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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태국 헌재의 총선 무효 판결. 돌파구인가, 도화선인가

태국 박경은 한국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 - 2014/03/27

 지난 해 11월부터 본격화된 태국의 반정부 시위가 다섯 달 째에 접어들고 있다. 백만명이라는 숫자로 태국 시위의 역사를 새로 쓰며 방콕 도심을 들썩이게 했던 일명 “호루라기 시위대”가 지난 21일 태국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다. 지난 2월 2일 치러진 총선이 “같은 날 전국적으로 시행되지 않아 무효”라고 판결된 것이다. 방콕 도심의 룸피니 공원에서 헌재의 판결을 주시하던 반정부 시위대는 또 다른 승리를 자축하며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와 함께 웅크리고 있던 세력들이 다시금 움직임을 시작하는 모습이 포착되고 있다. 

사실 총선 이후 다소 시들해진 호응 속에서 반정부 시위대는 장기화된 시위로 시민들이 본업으로 복귀하면서 백만 단위에서 수십만, 수만, 그리고 수천으로 눈에 띄게 그 규모가 줄어들고 점차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던 차였다. “룽깜난(면장 아저씨)”의 친근하고 순박한 이미지로 백만명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대를 거리로 이끌었던 쑤텝 트억쑤반 전 부총리 겸 전 야당의원의 인기도 시들해진 것이 사실이다. 총선 당일인 2월 2일 시위대들의 선거장 입장 방해로 9만 3천여개의 투표소 가운데 만여개 이상의 투표소에서 투표가 취소되고 2월 23일로 예정됐던 보궐 선거 역시 제대로 치러지지 못하고 선거관리위원회가 연기를 거듭하던 상황에서, 지난 3월 21일 헌법재판소의 선거 무효 판결이 난 것이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선거 무효 판결에 대한 일부 개탄의 목소리도 무시할 수 없다. 선거권을 행사한 이천만 유권자들의 목소리가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고, 선거에 투입된 38억 바트의 예산은 “기껏 만든 양념장(남프릭)을 강에 풀어 흘려보낸 격”으로 허비한 셈이다. 또 한편으로는 가장 민주적인 선거라는 방법으로는 승리할 수 없어, 결국 또 다시 사법부의 손을 빌려 상황을 전환을 맞게 된 야당과 반정부 세력들에 대한 개탄이다.
 
   집권여당인 프어타이당과 친 탁씬 레드셔츠 세력은 이번 무효 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번 헌재의 판결이 근거로 삼고 있는 헌법 108조에 대해 이 조항이 “전국적으로 같은 날 동시에 실시하는 것으로 규정”하도록 하는 조항이며 당일 날 어떠한 돌발 상황이 일어날 지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또한 이번 선거가 한 날 한시에 치러지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은 반정부 시위대의 방해 때문인데 상기 행위에 대한 처벌에는 관심이 없고, 또 책임기관임에도 방조적인 자세로 뒷짐을 지고 있는 선거관리위원회는 반정부 시위대의 방해 행위를 통제하지 못했음에도(내지는 통제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이러한 책임론에서 배제된 채 모든 화살이 정부를 향해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일부는 이번 판결을 선례로 하여 앞으로 단 하나의 선거구에서라도 선거를 방해하여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으면 그 선거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다며 이것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체되어 있던 태국의 정국에 이번 헌재의 총선 무효 판결은 과연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안타깝게도 현재의 상황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반정부 시위대는 헌재의 무효 판결이 또 다른 승리인 듯 자축하며 다시 거리로 나와 시위를 재개하였다. 시위대는 선거 이전에 정치 개혁과 국민의회 구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헌법에 명기되어 있지 않은 과도 의회격인 “국민의회”라는 기관의 구성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 구체적인 대안은 불분명하며, 이것이 위법이고 비민주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또한 이와 함께 탁씬 친나왓 전 총리 세력의 축출을 꾀하기 위하여, 헌법 제7조에 입각한 총리 임명을 청하고 있다. 쉽게 말해 국왕의 총리 선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중도 성향의 총리를 임명하여 국민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지난 2006년 탁씬 전 총리를 몰아내기 위한 옐로우 셔츠의 반정부 시위가 한창일 당시에도 제기되었으나 무산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헌법 제7조에 따라 총리가 임명된 경우가 한번 있었다. 바로 1973년 10월 14일 민주화 운동 당시 군부독재의 타넘 낏띠카쩐 장군이 총리직을 사퇴한 후 싼야 탐마싹이 총리가 되는 과정에 이 조항이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하였거나 내각이 모두 공석이 되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 조항이 적용될 확률은 거의 없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푸미폰 국왕도 모든 것은 법에 따라 진행되어야 함을 강조함으로서 가능성을 배제한 바 있다.

이렇듯 설득력과 정당성이 부족함에도, 야당이 가장 민주적이고 적법한 방법인 선거를 보이콧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방콕과 중부 지역 중산층 및 남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야당이 북부와 동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탁씬 계열 정당과 대결할 때 마다 상대적인 수적 열세로 선거에서는 매번 참패를 맛보았기 때문이며, 이는 한편으로 탁씬에 대적할만한 카리스마 있는 야당 지도자의 부재라는 사실과도 연관 지을 수 있겠다.

   한편 여론을 주시하며 웅크리고 있던 레드셔츠는 이번 헌재의 판결로 오히려 시위의 기회를 획득한 듯 판결 직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특히 지난 2008-2009년 레드셔츠 시위를 이끌었던 주축 세력인 짜뚜펀 프롬판이 시위대의 수장으로, 나타웃 싸이끄아가 사무총장으로 다시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방콕 최도심 지역이 마비되고 군경과의 충돌로 백여명이 사망했던 최악의 시위를 진두지휘했던 인물들의 재등장은 레드셔츠가 공격적인 움직임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짜뚜펀 프롬판은 시위대에게, 헌재의 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도를 표현하기 위하여 레드셔츠 대신 블랙셔츠를 입고 시위에 참여하자고 종용했다. 이렇게 레드셔츠(혹은 앞으로 블랙셔츠)들의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방콕 도심에서 집회를 벌이고 있는 반정부 시위대와의 충돌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태국인들의 정서상 폭력 사태는 최대한 피하려 하겠지만,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들의 불편을 고려하여 임시로 룸피니 공원에서 진을 치고 있던 반정부 시위대와 잠잠하던 레드셔츠들이 다시 거리로 나오고, 방콕과 치앙마이 등 대도시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테러성 공격들이 태국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주변국이나 다른 나라로 돌리고 있으며, 이와 함께 바트화의 강세로 인한 수출 악재로 태국의 경제 성장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 실시되는 총선은 아무리 빨라도 5월 내지는 향후 삼 개월 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며, 탁씬 전 총리를 두고 찬반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무사히 총선이 실시될 수 있을지 조차도 미지수이다. 태국의 정정 불안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이며, 이번 헌재의 판결이 정치적 갈등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지 주시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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