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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로서의 보스니아 그 배경과 현실적 고통

중동부유럽 기타 김철민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대학 교수 2014/11/22

얼마 전인 10월 12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Bosna i Hercegovina, 이후 ‘보스니아’로 축약)에선 총 선거와 함께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부정 선거 시비와 개표 지연 등 여러 혼전 속에서도, 마침내 공화국을 대표하는 각 민족 계파별 3명의 대통령과 함께 보스니아 공화국 전체를 대표하는 의원 42명, 그리고 각 체제별 의원들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 의원 98명, 스르프스카 공화국 의원 83명을 각각 선출하였다. 선거 결과, 보스니아를 대표하는 3인 대통령으로, 믈라덴 이바니치(Mladen Ivanić, 세르비아계), 드라간 쵸비치(Dragan Čović, 크로아티아계)와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Bakir Izetbegović, 보스니아계)가 당선되었고, 현지시간으로 10월 17일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취임식을 치렀다.

보스니아는 대통령 선거 원칙에 따르자면, 3개 민족계파를 각각 대표하는 3명 대통령이 향후 4년 동안 대통령위원회를 구성하게 되며, 가장 다수 득표한 대통령을 시작으로 각 대통령들이 8개월씩 번갈아가며 한 사람씩 의장 대통령을 맡아 통치하게 된다. 이번에 최고 득표로 당선되어 11월 17일부터 정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 믈라딘 이바니치 의장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는 우리나라가 되었다. 지난 11월 20일, 그는 보수 민주 정당 연합체인 국제민주연합(IDU) 당수회의가 열리는 우리나라를 방문하였고,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면담하기도 했다.

보스니아는 ‘1국가 2체제’라는 독특한 행정 체계와 함께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정치 형태를 띠고 있다. 오늘날 보스니아 정치 형태의 기틀은 3년 8개월간 지속된 보스니아 내전을 종결시킨 ‘데이턴 합의안(Dayton Agreement, 1955년 10월)’에 기인하고 있다. 이 합의안에 따라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정교도)가 장악한 49%의 ‘스르프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수도는 반야 루카 Banja Luka)’과 보스니아 무슬림(이슬람)과 크로아티아계(가톨릭)가 연합한 51% 영토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 Federacija Bosne i Hercegovine, 수도는 보스니아 연방 수도와 같은 사라예보 Sarajevo)’으로 나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역사적 기원에 따르자면, 수도인 사라예보와 제 2도시 반야루카가 포함된 ‘보스니아’ 지역 명칭은 국토를 가로지는 ‘보스니아(Bosnia/ Bosna)’강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헤르체고비나(Herzegovina/ Hercegovina)’란 지명은 오스만 터키 제국이 이곳을 쳐들어오기 이전, 이 지역 영주였던 부크취치 코사챠(Stjepan Vukčić Kosača, 1404-1466, 재임 1435-1466, ‘스트예판 헤르제그로’도 불림)가 지배하던 ‘영지’를 일컫는 말인 ‘헤르제그(Herzeg, 게르만어에서 유래)’란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실제, 중세시대 이 지역은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를 세운 인물이자 세르비아 민족 성인인 ‘성 사바의 헤르제그(Herzeg of Saint Sava)’지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오스만 터키의 지배 하에서 행정 구역중 하나인 ‘헤르체고비나 구역(Herzegovina Sanjak)’으로 명명되면서 오늘날까지 그 명칭이 이어지고 있다.

1국가에 각 민족 계파를 대표하는 대통령 3명과 내각이 존재하는 것 외에도, 보스니아는 각 2개의 체제 안에 또 다른 대통령들과 지방 내각들을 두고 있다. 실제, 2014년 11월 현재, 세르비아계의 스르프스카 공화국엔 밀로라드 도딕(Milorad Dodik) 대통령이, 그리고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 연합체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엔 쥐브코 부디미르(Živko Budimir) 대통령이 자리하고 있다. 보스니아가 값비싼 정치 비용을 치르면서까지 복잡한 정치 조직을 지니고 있는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보스니아 내전과 같은 경험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이 지역 민족들의 고육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보스니아가 유럽 내 종교와 문화의 대표적인 모자이크 지역으로써 이처럼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이어진 종교, 문화적 분할선의 역사와 함께 보스니아가 자리한 지정학적 배경에서 기인하고 있다.

실제,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재위 379-395) 황제의 사망과 함께 395년 로마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동과 서로 분리되었고, 보스니아는 동·서 로마 제국의 경계선이 되어야 했다. 이후 이 선은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서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정교’간 종교, 문화적 분리선이 되게 된다. 17세기 말에 들어와, 보스니아 지역은 다시 한 번 종교, 문화적 분할선에 자리해야 했다. 1683년 제 2차 비엔나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만 터키는, 이 전투 이후로 서유럽의 수호자로 등장한 합스부르크 제국과 함께 양 제국 간 국경선을 긋는 새로운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이 바로 ‘스렘스키 카를로브찌 조약(1699)’이며, 조약에 따라 크로아티아는 ‘서유럽 가톨릭 문화권의 지평선’, 그리고 보스니아는 오스만 터키의 유럽 최전선이자 ‘유럽 내 이슬람 문화권의 지평선’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앞서의 언급처럼 일반적으로 발칸 유럽은 가톨릭과 정교, 이슬람 등 다양한 종교와 이에 따른 문화들이 현존하고 있어 통상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 불리고 있다. 실제, 종교 문화적 분할선에 따른 역사적 격변은 보스니아를 ‘가톨릭’과 ‘정교’ 그리고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종교가 복잡하게 얽혀진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도 혼재된 ‘모자이크 중의 모자이크 지역’으로 남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은 그 수도인 사라예보에도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 무슬림 외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그 외 유대인 등이 서로 복잡하게 혼재되어 거주하면서 ‘유럽의 예루살렘’이란 별칭을 얻게 하였다.

세계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란 측면에서 보스니아의 국제적 중요성은 냉전 이후 세계질서의 특징을 주제로 <문명의 충돌, Clash of Civilizations> (1996)을 집필한 헌틴텅(Samuel Phillips Huntington, 1927-2008)의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상징되는 냉전 종결 이후 새롭게 변모해가는 국제 질서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충돌과 갈등들을 지켜 본 헌팅턴은 전 세계를 약 8개의 문명권(서구,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 중국, 인도, 정교, 일본과 아프리카)으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권 간의 충돌이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냉전 이후의 무력 충돌의 주요 요인 또한 바로 이러한 문화 간 종교간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주요 문명 간 충돌의 대표적 사례로 ‘팔레스타인’ 지역과 더불어 ‘보스니아’ 지역을 들기도 했다.  
 
하지만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란 매력적인 별칭과 달리, 오늘날 이러한 역사적 짐은 보스니아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남슬라브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게 현실이다. 보스니아 내전 이후, 보스니아 내 민족들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인 그들의 현실을 인정하고 서로 간의 화해와 통합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도 이러한 갈등양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그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대표적인 것이 바로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한 국가 안에 세 민족이 각각의 민족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을 들 수 있다. 최근 보스니아의 교육 현실을 집중 조명한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그 원인을 보스니아의 역사 교육에서 찾고 있다. 내전 종식 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체제별 지역 정부에 맡겨졌으며, 현재 보스니아에는 지역별로 10개가 넘는 교육부가 존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세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각자의 입맛에 맞추어 커리큘럼을 구성해 왔으며, 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 수업 또한 이 안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순수 역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주의자들은 역사서를 통해 때로는 사실과 달리 자신을 피해자로, 또 다른 민족을 침략자인 것처럼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또한 자 민족에게 불리하거나,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는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단순히 개요만 가르치고 지나가는 것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른 혼란은 서로 다른 상이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젊은 세대의 몫으로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으며, 다른 역사적 가치관에 따른 민족 간 화해와 조화로움은 더욱 더 어려운 과제로 남겨지고 있다 하겠다.

용서와 화해보다는 아픔과 상처만을 안겨주고 있는 조각난 역사 배우기는 보스니아가 앞으로도 문화, 종교 간을 초월하여 모든 민족을 아우르는 통합된 미래를 이야기 하는데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화해 없이 국가적, 민족적 통합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역사 논쟁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보스니아의 현실은 여러 생각을 곱씹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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