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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벨벳혁명(Sametová revoluce)

슬로바키아 / 체코 김장수 관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2014/04/16

 일반적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등장한 이데올로기들은 낙관적 성향을 가졌다. 따라서 사람들은 인류의 진보가 필연적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거기서 이들은 인류의 창조적 힘을 갑자기 그리고 결정적으로 해방시켜 줄 상황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기대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그러한 상황이 도래할 경우 사회는 그 자체의 자제력 때문에 그동안 정부가 행사한 ‘강제적 악’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게 되리라는 확신도 가지게 되었다. 공산주의 역시 이러한 긍정적 구도에 동의했지만 그러한 것이 곧 실현되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그것은 이 주의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통해 인류를 혁명적으로 구제하겠다는 기존의 폭발적인 과정대신에 장기적이고 고된 투쟁을 선택한데서 비롯된 것 같다. 이후부터 공산주의는 무계급적 유토피아 세계를 맞이하게 되리라는 약속대신에 고통스럽고 자기 헌신적인 기간을 거쳐야만 프롤레타리아가 승리할 수 있다는 수정적 견해를 제시했는데 이것은 이 주의가 변화된 현실적 상황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체제의 잔존세력을 분쇄하고 풍요로운 미래사회의 경제적 기초가 굳건히 잡힐 때까지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무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즉 공산주의체제가 확고히 구축될 때 까지 중요한 권한 모두는 특별히 훈련된 당에 귀속되어야 하고 이 당은 가장 잔인한 규율마저 실행하는 능동성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뚜렷한 정치적 목표의식을 가진 동유럽 및 중부유럽의 공산주의체제는 냉전의 상대방인 서방으로부터의 공격과 같은 무력이 아닌, 즉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압력이 아닌 자체적 문제점으로 인해 스스로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붕괴에는 그 체제에 속한 사람들의 정신적 타락도 일조했다. 공존과 공생이라는 사회주의적 이상이 사라지고, 상호간을 감시하거나 훔쳐야 하는 인간성파괴라는 상황 하에서 체제를 유지시킨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외양상 드러나 보이는 것처럼 당과 국가의 지시 및 구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른 구호처럼 이른바 ‘노동에 영광을’ 더 많이 주는 정직한 노동일수록 그 대가는 더 적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훔치지 않는 자는 자신의 가정을 훔친다(kdo nekrade, okrada vlastni rodinu)’라는 또 다른 구호에 동의하는 자세를 보였다. 모두가 훔치지 않고서는 살아 나갈 수 없다는 뜻의 이 문구는 사회윤리뿐만 아니라 노동윤리에도 적용되었다. 국영기업이나 협동농장에서 사람들은 건성으로 하는 노동과 적당주의 노동으로 비축한 힘을 개인적 부업이나 별장이나 텃밭의 경작지를 위한 주말노동에 투여함으로써 국가와 공공에 돌아갈 노동을 훔쳤다. 점차적으로 사람들의 크고 작은 별장들과 당 간부들의 대규모 별장들은 국토의 구석구석을 잠식했고, 지방민들 역시 주말별장이나 텃밭의 건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이후 사람들은 금요일만 되면 그들만의 작은 식민지인 별장으로 떠났고 그것은 도시를 공동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별장을 개축하거나 별장내의 텃밭을 일구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의 직장 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과 자신의 안식처는 소중히 생각하면서도 공공주택 단지의 복도와 거리가 더러워져도 남의 일로 방치해 버리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는데 이것을 지칭하여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공중의식 황폐화’라 한다. 그리고 평등의 공산주의 사회라지만 모두가 적당주의 노동으로만 임금을 받는 것도, 모두가 똑같은 임금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와 같은 특수계층을 포함하여 최소의 노동으로 최대의 임금을 받던 계층이 있는 반면 광부들처럼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박봉에 시달리는 계층도 있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술, 상점에서 구입이 어려운 소비재, 상부로부터의 영향력행사, 의료기술  등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특수 그룹을 구축한 후 서로 도왔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자신의 직장을 훔치고 국가경제를 훔치는 소위 지하경제의 토대가 되었다. ‘진열대 위에는 없어도 진열대 아래에는 있다(co nebylo na trhu, bylo pod pultem)’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훔치기는 만연되었고, 지하경제는 모든 것을 제공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커졌다. 이제 정치적 탄압이라는 채찍의 대가로 제공하는 인간성의 파괴와 환경의 파괴라는 당근은 당근이 아니라, 결국 종말을 재촉하는 죽음의 독 뿌리였고 그것은 경제 및 체제파탄을 유발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체제에서 부각되던 이러한 문제점들은 인접 동유럽 국가들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들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더욱 심화되었고 그것들의 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관점도 제기되기 시작했다. 

 

 실제적으로 1985년 3월 11일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고르바초프(M.Gorbatschow)는 개혁(perestrojka)과 개방(glasnost)정책을 통해 공산주의체제가 안고 있던 문제점들을 해결하려고 했다. 고르바초프의 이러한 시도는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던 동유럽 및 중부유럽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결국 1989년 경제 및 사회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 동유럽혁명이 발생했고 동유럽 공산주의의 마지막 보루였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그러한 징후가 점차적으로 감지되기 시작했다.1) 1989년 11월 17일 나로드니 트리다(Narodni Trida) 광장에서 나치독일에 대한 항거 50주년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개최되었고 거기에는 약 15,000 명의 대학생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들 중의 일부가 후사크(H.Husák)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펼쳤고 그것은 경찰의 과격한 개입을 유발시켰다. 여기서 적지 않은 학생들이 부상당하는 상황도 초래되었다.2) 후부터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 및 동조적 파업이 프라하(Praha)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그것은 결국 후사크 정권을 붕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3) 1989년 12월 10일 프라하에서는 국민화합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찰파(M.Calfa)를 비롯하여 반체제 운동조직인 ‘시민포럼(Občanské fórum:OF)’과 ‘폭력에 반대하는 시민단체(Veřejnost‘ proti násilíu: VPN)’의 지도자들, 비정당인, 군소 정당 당원, 그리고 반체제운동에 가담한 공산당원들이 참여했다. 

 

 1948년 이후 40년 만에 찾아온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는 선거를 통해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모두 23개의 정당과 정치연합들이 참여한 1990년 6월 8일과 9일의 연방의회 및 민족회의 선거에서 개혁을 주도한 ‘시민포럼’은 체코 지역에서 약 53%의 압도적인 지지를 획득했다.4) 슬로바키아 지역에서도 ‘시민포럼’의 슬로바키아 측 파트너로서 역시 개혁의 주역이었던 ‘폭력에 반대하는 시민단체’가 승리함으로써 민주세력의 승리와 민주주의의 출발은 확실해졌다.5) 이에 반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약 13%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이것은 체코-모라비아 공산당(komunistická strana Čech a Moravy:KSČM)결성을 통해 그들의 실추된 위상을 증대시키려는 시도도 펼치게 했다.
 
 1990년 7월 5일 그동안 반체제활동을 주도한 바츨라프 하벨(V.Havel)이 새로운 이름으로 탄생된 체코와 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Česká a Slovenská federativní republika)의 대통령으로 선출됨에 따라 40년간 유지된 공산주의 정권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6) 대통령으로 선출된 하벨은 1991년의 신년사에서 자신을 비롯한 체코슬로바키아 인들 모두가 전체주의적 정치체제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그러한 질서체제에서 파생된 제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언급했다. 이어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인 들이 도덕적으로 건강하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가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그에 따를 경우 체코슬로바키아 인들은 개선적 방향을 생각하고, 제시하기 보다는 단순히 기존 질서체제의 제 문제점만을 거론하려는 자세, 즉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보다는 남들의 행동이나 질서체제에서 문제 원인을 찾으려는 나쁜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벨은 체코와 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이 이러한 도덕적 황폐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방안도 제시했는데 그것은 그동안 등한시한 인문주의적 또는 민족주의적 전통을 하루 빨리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진행된 혁명적 변화는 이웃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비단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게 진행되었다 하여 ‘벨벳혁명(Sametová revoluce)’ 혹은 ‘비단혁명’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혁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는 오랜 전제주의체제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체제로 전환했으며, 국가명도 기존의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Československa socialistická republika: ČSSR)대신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 변경되었다. 이 당시 체코 측은 국호 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Československá federativní republka:ČSFR)으로 바꾸려 했으나 슬로바키아 측의 반대로 실현시키지 못했다.

 

 벨벳혁명을 통해 등장한 체코와 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은 지난 40년간 존속된 전체주의체제를 가능한 한 빨리 청산하려고 했다. 또한 이 연방공화국은 뿌리 깊은 중앙통제체제를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전환시키는 과제도 부여받았는데 이것의 이행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7) 그리고 구질서체제의 청산에서 비롯된 정치적 문제들과 국가경제사유화에 따른 생산성저하, 물가폭등, 그리고 실업증대 등은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 인들 사이의 대립, 즉 민족분쟁을 유발시켰고 이것은 점차 연방공화국의 존속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한 국가에서 예기치 못한 급박한 상황, 즉 혁명과 같은 상황이 초래될 경우 혁명의 주체세력은 그러한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대안제시보다는 급변적 상황에서 야기되는 후유증내지는 문제점해결에 급급하게 되는데 벨벳혁명에서도 그러한 것이 표출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벨벳혁명을 교훈삼아 향후 발생될 수 있는 긴박한 제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을 신속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1) 1985년 체르넨크에 이어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70년대 이후부터 지속된 경제적 침체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경제 및 사회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것이 바로 페레스토로이카였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 11월 29일 프라우다에 <사회주의사상과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기고문을 투고했는데 거기서 그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나름대로 명확히 정의했다. 그에 따를 경우 페레스트로이카는 당과 지도부의 발의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많은 언론들이 페레스트로이카를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평가하면서 역사적 비교 및 대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페레스트로이카가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것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만일 ‘위로부터의 혁명’을 수용할 경우 소련 사회를, 위에서 지도하는 ‘상부’와 그의 사상과 지시 그리고 명령을 수행하는 ‘하부’로 나누게 된다는 것이 고르바초프의 분석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고르바초프는 농업 집단화를 지향하던 스탈린(Stalin)에게나 어울리는 개념이 바로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의 밑바탕에 ‘하부’가 있고 꼭대기에 지도자가 있는 권력 피라미드에 관한 스탈린의 구상이 구체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르바초프는 그러한 구상 자체가 현재의 소련이 배격하는 권위주의적 체계의 반영이고, 스탈린주의의 반민주적 이념의 표현으로 보았던 것이다. 즉 새로운 사고가 아니라 낡은 사고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민주주의적 방법에 의해, 인민을 위해 실현되는 하나의 혁명 과정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당은 인민과의 관계에서 인민의 정치적 전위대로 행동한다. 당이 발휘하는 주도성과 역사적 선도성은 당의 전위적 역할의 당연한 표현이다. 또한 당은 탐구의 권리를 독점하지 않는다. 누가 발의했든가에 유익한 것이기만 하다면 그 어떤 것도 페레스트로이카에 필요하다. 왜냐하면 페레스트로이카의 생명력은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에 달려 있으며, 민주주의의 기능은 특히 인민의 창의성과 자발성을 자극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2) 브레즈네프 독트린(Brežněvova soktrína)에 따라 바르샤바 동맹군이 1968년 8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침범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실세로 등장한 후사크는 1969년 4월 17일 친소련 정부를 출범시켰다.
3) 1987년 12월 후사크를 대신하여 야케시(M.Kakes)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 1서기로 등장했지만 이 인물은 당시의 상황을 극복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4) 시민광장은 1989년 11월 19일 하벨과 크리잔(J. Křižan)을 비롯한 일련의 반정부 인사들이 프라하 극장에 모여 공산주의체제가 붕괴된 이후 도입될 새로운 질서체제에 대한 논의를 했다. 여기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역할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언론의 자유를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것 등이 강조되었다.
5) 시민단체는 이 선거에서 32.5%의 지지율을 획득했다.
6) 하벨은 ‘프라하의 봄’이 한창 진행되던 1968년 봄, ‘반대의 주제에 대해’라는 글에서 공산당의 권력독점체제에 대한 대안정당의 필요성을 제기한 젊은 극작가였다. 그는 권력의 독점이 바로 진리의 독점을 의미하고 그것은 결국 진리를 가장한 허위를 제시하는 가공할 삶적 상황을 창출하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프라하의 봄’이 실패로 끝난 이후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침묵하거나 또는 망명을 선택했지만 하벨은 1975년 ‘프라하의 봄’을 짓밟았던 당시 대통령 후사크에게 공개서한을 보냈 뿐만 아니라 1977년에는 인권침해에 대한 대안제시를 목적으로 ‘77헌장그룹’을 주도하기도 했다. 1977년 1월 1일 프라하에서 발표된 ‘77헌장’에서는 1975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조인한 인권 및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 권리에 대한 구제협정인 ‘헬싱키 조약(Helsinki Accords)’을 프라하 정부가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 거론되었다. 아울러 여기서는 지식과 사상의 권리, 신앙의 자유, 도청 및 가택수사의 철폐 등이 요구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하벨은 1979년부터 1983년 까지 ‘국가전복죄’로 복역했으며 그의 작품은 동유럽 개혁이 있기 전 까지 출판은 물론 공연도 금지되었다.
7) 이 당시 정권의 주체였던 체코의 ‘시민광장’이나 슬로바키아의 ‘폭력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는 이러한 문제들을 효율적으로 해결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는데 그것은 이들 정당이 공산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힘을 합친 다양한 집단의 복합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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