광범위한 개혁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른바 ‘프라하의 봄(Pražské jaro)’이 도래한 것이다.4)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개최된 공산당 전당 대회에서는 파격적인 행동강령도 제정되었는데 거기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socialismus s lidskou tváří)’를 지향한다는 것과 공산당의 권력 독점도 포기한다는 것이 언급되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체제는 민주적 사회주의체제의 새로운 모델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정치적 다원주의와 부분적 시장경제체제의 도입이 강조되었다. 이에 따라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들은 자신들의 조그만 가게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크리마(I.Klima) 주도하의 체코 언론도 전후 스탈린 시대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것은 1940년대 말부터 약 10년간 숙청되었던 인물들에 대한 복권요구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4월 24일 체르니크의 프라하 정부는 일련의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거기서는 검열제도의 폐지, 숙청된 희생자들에 대한 복권작업, 여행의 자유, 그리고 경제개혁을 추진한다는 것 등이 거론되었다. 이러한 개혁 시도에 대해 소련 및 그 위성국들은 동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확고한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1968년 5월 8일 바르샤바(Warsaw) 동맹국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물론 이 회의에는 둡체크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다. 거의 같은 시기 소련과 그의 바르샤바 동맹국들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참모훈련도 실시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6월 27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저명한 지식인 70명이 서명한 ‘2,000단어 선언(Dva tísce 2,000 slov)’이 공개되었다. 여기서는 정부의 개혁이 아직까지 사회의 하부구조까지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향후에도 개혁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아울러 공산주의 체제의 문제점들도 거론되었는데 그것에 따를 경우 공산주의 체제가 도입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정신적, 물질적인 퇴보만이 이루어졌으며, 경제적·정치적인 퇴행 역시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선언서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에서 만연된 상호간의 불신해소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성명에 대해 공산당과 프라하 정부는 부정적이었지만 일반 시민들은 지지하는 자세를 보였다.

소련 역시 ‘2,000 단어 선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얼마 안 되어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소련공산당의 핵심인물들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내정간섭의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7월 7일 소련과 그의 바르샤바 동맹국들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진행 중인 반혁명적 움직임에 대해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시 중단되었던 바르샤바 동맹국들의 군사훈련은 7월 29일부터 다시 시작되었고 그 규모 역시 확대되었다. 이러한 무력적 시위와 병행하여 동슬로바키아의 치에르나나트티소우(Čierna nad Tisou)에서는 바르샤바 동맹국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여기서 둡체크를 비롯한 개혁파 인물들은 소련과의 독대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코메콘에 대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책임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는 맹세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진행되던 개혁 프로그램의 포기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내부적 불일치에도 치에르나나트티소우에서는 언론 자유의 탄압, 정치적 집회 금지, 바르샤바 동맹체제의 지속, 그리고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 등이 강조되었다.

이후부터 체코슬로바키아의 위기적 상황은 점증되었지만 프라하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오히려 확산되었다. 8월 21일 소련, 폴란드, 동독, 헝가리, 그리고 불가리아 군으로 구성된 바르샤바 동맹군 500,000명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을 침범했는데 그 이유로 제시된 것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반혁명적 요소로부터 비롯되는 위협에서 구하겠다는 것이다. 5) 이러한 침범에 대해 프라하 정부는 적극적인 저항보다는 국권침해를 대외적으로 부각시키려고 했다. 이에 따라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하예크(J.Hájek)는 소련을 비롯한 바르샤바 동맹국의 자국 침입사건을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긴급의제로 상정시키면서 ‘무력사용은 어떠한 이유라도 정당화시킬 수 없다(Act of use of force which cannot be justified by any reason)’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와 병행하여 제 14차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전당대회가 8월 22일 프라하의 비소차니(Vysočaný)에 있는 체카데(ČKD), 즉 체코슬로바키아 콜벤-다네크(Českoslovaká Kolben Daněk) 기계공장에서 개최되었다. 모두 1,200 명에 달하는 대의원들이 참석한 비상전당대회는 둡체크의 정책을 계속 지지한다는 것과 소련과 그의 동맹국들의 침공에 대한 부당성이 강조되었다.6)

 그러나 8월 23일 둡체크를 비롯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핵심인물들은 모스크바로 압송되었고 거기서 이들은 소련의 요구들을 수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소련이 제시한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프라하 정부는 지금까지 추진한 제 개혁을 포기한다. 그리고 14차 공산당전당대회에서 결의된 사안들 역시 무효화시킨다는 것과 검열제도의 재도입이 거론되었다. 끝으로 바르샤바 동맹국의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주둔한다는 것도 언급되었다.

1969년 4월 17일 소련의 신임을 받던 후사크(H.Husák)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 1서기로 등장했다. 이에 따라 소위 반동(reakce)과 반혁명(kontrarevoluce)의 시기가 가고 ‘진정한 사회주의(období reálného socialismu)’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후부터 실시된 대규모 숙청(hromadné čistky)은 1971년까지 지속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약 50만 명의 공산당원들이 당원자격을 박탈당했으며, 군 지도부의 17%와 경찰간부의 30%정도가 교체되었다. 이후부터 후사크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소련과의 관계 강화에 치중했고, 이것은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다당제 선거가 합의되고 민주화가 진행될 때 까지 지속되었다.

우리는 어떠한 질서체제가 사회구성원의 동의 없이 등장할 때 그러한 질서체제가 설사 강력한 통치수단을 가졌다 하더라도 결국 붕괴된다는 사실을 40여 년간 지속된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회주의체제에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1)실제적으로 대학생들의 기숙사는 정전되는 경우가 많았고 저녁에는 공산당의 지침에 따라 전기가 강제로 차단되어 학생들의 불만은 매우 높은 상태였다.
2)둡체크는 4살부터, 즉 1925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에서 살았는데 1933년부터는 기계조립공으로 활동했다. 슬로바키아로 돌아온 그는 1939년 슬로바키아 공산당에 가입했고 그 이후부터 자신의 영향력을 점차적으로 확대시켰다.
3)이러한 상황변화에 대해 당시 프라하 주재 소련대사 체르보넨코(S. Trscherwonenko)가 1968년 1월 18일 소련 중앙정치국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진행되던 일련의 상황을 거론하고 제 2의 헝가리 사태가 발생될 수 있다는 우려도 표명했다.
4)원래 프라하의 봄은 체코 필하모니 결성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46년부터 매년 5월 프라하에서 개최된 음악제의 이름이었다. 전통적으로 개막일에는 스메타나(Smetana)의 ‘나의 조국’이, 폐막일에는 베토벤(Beethoven)의 ‘교향곡 9번’이 연주되었다. 그런데 체코사태 당시 한 외신기자가 ‘프라하의 봄은 과연 언제 올 것인가?’하고 타전한 이후 ‘봄’이라는 단어가 주는 자유적  이미지와 겹쳐 ‘프라하의 봄’이 체코 자유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부터 세계 각국에서 민주화운동이 발생하면 지명에 종종 ‘봄’을 붙이는 관례가 생겼다. 그 일례를 들어본다면 폴란드에서는 ‘바르샤바의 봄’이, 헝가리에서는 ‘부다페스트의 봄’을 들 수 있다.
5)소련은 내정간섭을 빌미로 1956년 헝가리에 대한 무력적 개입을 시도하여 당시 진행된 일련의 제 개혁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에 이번에도 무력이란 방법을 통해 당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체코슬로바키아문제해결의 롤(Role) 모델이 되었던 헝가리 개혁은 1953년부터 감지되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동유럽에서는 이 인물에 대한 격하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후르시쵸프(N.S. Khrushchev)의 ‘평화공존론’이 스탈린 시절 적대관계로 치달았던 유고슬라비아의 티토(J.B.Tito)에게 ‘사회주의로 가는 각자의 길’을 인정함에 따라 헝가리에서도 커다란 동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라코시(M. Rákosi) 공산당 서기장 하에서 1953년부터 수상직을 수행한 너지(I.Nagy)는 강제적인 중공업 발전정책을 포기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울러 그는 농업집단화 완화와 정치범 석방 등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한다는 계획도 제시했다. 이러한 시점에 폴란드의 포즈난에서 자유화운동이 전개되었고 이것은 부다페스트 대학생들이 1956년 10월 23일 노동자들과 더불어 시위를 펼치게 했고 여기에는 시민들과 헝가리군의 일부까지 참여하게 했다. 시위양상이 점차적으로 과격해짐에 따라 헝가리 공산당은 소련군의 투입을 요청했고 계엄령 선포와 함께 시민들에 대한 총격도 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시민군의 결성을 유발시켰고, 이후 혁명적 분위기가 헝가리 여러 곳에서 감지되기 시작했다. 헝가리에서 진행되던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소련은 본격적인 군사적 개입에 앞서 카다르(J.Kádár)를 당서기장에 임명한 후 사태수습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시민군들은 정부 기관을 점거하는 등 정부통제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이 당시 너지는 공산당이 혁명세력의 요구를 수렴하고 그것을 토대로 사태도 수습해야 한다는 견해를 카다르에게 전달했다. 뿐만 아니라 너지는 11월 1일 소련군의 헝가리철수, 국가보위부(Államvédelmi Hatóság)  해체, 그리고 다당제의 재도입을 요구했다. 같은 날 구성된 연립정부는 헝가리가 바르샤바 조약기구로부터 탈퇴한다는 것과 헝가리의 중립국화를 선언했다. 하지만 너지가 주도한 연립정부와 헝가리 시민들의 개혁적 전진은 여기까지였다. 헝가리 혁명의 파장이 동유럽의 다른 지역까지 확산되는 것을 우려한 소련은 군사적 개입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15만 명으로 구성된 바르샤바 조약군은 헝가리로 진격하여 부다페스트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이에 헝가리 혁명세력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일시 피신한 너지는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1958년 6월 16일 비밀리에 처형된 후 무명으로 매장되었다. 권력 장악을 확고히 한 카다르는 ‘피의 숙청’을 단행했고 그 과정에서 2천여 명이 처형되었고 2만 명 이상이 강제수용소나 감옥에 투옥되었다.
6)그러나 대다수의 슬로바키아 대의원들은 이 비상전당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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