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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카자흐스탄의 러시아인 공동체 형성과정과 특성

러시아 / 카자흐스탄 김상철 한국외대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2014/05/23

2013년 말부터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초기 이슈가 우크라이나의 EU통합과 관련된 요구들에서 최근에는 러시아계 주민들의 러시아 합병내지는 대폭적인 자치권 부여가 쟁점으로 부각된 국제적인 갈등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다. 크림반도 지역은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합병을 결의하여 그 과정이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고, 이외에도 일부 우크라이나 남동부 지역에서도 주민투표를 통한 러시아로의 편입 내지는 우크라이나에 잔류하면서도 자치권의 확대와 관련된 여러 갈등 양상들이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특히 러시아 편입 내지는 자치권 확대와 관련되어 그 입장과 태도가 주목받고 있는 집단은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러시아를 역사적인 또는 실질적인 조국으로 여기는 2000만 명의 러시아계 주민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크라이나의 뒤를 이어 구소련 권 국가들 가운데 러시아계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다른 국가들에서도 이런 양상이 나타날 가능성 역시 언급되고 있다. 중앙아시아와 관련되어서는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계 주민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재현될 것이라는 일부의 예측이 있기도 했는데, 단순히 러시아계 주민들의 규모와 거주라는 외양적인 측면만을 본다면 이는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는 시나리오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국가 가운데 특히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계 공동체가 형성되어온 배경과 맥락을 살펴보면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계 주민들의 러시아 합병요구가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카자흐스탄의 러시아계 공동체 형성과정과 특성을 통해 카자흐스탄 러시아인 공동체의 특수성과 안정성을 살펴본다.

1. 러시아인의 카자흐스탄 이주 및 공동체 형성 및 확대과정 
 
러시아인의 카자흐스탄 이주 및 정착은 제정러시아의 카자흐스탄 진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러시아의 카자흐스탄 영토 식민화는 크게 3단계로 이루어졌다. 최초 단계는 18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제정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활동에 앞장섰던 제정러시아 코사크 군대에 의한 식민화, 두 번째 단계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농업 이주, 세 번째 단계는 소련시기 러시아인의 노동 이주였다.

1820년대 이후 카자흐스탄 영토에서는 러시아인을 중심으로 하는 슬라브계 이주민의 정착지대가 확대되기 시작했고, 현재 러시아 우랄과 시베리아의 카자흐 유목민 거주지역내에 러시아인 농촌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835년 이후 제정러시아의 행정구역이 현재의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새로이 제정러시아의 통치를 받게 된 유목민 지대에 마을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후 이 지역으로는 오렌부르그, 첼랴빈스크 및 트로이츠끼 지역의 농민들이 이주했는데, 이들에게는 일종의 경제적인 특혜가 부여되었다. 1820-1850년대에는 슬라브계 이주민들이 오늘날의 북부, 중부, 동부 카자흐스탄 스탭지대에 정착하였으며, 현재의 카자흐스탄 지방행정구역과 거의 일치되는 행정단위가 형성되었다. 이후 이를 기반으로 러시아인이 중심이 되는 정착공동체가 옴스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세미팔라친스크, 우스찌까메노고르스크 등에 형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정러시아는 1822년 4월 10일 러시아계 이주민들을 위해 유목지대 토착민들의 토지 분할을 골자로 하는 특별 법령을 발표하여 유럽러시아 지역들 및 카자흐스탄 북부지역으로 러시아 농민들의 이주를 더 촉진시켰다. 카자흐스탄 북부와 동부 지역의 러시아계 이주민을 위한 농업 정착지는 유목민이 이용했던 초원지대를 몰수하여 확보하였다. 이후 1870년대 초반까지 카자흐스탄 전체 인구에서 슬라브계가 차지하는 비율은 8.25%로 확대되었다.

19세기전체와 20세기초반까지는 슬라브계 민족들이 카자흐스탄 영토 전체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특히 북서부, 북부,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러시아인을 비롯한 슬라브계의 거주지대가 밀집하여 형성되었다. 19세기 및 20세기 슬라브계 이민의 사회적인 구성에서 나타나는 것은 농업이민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카자흐스탄의 러시아인 공동체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급격히 성장하였다. 이 시기에 유럽지역 러시아 농민들의 대량 이주가 이루어졌다. 1897년에 카자흐스탄에는 54.4만 여명의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전체 인구의 12.8%를 차지하고 있었다. 1906년부터 1912년 사이에는 대략 50만 명의 러시아 농부들이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소비에트 혁명이 일어났던 1917년에는 카자흐스탄의 러시아인이 전체 인구의 30% 정도에 해당되는 1백만 명 수준으로 늘어났다. 

러시아인들의 이주양상은 소련시기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1918년 시작되어 1931년까지 지속된 바스마치 운동은 당시 카자흐공화국의 일부지역에도 영향을 주어서 토착민인 유목민 집단과 이주민인 러시아인 또는 우크라이나인 농부들 간에 민족 갈등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이로 인해 수천여명의 러시아인 정착민들이 카자흐인에 의해 희생되었고, 이러한 희생에 대한 보복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나타났다. 또한 소련초기 토착화정책이 시행되던 시기에 카자흐스탄의 러시아인들 가운데 일부는 소비에트 카자흐공화국이 실시했던 카자흐어와 카자흐 문화의 장려 정책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결국 토착화 정책의 희생양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소련체제 초기의 연방 구성 단위들간의 영토 재조정과정에서 1925년에는 그 이전까지 러시아연방공화국의 우랄 및 시베리아주들에 속해있었던 러시아인 공동체들이 북카자흐스탄주, 아크몰라주, 악토베주, 서카자흐스탄주, 파블로다르주, 코스타나이주, 동카자흐스탄주로 관할이 변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현지 영토 조정 및 이전에 반대하는 현지 러시아인들의 의견은 배제되었고, 오히려 이들은 맹목적인 민족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기에는 소련의 유럽령 공화국 지역으로부터 피난민이 유입되었고, 유럽러시아 지역에 위치한 많은 산업시설들 역시 카자흐스탄으로 재배치되면서 많은 러시아인들의 비자발적인 유입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유입자들은 카라간다, 제즈카즈간, 테미르타우 및 에키바스투즈 등의 주요 산업시설 및 지하자원 매장지 인근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규모를 확대시켰다. 1955년에는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종사자들을 위한 바이코누르 타운이 형성되었는데, 특히 바이코누르 지역은 카자흐스탄 독립이후에도 러시아와 카자흐스탄간 합의에 의해 카자흐스탄 내에서 러시아의 특별행정구역으로 지위가 부여되어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은 공업화 과정에서 러시아인들의 유입은 계속 확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스탈린의 뒤를 이어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된 흐루시쵸프에 의해 처녀지 개간운동이 추진되면서 러시아인을 중심으로 하는 슬라브계 민족들의 카자흐스탄 유입 흐름이 부활했다. 1960년대 말이나 1970년대 초까지도 카자흐스탄의 산업시설로 직장을 배치 받은 러시아인들이 이주하게 되면서 카자흐스탄의 러시아인 공동체는 계속 확대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1979년 카자흐스탄의 러시아인 규모는 550만 명을 넘었고, 전체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2. 카자흐스탄 독립이후의 변화
 
소련체제 말기 발틱 공화국들에서부터 시작된 소련구성 공화국들의 변화는 개별 공화국의 이른바 토착민족주의 및 독립요구가 강해지는 양상으로 표출되었으며, 결국 소련은 구성공화국들의 주권선언 및 독립선언에 의해 붕괴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구성공화국들 가운데 가장 늦게 주권선언 및 독립선언을 했던 카자흐스탄에서는 독립 이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카자흐스탄의 미묘한 민족간 균형체계를 평화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1990년대에 카자흐스탄을 떠났는데, 이는 직접적으로는 자신들에게 소련시기와 같은 사회 및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기회나 환경들이 독립된 카자흐스탄에서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영향을 주었다.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이후 카자흐스탄 정부는 카자흐스탄의 국가적인 속성은 카자흐임을 재확인할 뿐만 아니라 카자흐어와 카자흐 문화 장려를 목표로 하는 카자흐화 정책을 채택했다. 이러한 정책의 일부분은 1993년 헌법과 1995년 개헌 헌법에서 카자흐스탄을 카자흐 민족의 민족국가로 규정한 정부의 결정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1994년 카자흐스탄은 독립후 최초로 의회 선거를 실시했는데, 이 선거에서 당시 카자흐스탄의 인구 구성 비율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카자흐인 후보자들이 당선되는 비율이 러시아인 후보자가 당선되는 비율보다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이러한 카자흐인 정치인의 비율이 월등히 높게 나타난 것은 정부가 선거구를 임의로 조정하는 형태로 선거에 의도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이를 러시아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영향력의 희생을 통해 카자흐 민족이 지배하는 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실제 생활영역에서 러시아인들이 배제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고, 독립카자흐스탄에서의 내부 민족관계에 긴장을 초래했던 직접적인 요인은 바로 카자흐스탄 정부의 언어정책이었다. 독립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는 카자흐어를 국가 공식 언어로 채택했고, 러시아어는 민족간 의사소통어로 지정되었지만, 국가 공식어와 같은 형태의 지위는 부여되지 않았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카자흐스탄 정부는 각급학교에서의 교육이 카자흐어로도 진행되도록 했고, 모든 공공 부문 직업에서 카자흐어의 능통한 구사를 필수요건으로 내걸었는데, 이는 전면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 많은 러시아인들은 반대하고 공식적인 이중언어주의(bilingualism)을 주장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정부의 언어정책에 대해 많은 러시아인들은 독립이후에도 러시아어가 여전히 정부와 기업에서의 의사소통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카자흐어 중심 정책은 불공정하다는 견해가 다수였다. 대부분의 카자흐인들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반면 카자흐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러시아인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정책으로 인해 공공부분 대부분의 유망 전문직종에서 러시아어 사용자 대다수가 배제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이러한 여러 가지 흐름들은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인들의 영역이 소련시기와는 달리 축소되고 배제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당대뿐만 아니라 자녀세대에서 사회적인 기회들이 상당한 정도로 축소될 것으로 우려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우려는 카자흐 민족성을 강조하는 카자흐스탄의 새로운 언어 및 교육 정책으로 현실화되었다. 따라서 1990년대 초반 카자흐스탄에서는 러시아인을 중심으로 당시 카자흐스탄 인구를 고려할 때 상당한 규모의 유출이민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회적인 변화로 인해 1999년 러시아의 카자흐스탄인 규모는 1989년 인구센서스 규모와 비교하여 대략 30% 정도 하락하여 대략 180만 명 정도 감소했다.  1994년에는 대략 34만 명이 카자흐스탄을 떠나 러시아로 이주하였으며, 1990년대 중반이후에는 감소세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감소세는 2000년대 초반 러시아의 인구공백을 해소하려는 러시아 정부의 재외러시아인 귀국 정책에 의해 일시적으로 짧은 기간 반전되기도 했다. 2000년대 초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카자흐스탄 러시아인 공동체 대표들을 만나 이들이 카자흐스탄에서 처해 있었던 상황을 파악하는 모임을 개최하였다. 이 모임은 당시 카자흐스탄에 남아있던 러시아인들이 러시아 귀국을 고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실제 러시아인들의 이주는 그리 활성화되지 않았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애초의 구상과는 달리 이에 소요되는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 규모가 확대되지 않았고, 러시아로 이주했던 경우에도 상당수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되돌아왔다.

이 당시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로 이주한 러시아인들의 대부분은 러시아공화국에서 태어나고 교육 받은 후에 주로 공업 관련 전문직 종사자로 직업적인 이유로 소비에트 카자흐스탄에 배치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도시에 거주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집단들이었다. 반면 제정러시아 말기 당시 변방 신흥지역이었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한 러시아인들의 경우에는 이미 카자흐스탄에서 정착한지 2-3세대가 지나고 있었고, 거의 대부분이 농촌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지닌 러시아인들은 2000년대 초반의 러시아 이주를 거의 선택하지 않았다. 이들이 현재 카자흐스탄 러시아인 가운데 2/3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1/3 정도가 카자흐스탄을 떠났지만, 2000년대 중반 상당수는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13년 기준으로 카자흐스탄 인구의 20%에 해당되는 대략 340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으며, 1990년대 초반 및 2000년대 초반 러시아로 이주하여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후 카자흐스탄으로 되돌아온 러시아인들도 상당한 인원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1)

3. 카자흐 러시아인 공동체의 특성과 전망
 
제정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 이후 시작된 러시아인의 카자흐스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이주 및 정착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에 의해 활성화 및 확대되었다. 가장 먼저 러시아인을 중심으로 하는 슬라브인 공동체의 카자흐스탄 이주를 촉진시킨 것은 1861년 제정러시아가 실시한 농노해방령이다. 이 시기의 농노해방령은 당시 후발산업화 및 근대화를 추진하던 러시아의 입장에서 경제적으로 새로운 시장관계의 발전을 위한 조건의 형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농노해방이라는 법적인 개혁을 통한 농노의 해방이 실제와 지주와 농노관계에서 실질적인 해방을 가져올 수 있을 정도의 효력은 가지지 못하고 있었고, 러시아 중부 흑토 및 러시아 남부지역의 사회경제적인 반대정서를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아울러 새로이 농민이 된 이들에게 분배될 수 있는 토지가 당시 제정러시아 본토 내에서는 거의 확보가 어려웠다. 따라서 해방된 농노출신 농민들을 제국의 동부 변방지대로 식민 정착시키는 것은 변방지대의 안정화 측면, 국가 조세원의 안정적인 확대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농민 및 경제적으로 해방된 이들의 이주가 카자흐스탄의 북부, 서부, 중부 그리고 남동부 지역으로 장려되었고, 이는 새로이 제정러시아에 속하게 된 지역에서는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슬라브계 이주민 사회가 제정러시아 당국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또한 제정러시아의 이러한 이민 장려정책은 지정학적인 측면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제정러시아와 청나라간의 국경선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문제가 되고 있었던 남알타이 및 자이산 분지 전역에 대해서는 이 지역이 러시아로 귀속되기 위해서는 러시아인들의 집중적인 이주가 필요했다.

또한 러시아인의 중앙아시아 이주와 관련되어 카자흐 민족이 거주하고 있던 유목지대에 대한 제정러시아 행정구역으로의 편입 및 러시아계 이주 농민들에게 공급하기 위한 토지의 조성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이는 유목민들이 이용하고 있었던 유목지 이동의 범주를 축소시킴으로 인해 가능해졌다. 카자흐 민족이 차지하고 있던 유목지대에서는 이른바 정착문명권에서 행해지던 농경중심의 생활패턴이 존재하지 않았고, 유목 중심의 경제활동 패턴 자체도 느슨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목과는 다른 경제활동 패턴이 공존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중앙아시아 남부 이른바 정착지대로의 러시아계 농민들의 이주는 거의 불가능했는데, 이는 이른바 정착지대에서는 기존의 농경패턴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농경 구조를 붕괴시키지 않고는 이주하는 러시아 농민들을 위한 토지의 확보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촌락은 제정러시아에서 이주해온 농민들이 주로 제정러시아의 국경 요새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이들에게 고기를 공급할 수 있는 공급자가 요구되고 있었다. 따라서 특히 1730년대부터 제정러시아의 통치를 수용한 카자흐의 소쥬즈와  중쥬즈의 유목민 공동체들에서는 경제여건에 따른 유목형태를 변화시켰다. 기존 유목민 생업중심의 유목체계가 육류를 공급하는 대량 가축사육의 형태로 진화했고, 이는 유목민 내에서도 그 규모에 따라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들은 제정러시아말기 카자흐 땅에 이주한 러시아인들에 대해 카자흐인들 역시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반면 농경위주였던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영역에서는 이러한 경제적인 측면의 협력패턴은 형성되기 어려웠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 지역은 농경구조가 이미 정착되어 있어서 새로운 농경민 집단의 유입이 어려웠고, 따라서 제정러시아 말기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농촌지역에서 우즈베크인들과 새로이 정착을 위해 이주한 러시아인들이 협력 및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이러한 사회 및 경제적인 측면에서 나타난 카자흐 러시아인의 카자흐 유목민 영역내로의 정착과 카자흐인과의 안정적인 관계는 그 이후에도 이어지게 되는데, 대표적인 사례는 소비에트 카자흐공화국 시기 러시아인들의 사회적인 영향력이다. 소비에트 카자흐공화국 통치구조에서 러시아인이 차지하고 있었던 사회 및 정치적인 위상을 살펴보면 카자흐 러시아인은 이른바 역사적인 모국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보다는 자신들의 조상들이 2-3세대 이전에 정착한 카자흐공화국에 더 많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카자흐의 러시아인들이 카자흐 땅에 확고히 정착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향은 1980년대 중반에 드러나기도 했는데, 1980년대 중반 소련체제의 개혁개방을 주도했던 고르바초프 서기장 시절 소련공산당은 개혁정책의 일환으로 장기집권 중이었던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 쿠나예프를 교체하기 위해 지속적인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기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이는 당시 카자흐공화국공산당 및 내각에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인들 상당수가 다른 공화국들과는 구분되는 사회적,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나예프가 소련연방공산당의 최고 권력기구인 정치국 국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했지만, 쿠나예프 이전 카자흐공화국 제1서기들보다는 좀더 많은 권한을 소련공산당 차원에서 행사할 수 있었고, 따라서 카자흐공화국의 제2서기 임명과정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비러시아계 연방공화국의 제2서기로는 러시아인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각자 근무하게 될 공화국과는 과거에 어떠한 연계나 연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반면 카자흐스탄의 경우에는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제2서기로 근무했던 A. G. 코르킨, 코르킨의 뒤를 이어 80년대 중반까지 제2서기로 활동했던 O. S. 미로쉬킨은 자신들의 직위에 임명되기 이전에 이미 카자흐 공산당 조직에서 오랫동안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자흐공화국의 주공산당위원회 차원에서도 제1서기 임명 과정에서 러시아인 지방공산당 제1서기들은 다른 비러시아계공화국 지방 공산당과 비교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카자흐공화국 외부에서만 충원되지는 않았고, 지방공산당 제1서기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전 경력상으로 카자흐 당 기구와 관련이 되어 있는 경우였다.

또한 1985년과 1986년 쿠나예프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고르바초프가 카자흐 공산당으로 보낸 러시아인들 역시 모두가 카자흐공화국 출신이었고, 제26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 중앙위원회에 카자흐공산당 출신 카자흐인 10명 이외에도 러시아인 6명이 포함되었다. 이는 비러시아계 연방공화국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났던 비연고지 러시아인 기용패턴과는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부분으로 이는 그만큼 카자흐공화국에서 태어나고 경력을 쌓은 러시아인 집단이 많았음을 반영하는 현상이었다. 이들은 소련연방정부와 카자흐공화국의 입장이 상충되는 경우에 카자흐공화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다. 이는 결국 카자흐공화국에서 형성된 러시아인 공동체의 형성과정과 배경, 그 구성원이 이웃한 우즈베크공화국의 러시아인공동체 형성배경, 구성원과는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제정러시아 시기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영역으로 유입된 러시아인들의 대부분은 농업이민 성격으로 정착을 위해 이주한 경우가 많은 반면,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영역으로 유입된 러시아인들의 대부분은 당시 투르키스탄 총독부와 연관되어 지배층이나 총독부 관리의 자격으로 파견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들은 임기가 종료되면 원래의 러시아 영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정착해서 사는 경우에도 현지인 공동체와 커뮤니티를 형성하기 보다는 러시아인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흐름은 소련시기에 들어와서도 이어져서, 타슈켄트에는 이른바 러시아인 거주 구역이 비공식적으로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현지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러시아인의 규모 역시 최초 러시아인의 이주배경에서부터 나타난 카자흐 영역과 우즈베크 영역 거주 규모의 격차가 그대로 유지되어 여전히 카자흐 공화국에 다수의 러시아인이 거주하였고, 1990년대 초중반 중앙아시아에서 나타난 러시아인의 대량유출 이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패턴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역사적인 측면에서 카자흐스탄의 러시아인은 제정러시아 시기의 최초 이주 및 정착과정, 그리고 소련시기를 거치면서 카자흐스탄에서 기반을 공고히 하였고, 이는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러시아인 공동체들에서는 발견되고 있지 않은 특징이기도 하다. 소련붕괴 이후 독립한 신생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에서 러시아인 공동체는 급격하게 감소하는 상황이 나타났지만, 카자흐스탄에서는 이러한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는 카자흐인 공동체 자체가 제정러시아말기와 소련시기를 거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통적인 유목생활 양식을 포기하고 러시아식의 정착패턴을 수용하게 되면서 러시아식 생활패턴, 러시아어 사용 등이 카자흐 문화 저변에 많이 흡수되어 있었다. 따라서 강력한 카자흐 민족주의 내지는 카자흐화의 추진에 대해 카자흐인 공동체 내부가 이를 능동적인 지지하거나 이의 확산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따라서 정부의 공식적인 카자흐화 추진과 관련된 여러 정책발표들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양상에서는 카자흐화와 관련된 정책들은 느슨하게 추진되었고, 그만큼 카자흐스탄의 비카자흐인들이 문화나 언어적인 측면에서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는 여력은 실질적으로 유지되어오고 있다.

이러한 인구학적인 측면, 공동체 형성의 배경 측면과 아울러 카자흐스탄의 경제가 2000년대 초반부터 급성장하게 되면서 카자흐스탄의 러시아인 공동체는 존립의 기반을 더욱 안정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경제성장과 아울러 2000년대 중반부터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경제공동체 설립 프로젝트에 카자흐스탄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는 카자흐스탄 러시아인들의 안정화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유라시아경제공동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구체화된 관세동맹은 이미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간 양국 국민 및 재화의 자유로운 이동, 실질적인 내국민 대우 같은 조치들의 실시로 구체화되었고, 더욱 심화된 통합을 위한 조치들이 계속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카자흐스탄 러시아인들이 체감하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간의 관계 긴밀화는 카자흐스탄 러시아인의 카자흐스탄 유출 이민 유발요소들을 완전히 해소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울러 이는 일부에서 언급된 최근 우크라이나 러시아인 공동체가 보여주고 있는 분리와 러시아로의 합병 요구 같은 상황이 카자흐스탄의 러시아인 공동체에서도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은 카자흐 러시아인의 카자흐스탄 이주 및 정착, 그 이후의 공동체 안정화과정, 카자흐스탄 독립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의 정책 등을 고려해볼 때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1) 이와 관련되어 러시아연방에서 대통령선거나 의회선거가 있을 때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20여개가 넘는 국외선거구와 투표소가 러시아인들이 전통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설치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카자흐스탄 내에 설치되는 러시아연방의 국외선거구와 투표소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국적자로 일시적으로 카자흐스탄에 거주하고 있는 러시아 시민권자들 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서 러시아로 이주하였다가 러시아 국적 취득 후 카자흐스탄에 되돌아온 러시아인들을 위해 설치 및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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