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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카렐 4세 (Karel IV)

체코 김장수 가톨릭 관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2014/11/19

1311년 룩셈부르크(Lucemburská) 가문 출신의 얀 루쳄부르스키(Ján Lucemburská:1311-1346)가 하인리히 7세(Heinrich VII:1274-1313)에 이어 체코 국왕으로 등극했다. 등극한 직후부터 얀 왕은 보헤미아 및 모라비아 귀족들과 대립했고, 거기서 그는 귀족들의 우위권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리게 되었다.1)이에 따라 얀 왕은 왕권제한을 명문화시킨 칙령을 발표해야 했고, 귀족들은 향후 국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얀 왕이 발표한 칙령에는 구체적 경우에만 신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것과 체코 왕국 이외의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질 경우 귀족들은 국왕과 더불어 출정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이 명시되었다. 또한, 상속인이 없는 귀족들의 토지와 재산이 국왕 및 영주에게 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들 및 딸의 직계 상속만을 허용한 기존의 상속권을 형제 및 그 자손들의 방계까지 확대시킨다는 것과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각 지방의 고위 공직자들을 해당 지방의 인물들로 충원시킨다는 것 등도 거론되었다. 실제적으로 이러한 칙령발표 이후 귀족들의 권한은 더욱 증대되었고, 그것은 얀 왕으로 하여금 왕권강화에 필요한 제 방안을 강구하게 했다. 여기서 그는 귀족들과의 관계개선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을 위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궁정 내 많은 독일인 고문들을 해임시키는 과감한 조치를 취했지만, 그와 귀족들 사이의 관계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얀 왕은 1319년 국정을 체코 귀족들에게 넘겨 준 후, 체코 왕국을 떠났고 이후부터 그는 외국에 머무르면서 룩셈부르크 가문과 체코 왕국의 세력 확장에 필요한 외치에 치중했다.2)

1314년 바이에른(Bayern)대공 루트비히(Ludwig)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Ludwig IV:1314-1347)로 선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 기여를 한 얀 왕은 루트비히 4세로부터 헤프(Cheb) 지방을 봉토로 제공받았다.3) 또한 그는 1320년 고지 루사티아(Lužice)의 부디신(Budyšin) 지역을 체코 왕국에 병합시켜 왕국의 영역을 확대시켰다.4) 1320년대 중반부터 얀 왕은 영토 확장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그 결과, 즈호르젤레츠(Zhořelec) 뿐만 아니라 스비드니츠코(Svídnicko)와 야보르스코(Javorsko)를 제외한 슐레지엔의 모든 공국들이 체코 왕국에 복속되었다. 체코 및 폴란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슐레지엔 지방은 바츨라프 2세가 가지고 있던 폴란드 왕위 상속권을 얀 왕이 포기한 대가로 얻은 중요한 요지였다. 얀 왕은 1328년, 1337년, 그리고 1345년 세 차례에 걸쳐 동프로이센과 리투아니아를 원정했고, 1331년부터 1335년까지 서부 롬바르디아와 북부 이탈리아 지역을 일시적으로 정복하기도 했다.5) 그리고 티롤(Tirol) 지방을 짧은 기간이지만 체코 왕국에 편입시켰고, 1344년 프라하(Praha) 대주교청의 승격을 확보했으며, 그 아래에 올로모우츠(Olomouc)주교청과 리토미슐(Litomyšl) 주교청을 복속시켰다. 1346년 얀 왕은 자신의 아들 카렐(Karel)을 독일 왕으로 즉위시켰지만 같은 해 8월 26일 프랑스에서 펼쳐진 크레시(Crécy) 전투에서 전사했다.6)

카렐 4세(Karel IV:1316-1378)는 7살부터, 즉 1323년부터 1330년까지 샤를 4세(Charles IV: 1294-1328)의 프랑스 궁정에서 머무르면서 군주 수업에 필요한 제 학문을 배웠다. 폭넓은 지식을 갖춘 청년으로 성장한 카렐은 룩셈부르크, 북부 이탈리아 등지에 체류하면서 견문을 넓혔고,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1333년 체코 왕국에 온 이후에는 체코어 공부에도 열중했다.7) 다음 해인 1334년 카렐은 모라비아 후작으로 책봉되었다. 이후부터 그는 얀 왕이 그동안 등한시한 내정 공백을 열심히 메꾸어 나가는 데 주력했고, 그것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부터 부친과 더불어 체코 왕국을 통치하는 권한도 부여받았다.8) 그런데 이 시기 카렐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폴란드 및 헝가리와 동맹체제구축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 이후 카렐은 자신의 경쟁자인 루트비히 4세를 물리쳤다. 이것은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6세(Clemens VI:1342-1352)9)로 하여금 독일 왕 선출의 필요성을 강력히 제기하게 했다. 이렇게 로마 교황의 입장이 명확히 밝혀짐에 따라 트리어(Trier) 대주교였던 발두인(Balduin)의 주도로 선제후회의가 개최되었고, 거기서 5명의 선제후가 카렐을 독일 왕으로 추대했다. 카렐은 1346년 11월 26일 본(Bonn)에서 독일 왕으로 등극했다.10)

1347년 9월 2일 카렐은 체코 왕국의 카렐 4세로 등극했다. 등극한 즉시 카렐 4세는 체코 왕국의 지위 격상에 필요한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즉, 그는 체코 왕국의 고유 영역인 보헤미아 지방과 복속지인 모라비아 후작령, 슐레지엔 공국, 그리고 고지 루사티아를 포함시킨 체코 왕국 출범에 필요한 법적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11) 그리고 그는 체코 왕국의 수호성인인 성 바츨라프의 이름을 따서 성 바츨라프 왕관을 만들어 단일 체코 왕국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성 바츨라프 왕관으로 상징되는 체코 왕국은 실질적으로는 1620년의 빌라호라(Bilá hora)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형식적으로는 1635년 체코가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에 편입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1349년 7월 25일 아헨(Aachen)에서 다시 독일 왕으로 등극한 카렐 4세는 1355년 1월 6일 로마에서의 대관식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svatořímský)가 되었다. 1356년 카렐 4세는 유명한 ‘황금칙서(Zlatá bula)’를 공포하여 체코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재조정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체코 왕국의 군주가 제국 내 일곱 명 선제후들 중에서, 성직계의 대표를 제외한 세속 권력의 대표 자격, 즉 제국 내에서 일인자의 지위(primus inter pares)를 가진다는 것이었다.12) 그리고 이 칙서에는 선제후들 중에서 체코 왕가의 경우 남자 상속인이 없을 경우 여자 후계자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것이 명시되었지만, 다른 왕가들의 경우 그들 영역이 자동적으로 제국의 자유 봉토(vacant feud)로 귀속되게끔 규정했으며, 선제후들이 독일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와 체코어도 구사할 수 있게끔 하라는 이상적이지만 매우 비현실적인 요구도 들어 있었다. 카렐 4세의 장남 바츨라프(Vaclav)가 1363년 체코 왕으로 등극했고, 이 인물은 카렐 4세가 생존했던 1376년 6월 10일 독일 왕으로도 선출되었다.13) 이러한 것을 통해 황금칙서가 현재의 독일 왕이 생존 시 자신의 후계자를 선출하는 등의 위법적 행위를 펼칠 경우, 그것에 대해 어떠한 법적 제제도 가할 수 없는 맹점을 가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이러한 맹점 때문에 향후 신성로마제국이 혼란적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강력히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렐 4세의 황금칙서는 종래 독일 군주들이 종종 침범을 시도한 체코 왕국의 주권을 확고히 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으며, 이 칙서의 기본 골격은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없어질 때까지 제국 칙령으로 존속했다.

카렐 4세는 법령뿐만 아니라, 영토 확장을 통해 체코 왕국을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명실상부한 중심 국가로 부상시켰다. 즉, 그는 1370년 슐레지엔 공국 전체를 체코 왕국에 편입시켰고, 독일 내 여러 지역들을 구입 또는 봉토 형식으로 획득했다. 이 당시 체코 왕국의 독일 내 봉토는 라인(Rhein) 강 서부의 팔츠(Pfalz)령과 마이센(Meissen) 지역, 보크트란트(Vogtland), 작센과 라이프치히(Leipzig), 그리고 북부 바이에른에서 뷔르츠부르크(Würzburg)까지 산재해 있었다.

1364년 케르텐(Kärnten)과 티롤을 합병한 오스트리아-스타이어마르크(Steiermark) 공국과 체코의 룩셈부르크 가 사이에 협약이 체결되었는데, 이것은 체코 왕국의 영토적 확장을 예견한데서 비롯되었다. 이 협약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단절될 경우 이 가문의 영역이 룩셈부르크 가문으로 이양되고, 반대로 룩셈부르크 가문이 끊어질 경우 체코 영역은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공국의 소유가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합스부르크 가문보다 룩셈부르크 가문이 일찍 단절되었기 때문에 이 협약은 체코 왕국의 영토적 확장보다는 오히려 체코 왕권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권리 주장에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카렐 4세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찰스 대제(Karel Veliký), 즉 샤를마뉴(Charlemagne:768-814) 대제의 전통계승자라는 사명감과 자긍심을 가졌으며, 역시 중세 군주들이 흠모했던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의 예를 따라 그가 건설한 도시와 다리 등에 자신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대왕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고 그 위업도 계승하려고 했다. 카를스베르크(Karlsberg), 카를스크로네(Karlskrone), 체코 제일의 온천 도시 및 국제적 휴양지로 알려진 카를로비바리(Karlovy Vary)와 같은 도시들, 체코 고딕 건축의 백미로서, 체코 국가 보물들의 저장소로 유명한 프라하 근교의 카를슈테인(Karlštejn) 성, 프라하에 있는 카렐 다리(Karluv most)14), 카렐대학(univerzita Karlovo) 등이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들이었다.15)

신성로마제국 내 다른 독일계 국가들보다 국가 체제를 확고히 확립한 체코 왕국을 제국의 중심 국가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제국 수도, 즉 프라하를 크게 확충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것에 대한 카렐 4세의 입장 역시 매우 긍정적이었다. 이에 따라 1348년 신시가지, 즉 노베메스토(Nové Město)가 건설되었고 기존의 스타레메스토(Staré Město)와 말라스트라나(Malá Strana)에는 귀족, 대상인, 그리고 외교관들의 대저택과 궁전 건설 등이 활발히 진행되어 프라하는 이전보다 훨씬 넓어졌다.

카렐 4세의 통치기간 중 교회 및 그 부속 기관들도 눈부신 성장을 보였다. 프라하 대주교청의 신설로 체코 교회는 기존의 마인츠(Mainz) 대주교청으로부터 벗어났고,이미 프르제미슬 오타카르 1세(Přemysl Otakar I:1197-1230) 때 교회가 보장받은 권리 및 자유가 이 시기에 실현됨으로써 세속 권력에 대한 교회의 우위가 확보되었다. 당시 체코 왕국 면적의 절반이상이 교회 및 그 부속 기관들에 속할 정도로 교회의 세력은 막강했다. 그러나 교회가 구사하던 폭넓은 자유와 막대한 부는 교회와 성직자들의 타락을 가져왔고 이에, 카렐 4세와 프라하 초대 대주교 아르노슈트(Arnošt)는 이를 막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저명한 설교자들의 초빙도 이러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발트하우서가 초빙되었고, 모라비아로부터 얀 밀리치(Jan Milič)를 불러들였다. 특히, 얀 밀리치는 성직 사회 및 세속 사회의 부패를 동시에 비판했는데, 교황이나 세속군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수차례 로마로, 아비뇽(Avignon)으로 소환되었으나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아비뇽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얀 후스(J.Hus)가 주도한 후스주의 대개혁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얀 루쳄부르스키에 이어 체코 국왕으로 등장한 카렐 4세는 1355년 1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이후부터 그는 제국 내에서 체코 왕국의 위상을 증대시키는 일련의 정책을 펼쳤고 거기서 가시적인 효과도 거두었다. 또한, 문예 부분에 대한 그의 관심 역시 매우 높았기 때문에 프라하는 유럽문화의 중심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카렐 4세는 국제정세를 올바르게 파악한 후, 체코 왕국이 그것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끔 국력 신장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정책은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련의 해당 국가에도 유용하다고 하겠다. 그것은 국제정세에 대한 위정자 및 집권세력의 올바른 파악 및 대응을 통해 국가의 위상이 증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을 효율적으로 펼치기 위해서는 카렐 4세가 지적했듯이 국력 신장이 필요한데, 일례는 우리나라의 외교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이전보다 강화된 국력을 토대로 국가의 이익과 연계된 외교정책을 독자적으로 펼치고 있다. 이것에 대한 주변 강대국들의 간섭은 이전과는 달리 매우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의 국력이 이전보다 크게 향상 된데서 비롯된 것 같다.


1) 룩셈부르크 가문은 원래 독일과 프랑스 국경지역에 근거를 둔 독일계 백작 가문이었지만 프랑스 왕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프랑스 문화권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2) 이에 따라 사람들은 얀 루쳄부르스키를 ‘외국인 국왕(král ciznec)’이라 불렀다.
3) 헤프 지방을 순시하던 중 얀 왕은 이 지방이 바츨라프 2세(Vaclav II: 1278-1305) 때 체코 왕국에 일시적으로 복속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그로 하여금 이 지방을 영구히 체코 왕국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게 했다.
4) 루시티아는 오늘날 라우지츠(Lausitz)를 지칭한다.
5) 이 당시 얀 왕은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 룩셈부르크 지배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6) 백년 전쟁(1339-1453) 초반부에 진행되었던 크레시 전투에는 카렐을 포함한 많은 체코 기사들도 참여했는데 여기서 카렐은 부상을 입은 후 영국군의 포로로 잡혔지만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7) 이것은 카렐 4세가 쓴 자서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은 소년 및 청년 시대만을 다루었다.
8) 1340년 실명으로 더 이상 국가를 통치할 수 없게 된 얀 왕은 자신의 아들에게 체코 왕국의 통치권을 전담시켰다.
9) 클레멘스 6세는 카렐이 프랑스 궁정에서 군주 수업을 받을 때 그를 가르쳤다.
10) 일반적으로 독일 왕으로 선출된 인물은 로마에 가서 대관식을 거친 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11) 카렐 4세는 1365년 저지 루사티아를 체코 왕국에 편입시켰다.
12) 황금칙서에서는 마인츠(Mainz)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Köln) 대주교, 보헤미아 국왕, 팔츠 대공, 작센 대공,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을 7명의 선제후로 명시했다.
13) 바츨라프는 1360년에 태어났다.
14) 이 다리는 블타바(Vltava) 강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돌다리였다. 그리고 다리 양쪽에는 탑도 세웠는데, 이 중 스타레메스토 쪽의 스타로메스트스카 모스테츠카 베시(Staroměstská mostecká véž)는 웅장한 고딕식의 탑으로서 고대 로마 황제들의 개선문 형태와 유사한 구조를 가졌는데 이것은 고대 위대한 제왕들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던 카렐 4세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15) 전설에 따를 경우 카렐 4세가 사슴사냥을 하던 중 카를로비바리에서 온천을 발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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