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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부탄의 저주받은 자들, 부탄 난민 롯샴파

부탄 정호영 자다푸르 대학 사회학 박사 2014/07/13

인도, 파키스탄, 네팔, 스리랑카 등의 분쟁을 접하면서 남아시아 내 어디에 평화로운 땅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신혼여행지로 알려진 몰디브 또한 독재자 가디움이 30년간 집권을 했고 독재는 끝났지만 기후 변화로 이번 세기에 사라지는 것을 알고 있다면 몰디브는 평화로운 곳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지난 칼럼 ‘지구 온난화로 사라지는 신혼여행지의 민족 이주 문제’참조) 그래도 부탄은 티베트 불교를 다수의 국민이 믿고 있고, 국민총행복지수를 강조하는 나라니 평화롭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로운 나라로 알려진 부탄 내에서 끔찍하게 저주받은 사람들이 있다. 부탄 내의 네팔을 기원으로 둔 종족인 롯샴파(Lhotshampa)이다. 1990년대부터 부탄 정부는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네팔 기원의 종족인 롯샴파를 티베트 불교 문화와 정체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불법 체류자들이라는 것이 그 근거였다. 그러나 이들이 불법 체류자라면 원래 살던 나라가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어디에도 돌아갈 고국이 없는 사람들이다. 네팔과 부탄 정부는 몇 차례 이 문제를 논의하기는 했으나 아무런 진척이 없다. 이런 추방 결정은 네팔 기원의 롯샴파가 점점 늘어나면서 부탄이 네팔과 부탄 사이에 놓여 있던 시킴 왕국의 선례를 따라갈 것이 두려워서 나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시킴(Sikkim)은 인도의 주들 중에서 유일하게 네팔 기원의 종족이 다수 종족인 주이다. 시킴의 원주민들은 14세기에 티베트의 캄 지역에서 이주를 해온 부티아(Bhutia)와 극동에서 왔다는 렙차스(Lepchas)로 티베트 불교를 믿지만, 힌두교를 믿는 네팔인들이 이주를 통해서 시킴 내에서 다수 종족이 되었다. 시킴은 1975년까지도 인도의 영토가 아니라 영국의 보호령으로 왕국이 유지되고 있었다. 네루는 시킴을 영국의 보호령으로 조심스럽게 유지했지만, 1964년 그가 죽고 1966년 수상이 된 그의 딸 인디라 간디는 시킴이 영국의 보호령으로 왕국이 유지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첫 번째 재임기간(1966년-1977년) 중에 시킴은 인도에 속하게 되었다. 다수 종족인 네팔 종족을 대변하는 시킴 국민회의는 1970년대부터 왕정 폐지를 외치며 선거를 요구했고, 1973년 왕궁 앞에서의 이들의 시위는 인도의 보호를 공식적으로 요청하게 만들었다. 1962년 중국-인도 전쟁의 악몽이 가시지 않은 인도로서는 중국이 시킴을 점령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시킴이 중국에 의해 점령되면 인도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부탄 왕국과 네팔 왕국에 영향을 미쳐 북동 7주까지 위험해질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인도는 시킴 왕국의 수도였던 강톡을 점령하고 인도의 주가 될 것을 요구했다. 1975년 국민투표로 이를 결정하기로 했는데 인도의 22번째 주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이들은 국민투표 기간동안 체포되었다. 인도의 총칼 앞에서 치뤄진 국민투표 결과에 의해 시킴은 인도의 주가 되었다. 시킴 국민회의는 인디라 간디 정권의 실세였던 아들 산제이 간디에 의해 강압적으로 인도 국민회의에 합병되었고, 최후의 왕이었던 팔덴 통덥(Palden Thondub)은 1982년 미국에서 죽었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시킴과 부탄을 비교해보자. 부탄의 왕실은 네팔종족들이 이주를 통해서 시킴에서 다수 종족이 되어 시킴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았다. 또 부탄 왕실이 본 것은 네팔 기원의 종족이 이끄는 시킴 국민회의가 선거를 요구하고 봉기가 이어지면서 인도가 개입해 그 왕족이 권한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부탄 왕실은 네팔 기원의 종족이 점점 더 늘어나서 부탄 왕실이 시킴 왕실의 전철을 밟기를 원하지 않았다.

부탄에서 네팔 기원의 종족을 롯샴파라고 불리는데 부탄의 공식어인 종카어로 남부사람들(southerners)라는 의미이다. 이들이 부탄 남쪽으로 이주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네팔인들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부탄의 남부에서 아무도 살지 않는 땅에 농지를 경작하기 위한 계약노동자로 부탄으로 이주를 시작했고, 1930년이 되었을 때 영국 식민 당국의 조사에 의하면 이미 6만 명에 이르렀다. 롯샴파들은 부탄왕실이 인도의 지원 아래 1961년 부탄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도로와 수력 발전소를 건설할 때도 이주해왔다. 부강한 나라 부탄을 만들기 위한 5개년 계획에는 이주노동자들이 필요했다. 롯샴파는 부탄인들이 살지 않는 황무지를 개척하고 부탄인들이 꺼려하는 일들을 하기 위해서 부탄으로 왔다. 부탄인들이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제공해주기 위해 불교도인 부탄인들이 꺼려하는 도축을 누군가 해야 하는데 그런 일들이 롯샴파의 일이다.1975년 시킴이 인도로 합병된 이후 1988년 부탄 왕실은 부탄 남부에서 인구조사를 해서 약 십만 명의 추방자들을 걸러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롯샴파로 인구의 1/6에 해당한다. 부탄에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 때 근무했던 미국인 리사 나폴리는 부탄에서의 삶을 [행복한 라디오]란 책에 남겼는데 부탄에 대해 많은 부분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부탄의 저주받은 자들인 롯샴파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적었다.

“네팔 의상을 입고 다니는 이들은 체포와 구금을 당했다. 또한, 네팔계 부탄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남부 지역의 학교는 폐교된 뒤 감옥으로 개조되었다. 이들은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했고, 남자들은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한 채 감옥으로 보내졌으며, 여자들은 군인들에게 강간당했고, 그들이 살던 집은 불살라졌다.”

인도는 부탄 문제에 있어서 중립적이지 않다. 인도는 부탄 난민들인 롯샴파를 네팔 국경까지 실어주고, 네팔 국경에서 시위를 하는 롯샴파를 진압하는 일을 해왔다. 부탄에서 발전되는 전기의 85%는 인도로 보내진다. 수력 발전에 의한 수입은 부탄 국가 수익의 45%이다. 부탄의 국토 중 1/4이 자연보호 지역인 것은 부탄의 수력 발전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소규모 발전인 것과 관련이 있다. 상류 취수구에서 물을 퍼 올려서 도수로를 통해서 하류의 발전소까지 물을 흘려보낸다. 최대 수출품목인 수력발전은 숲이 없으면 가능할 수 없다. 울창한 숲은 여름 동안 내린 비를 저장하여 조금씩 내뿜어 겨울에도 강물이 고갈되지 않게 한다.

인도는 부탄을 시킴 왕국처럼 합병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인도는 부탄의 외교권을 가지고 있기에 부탄의 주권의 일부를 형식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부탄은 인도가 부족한 전력을 공급해주는 나라이다. 남아시아 8개국이 회원국으로 있는 SAARC(남아시아 지역협력연합)에서 인도와 문제가 없는 나라는 부탄 뿐이다. SAARC에서 당당히 한 표를 행사하는 부탄을 시킴처럼 합병하면 그 소중한 한 표는 사라진다. 부탄의 관광지인 도출라 고개에는 드룩 완갈 사원과 108개의 불교사리탑이 있는데 부탄이 인도 반군을 인도군과 같이 소탕하고 전사한 군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승리한 기념으로 세운 사원과 불교사리탑이다.
 
2008년 부탄의 첫 선거에 나선 두 정당 평화번영당과 국민민주당은 당연히 친 왕실 정당들이었다. 평화번영당은 실세가 국왕의 삼촌이었고, 국민민주당은 국왕을 오랫동안 섬긴 가문 출신의 용포 그옌 같은 고위 공직자가 실세였다. 어느 정당도 왕실이 직접 지시를 내려서 생긴 부탄 난민 문제는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부탄인민당(BPP) 같은 정당은 아예 정당 명부에도 등록을 할 수 없었다. 부탄왕실이 부탄 입헌제 군주국을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상상했을 때 부탄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면서 살아온 네팔 종족인 롯샴파들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인도의 신임 수상인 모디는 취임 후 첫 방문국가로 부탄을 방문해서 두 나라 간의 형제애를 강조했고 인도로 전기를 보내기 위해 새로 건설될 수력 발전소의 머릿돌을 놓고 왔다. 중국의 영향력이 남아시아에서 점점 커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인도는 부탄 방문을 시작으로 남아시아에서 맹주로서의 자리를 다시 찾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번 방문에서도 부탄의 저주받은 자들인 롯샴파들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남아시아의 공식적인 정치 무대에서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이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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