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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오스트리아제국의 국가이상(Idea státu Rakouského)

중동부유럽 일반 김장수 관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2014/02/11

3월 혁명(1848) 이후부터 체코 정치계를 주도한 팔라츠키(F. Palacký)는 지금까지 자신이 제시한 정치적 제 관점을 보다 체계화시키기 위해 1865년 6월 ‘오스트리아제국의 국가이상(Idea státu Rakouského)’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는데 거기서는 다음의 것들이 언급되었다.1) 팔라츠키는 그의 저서에서 우선 ‘프랑크푸르트로 보내는 거절편지(1848)’에서 언급한 관점, 즉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Austroslawismus)를 다시금 거론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 내 슬라브 민족들이 제국으로부터 벗어나 독립 국가를 형성하려는 시도를 매우 위험한 행위로 간주했는데 그러한 것은 중부유럽의 세력분포에서 비롯된 것 같다. 실제적으로 이 당시 중부유럽에서 세력 확장을 꾀하던 러시아는 3월혁명 이후부터 그들의 주도로 슬라브 세계가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누차에 걸쳐 천명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제국 내 슬라브 민족들이 독립을 쟁취할 경우 이들 국가들은 바로 러시아의 표적대상이 되리라는 것을 팔라츠키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상황은 팔라츠키로 하여금 슬라브 민족들이 그들의 민족적 특성과 사회적․법적 지위를 보존하고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했고 거기서 주어진 질서체제인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판단도 하게 했다.2) 여기서 팔라츠키는 슬라브 민족들이 기존의 질서체제를 인정하고, 협조적인 자세를 갖추기 위한 선행조건도 제시했는데 그것은 빈(Wien) 정부가 중앙체제를 포기하고 새로운 질서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팔라츠키는 선행조건으로 연방체제(federacesystem)의 조속한 도입과 그것에 따른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간의 균형 있는 권력안배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빈 정부가 이러한 선행조건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자세는 아직까지 그가 빈 정부로부터 어떠한 양보 내지는 타협을 기대한데서 비롯된 것 같다.

다음으로 팔라츠키는 저서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1850년대 말부터 제국 내에서 거론되던 ‘이중체제(dvojková soustava)’의 문제점을 상세히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시행과정에서 야기될 위험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나열했다. 그에 따를 경우 이중체제는 독일 민족과 헝가리 민족을 제국의 지배 민족으로 승격시킬 것이고 이들 민족에 대한 슬라브 민족의 법적․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격하되는 문제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더욱이 팔라츠키는 이중체제의 도입으로 헝가리 민족의 지배하에 놓이게 될 라이타(Leitha)강3) 동부지역의 슬라브 민족들, 즉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그리고 루마니아인 들이 취할 행동을 거론했고 그러한 것은 결국 제국해체를 촉발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펼쳤다.4) 팔라츠키는 저서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에 이중체제가 도입될 경우 어떠한 상황이 전개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이중체제가 공포될 경우 범슬라브주의 역시 등장하게 되리라는 예측을 하면서 그러한 것은 일반인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나쁜 형태를 갖추게 될 것 이라는 관점도 피력했다. 그리고 그는 향후 어떠한 상황이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전개될 것인가를 예측하기도 했다. 여기서 팔라츠키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체가 필연적이고 그것에 대한 제국 내 슬라브인들의 우려 역시 예상보다 높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러한 것은 그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범슬라브주의의 탄생이 그들의 주관심 대상으로 부각된데서 비롯된 것 같다. 아울러 팔라츠키는 1861년 2월 19일 러시아의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가 공포한 농노해방령을 통해 러시아 역시 오스트리아 제국 내 슬라브 민족들의 권익향상을 현실화시켜 줄 대안세력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 판단도 했다. 즉 그는 당시 러시아에서 진행된 일련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희망적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5)

이어 팔라츠키는 향후 도입될 이중체제의 유형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빈과 부더(Buda)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수도로 정하고 제국을 완전히 이분화 시킨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상호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그들 국가를 운영할 수 있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f I)는 양국 공동 황제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지 않는다.〔군합국(Reine Pesonal- union)〕
②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특별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끔 공동헌법을 마련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양국이 독립국가로서 활동하는데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양국 공동황제로서의 직무를 수행한다.〔부분적 정합국(Teilweise Realunion)〕
③제국의 공통 사안이라 할 수 있는 국방, 외교, 재정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양국의회의 의원으로 구성된 제국의회를 적어도 1년에 한 번씩 빈과 부더를 번갈아 가며 개최한다. 그 이외의 국정사안들은 양국 의회와 정부가 독자적으로 입안하고, 시행한다. 그리고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대외적으로 양국을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정합국(Volle Realunion)〕

끝으로 그는 자신이 1848년 빈과 크렘지어(Kremsier) 제국의회에서 외교, 국방, 그리고 재정부분을 중앙정부의 고유권한으로 제시했음을 상기시키면서 이제 더 이상 그러한 것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따라서 그는 교역, 관세, 그리고 교통부분 마저 중앙정부의 권한으로 인정하려는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팔라츠키의 이러한 시도는 연방체제의 기본적 골격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의 세력균형을 파기하고 지방정부에 대한 중앙정부의 상대적 권한 우위를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것은 당시 제국 내 독일인들 사이에서 제기된 제국의 슬라브화를 불식시켜 주는 동시에 자신의 계획에 대한 이들의 동의를 얻어내려는 의도도 가졌다 하겠다.6)

‘오스트리아제국의 국가이상’에서는 위에서 거론된 것 이외에도 다음의 것들이 언급되었다.
①슬라브 민족의 민족적 특성, 즉 평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슬라브 민족과 항상 무력으로 주변 민족들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독일 민족의 팽창욕을 대칭시켰는데 그것은 팔라츠키가 헤르더(Herder)의 ‘인류사의 철학을 위한 개념(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der Menschheit)’에서 제시된 슬라브 민족에 대한 긍정적인 분석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팔라츠키의 이러한 주장은 1836년 8월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보헤미아사(Dějiny národu českého v Čechách)’를 비롯한 일련의 저서 및 논문에서 이미 거론된 바 있다.
②보헤미아의 역사, 특히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1526년부터 보헤미아 왕국사를 체코역사가의 관점(mínění)보다는 비교적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약술했다. 팔라츠키는 1848년 5월 프라하에서 개최된 제 1차 슬라브 민족회의에서 문서화된 보헤미아 국법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이것에 따를 경우 보헤미아 왕국의 영역이었던 보헤미아-모라비아-슐레지엔 지방은 분리 통치될 수 없고 보헤미아 왕국은 1526년의 합의각서와 1713년의 국사조칙(Pragmatische Sanktion)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등한 지위 및 권력을 가지기 때문에 이 왕국에 대한 빈 정부의 일방적인 조치는 아무런 법적 효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빈 정부가 이러한 조치들을 철회하지 않고  그러한 것들이 보헤미아 왕국에 속했던 지방들의 권익에 위배될 경우 이들 지방들은 그들 스스로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이탈할 권리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③1860년 10월에 발표된 10월칙령(Říjnový diplom)과 다음 해 2월에 공포된 2월헌법(Únorová ústava)의 내용들을 살펴보고 비교했다. 여기서는 특히 2월헌법의 문제점 내지는 불합리성, 예를 든다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권력안배에서 나타나는 모호성 내지는 모순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중앙집권적인 2월헌법이 오스트리아 제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의 통치에 부적절하고 오히려 주어진 상황만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팔라츠키의 ‘오스트리아제국의 국가 이상’이 출간된 이후 제국 내 슬라브 정치가들은 팔라츠키의 관점에 동의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당시 프라하에서 간행되던 ‘보헤미아(Bohemia)’와 ‘프라하 신문(Prager Zeitung)’은 팔라츠키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스트(F.Beust), 지스크라(K.Giskra), 피시호프(A.Fischhof), 베르게르(J.N. Berger), 그리고 회플러(A.Höfler) 등이 밝힌 부정적 견해를 게재하는데 적극성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이 신문들은 이중체제를 지지하던 헝가리 정치가들의 관점을 여과 없이 게재하는 등의 편파성도 부각시켰다.

팔라츠키는 공개석상에서 독일 언론 및 정치가들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분노를 표시했다. 아울러 그는 독일인들의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일간지 ‘국민(Národ)’을 통해 언급했는데 그에 따를 경우 독일정치가들이 자유주의적인 관점이나 입헌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이들은 그들의 특권만을 견지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7)

팔라츠키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빈 정부가 제국 내 민족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제국의 해체는 필연적이라고 했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그의 추종세력들은 그러한 관점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오스트리아 제국은 팔라츠키가 예상한 것처럼 해체의 수순을 밟았고  우리는 이것을 통해 민족문제가 다민족국가에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에도 불구하고 다민족국가에서 민족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 속성, 즉 소유욕과 권력욕이 불변한데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1) ‘오스트리아제국의 국가이상’은 모두 8편의 논문과 부록으로 구성되었는데 그것들은 이미 친팔라츠키 성향의 ‘Narod’(국민:1865.4.9, 4.12, 4.16, 4.20, 4.26, 5.3, 5.10, 5.16)에 게재되어 구독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유발시킨 바 있었다.

2) 로마교황 유리우스 2세(Julius Ⅱ)가 펼친 친베네치아 정책은 팔라츠키에게 큰 감명을 가져다주었고 그것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정립하는데도 기여했다.

3) 오늘날 부르겐란트(Burgenland)에 위치한 라이타 강은 1867년 중원체제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도입될 때 그 기준점이 되었다. 즉 빈 정부는 이 강의 서부지역인 씨스라이타니엔(Cisleithanien; Předlitavsko)을 통치하게 되었고, 부더 정부는 이 강의 동부지역인 트란스라이타니엔(Transleithanien; Zalitavsko)에 대한 독자적인 지배권을 획득했다.

4) 이중체제가 오스트리아 제국이 도입되기 이전부터 헝가리 정치가들, 예를 든다면 언드라시(J.Andrássy)백작은 이중체제가 도입될 경우 그들의 통치지역에 거주하는 슬라브인들을 자의적으로 지배하겠다는 의지를 공공연히 밝히곤 했다. 여기서 그는 헝가리의 지배하에 있는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그리고 루마니아 인들은 민족(nemzet)이 아닌 혈연적 집단내지는 종족(fajta, fajzat)에 불과하다라는 펌하적인 발언도 했다.

5) 1864년 러시아의 정치가 사마린(J.F.Samarin)이 프라하를 방문했다. 이 기간 중 그는 팔라츠키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팔라츠키는 그에게 ‘앞으로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성숙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성숙할 경우 제국 내 슬라브 정치가들은 언제라도 러시아와 협력할 자세가 있음을 그가 우회적으로 밝힌 것 같다.

6) 팔라츠키는 이를 통해 제국 내 독일인들이 가졌던 기득권의 일부를 인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7) 이 당시 팔라츠키는 브륜(Brünn)으로 학술여행을 떠났는데 거기서 그는 딸 마리에(Marie)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팔라츠키는 자신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감증대 및 슬라브 인들과 독일인들 사이의 반목심화 등을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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