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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베네시의 정치활동과 지향목표 -제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기를 중심으로-

슬로바키아 / 체코 김장수 가톨릭관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2015/01/26

1938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나치 독일의 다음 목표는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이 당시 체코 내에서 수데텐(Sudety) 독일당은 제1 정당으로 활동했는데 그 이유는 이 당이 1935년에 실시된 체코슬로바키아 총선에서 체코 내 독일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1) 이렇게 강력한 파워를 가진 수데텐 독일당은 1937년 9월부터 베를린(Berlin) 정부와 비밀 교섭을 펼쳤고 거기서 이 당은 히틀러(A. Hitler:1889-1945)의 ‘제 5열(Pata Kolona)’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약속도 했다.2) 이후부터 수데텐 독일당은 ‘제 5열’ 과제를 성실히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지속적으로 펼쳤지만, 그것에 대한 프라하(Praha) 정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히틀러의 야욕이 공식적으로 표출됨에 따라 당시 이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베네시(E. Beneš:1884-1948)는 체코슬로바키아군 총동원령을 내렸고 그 과정에서 1935년부터 군사동맹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프랑스의 지원도 받으려고 했다. 그리고 베네시는 1938년 9월 비공식 서한을 파리에 전달했는데 거기서 그는 수데텐 지방의 일부를 독일에게 넘겨주고 체코슬로바키아에 살고 있던 220만 명의 독일인들을 강제로 독일로 이주시키는 파격적 제안을 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점차적으로 이들 국가들은 그것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등 신중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 국가는 프라하 정부가 수데텐 독일당의 요구를 수렴해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고 그것을 프라하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알렸다.

그러나 베네시는 자신의 주장을 견지했고 그것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는 1938년 9월 19일 프라하 정부에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이렇게 전달된 최후통첩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수데텐 지방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향후 이 국가에  대한 군사적 원조 역시 중단된다는 것이 명시되었다. 이러한 경고성 압박에도 불구하고 프라하 정부는 수데텐 지방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재천명했지만 그것에 대해 주변 국가들은 아무런 관심도 표명하지 않았다. 1938년 9월 29일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B.Mus-solini: 1883-1945), 영국의 체임벌린(J.A.,Chamberlain:1863-1937), 그리고 프랑스의 달라디에(E. Daladier: 1884-1970)가 뮌헨(München)에 모여 수데텐 지방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여기서 히틀러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예상대로 회의 참석자들은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게 양도한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그 과정에서 이해 당사국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뮌헨  지령(Mnichovský diktát) 또는 뮌헨협정(Mnichovská dohoda)이라고 지칭되는 이 협정으로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나치 독일의 요구를 인정했고 그것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는 국가로서의 존재를 상실하게 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는 당분간 독립 국가로 존재했지만 독립 국가로서의 기능은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뮌헨협정이 공포된 이후 소련은 베네시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안했지만, 소련의 저의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가졌던 베네시는 그러한 제의를 일단 거절했다. 그리고 서유럽 국가들이 뮌헨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새로운 국경을 보장하겠다는 당초의 약속마저 이행하지 않음에 따라 베네시는 10월 5일 프라하를 떠났고 이것으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의 붕괴도 기정사실화되었다.3)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나치 독일에 의해 붕괴된 이후 폴란드, 프랑스, 미국 등지에 흩어져 있던 체코 인사들은 체코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구체화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들은 뮌헨협정 이전의 체코슬로바키아를 회복시키는 것과 대독일 무장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그들의 활동목표로 설정했다. 그러나 뮌헨협정의 준수를 고집하는 프랑스 및 영국 정부의 태도 때문에 수차례에 걸쳐 시도된 체코슬로바키아 임시정부 창설노력은 성과 없이 끝났다. 그러다가 1939년 10월 중순 베네시를 비롯한 일련의 체코 망명 정치가들이 파리(Paris)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위원회(Československý národní výbor)를 창설했다. 같은 해 10월 28일, 즉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기념일에 발생한 국내에서의 대규모 시위와 나치 독일의 대대적 탄압을 계기로 프랑스 및 영국 정부는 지금까지의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위원회를 조건부로 인정하는 등 긍정적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1년 여름 독일의 소련침공으로 체코 망명 정부에 대한 서방측의 관심과 배려는 이전보다 크게 확대되었다. 이렇게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서방측의 시각변화에도 불구하고 베네시는 1943년부터 소련과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재건을 약속했다. 그리고 독일의 패배가 가시화됨에 따라 베네시는 1943년 12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I.V.Stalin:1879-1953)과 체코슬로바키아-소련 원조협정을 체결하는 등의 적극성도 보였다. 이렇게 체결된 협정에서는 전후 양국 사이의 긴밀한 관계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는데 이것은 종전 후 다시 등장할 체코슬로바키아가 자신의 독립과 안전을 소련에 의존하겠다는 의미도 가진 것이라 하겠다.4) 실제적으로 베네시는 지금까지 추구한 전통적 외교 노선 대신에 체코슬로바키아에 실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방향에 대해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또한, 모스크바 회합에서 스탈린은 베네시가 구상한 계획, 즉 수데텐 독일인들, 카르파티나 산맥에 살던 독일인들, 그리고 남 슬로바키아에 거주하던 72만 명의 헝가리인들을 강제로 추방시킨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것에 대한 대가로 베네시는 스탈린이 당시 지향한 서유럽으로의 소련 영역확장을 지지했다. 또한, 그는 향후 소련 의도에 따라 진행될 폴란드 영역의 강제이동과 그것에 따른 독일영토의 축소도 묵인하기로 했다. 베네시는 모스크바 체류 중 당시 이 도시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좌파사회주의자들과도 대화를 나누었고 거기서 ‘민족전선(Národní Fronta)’도 탄생시켰다. 여기서 베네시는 고트발트(K.Gotwald:1896-1953)를 비롯한 일련의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 과정에서 여러 가지 정치적 위험을 인식했지만, 공산주의자들 역시 결국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할 것이라는 다분히 주관적 판단을 가지고 협상에 임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당시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행정부에 참여할 경우 혹시 발생할 수도 있을 내전을 미리 방지할 수 있을 것이고 책임정치에 대한 의무 때문에 공산주의자들 역시 그들이 지향한 혁명을 실제적 상황에 도입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1944년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말적 징후들이 포착되었다. 남쪽에서는 이탈리아가 해방되었고 서쪽에서는 6월 6일에 감행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연합군은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남부 네덜란드를 해방시킨후 베를린(Berlin)을 향해 진격했다.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그들의 영토 및 폴란드를 해방시킨 여세를 몰아 나치 독일의 수도로 나아갔고 1945년 4월 엘베(Elbe)강을 건너 동진해 오던 연합군과 합류하게 되었다. 이후 연합군과 소련군에 의한 베를린 함락과 이에 따른 독일군의 무조건 항복(5월 8일)으로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처럼 체코 밖에서의 전쟁이 종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체코 내에서도 레지스탕스(Resistance) 운동이 그 강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슬로바키아에서의 민족봉기운동에 고무된 체코의 체스코모라프스케 고지에서는 1944년 가을 빨치산(Partisan) 운동으로 해방구역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1945년 4월 말에 이르러서는 체코 동부, 남부, 북부 지역과 모라비아 남부 지역에서도 빨치산의 해방구역이 건설되기 시작했다.5) 그리고 이 시기에 미국군이 남쪽에서, 소련군이 북동쪽에서 체코 국경을 넘어 진격했고, 5월 1일의 프르제로프(Přerov)에서의 봉기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반 나치 봉기가 발생했다. 그리고 5월 5일 체코 민족회의(Česká Národní Rada)가 주도한 프라하 봉기(Pražské Povstání)가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프라하 봉기에 앞서 베네시는 1945년 3월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여기서 그는 고트발트와 더불어 임시정부에 참여할 인물들을 선별했고 그 과정에서 그는 고트발트에게 적지 않은 정치적인 양보도 했다. 이에 따라 향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공산당, 사회민주당, 그리고 국민당이 이끄는 좌익세력이 주도하게 되었다. 다음 달인 4월 슬로바키아의 코시체(Kosice)에서 소련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활동한 피에르린게르(Z.Fierlinger:1891-1976)가 주도하는 임시정부가 출범했는데 당시 이 정부의 해결 과제로는 첫째, 제2차 세계대전 중 우익 성향을 가진 정당들, 특히 농민당과 슬로바키아 인민당의 활동을 중단시킨다.6) 둘째, 슬로바키아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한다.7) 셋째, 나치 독일에 협력한 독일인들과 헝가리인들을 강제로 추방시킨다. 넷째, 대지주들의 토지, 산업자본가들의 산업시설, 그리고 은행을 국유화시킨다. 다섯째, 나치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인물들을 색출하여 처형한다. 여섯째, 소련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시킨다 등을 들 수 있다.

1945년 5월 10일 피에르린게르의 코시체 정부가 프라하에 입성한 1주일 후 베네시 대통령은 런던을 떠나 모스크바와 코시체를 거쳐 프라하로 도착했다. 5월 16일 베네시는 프라하(Praha)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는데 거기서 그는 체코영토에 살고 있는 독일인들과 슬로바키아에서 거주하고 있는 헝가리인들을 강제로 추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그러한 정책이 분명히 향후 체코슬로바키아 국익에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언급했다. 또한, 독일인들과 헝가리인들을 추방할 경우 그동안 지속되었던 문화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측면에서의 독일화가 중단될 것이라는 확신도 밝혔다. 1945년 10월 25일 피에르린게르 정부는 대통령령에 따라 은행, 보험회사, 광산을 포함한 산업과 식료품 산업, 즉 전체 산업의 67% 이상을 국유화시킴에 따라서 민간 부문 경제는 종전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앞선 6월 21일 토지개혁의 제1단계 조치 역시 대통령령으로 발표되었고 그것에 따라 독일인, 나치 협력자, 그리고 매국노들의 토지를 압수하여 소작농들과 소농들에게 분배되었다. 이에 따라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사회적 구조에 큰 변화가 감지되었다. 이제 산업자본가와 대지주 계층, 노동자와 소작농 간의 계층적 차이가 약해지거나 없어졌고 그 대신 소농, 소상인, 근로자의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주둔 중이었던 미군과 소련군이 1945년 10월에 철수를 완료함에 따라 같은 해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임시의회가 소집되었다. 임시의회는 즉시 베네시 대통령이 주도한 과도기적 정부를 해체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아울러 임시의회는 베네시를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등 정부구성에 필요한 일련의 법적 절차도 수행했다. 같은 날 제2기 피에르린게르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는데 이 정부는 1946년 5월 26일에 실시된 총선 이후 신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1946년에 실시된 총선은 예상대로 공산당의 승리였다. 이후 모두 24개 부서로 구성된 신정부가 출범했는데 공산당은 내무장관직을 위치한 주요한 각료직 9개를 차지했다. 그리고 1946년 6월 19일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된 베네시 역시 국민 사회당 출신 인물들을 정부에 입각시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시키려고 했지만, 가시적인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1948년 2월 공산계 내무장관인 노셰크(V.Nosek:1893-1955)는 프라하 경찰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6명의 경찰 간부 모두를 공산당원으로 대체했다. 이에 국민사회당과 가톨릭 국민당을 비롯한 비공산 계열 정당들은 노셰크의 위법적 행위가 철회되지 않을 경우 자기 당 출신 장관들의 사표를 제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노셰크가 그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그것에 따라 2월 20일 11명 각료들이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베네시 대통령은 이의 수용을 거부했는데 그것은 공산당에 압력을 가하고 새로운 총선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대통령의 이러한 의도를 파악한 공산당은 대통령이 이들의 사표를 반드시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부터 5일간 지속된 베네시와 고트발트 사이의 독대에서 고트발트는 자신의 관점, 즉 공산당이 주도하는 프라하 정부 등장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이렇게 고조되는 긴장 속에서 내전의 위험과 소련의 개입을 우려한, 베네시 대통령은 1948년 2월 29일 공산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비공산 계열 각료들의 사표를 수리하고, 고트발트가 미리 조각한 공산당 계열 일색의 새 내각도 승인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회는 3월 11일 공산당의 압력으로 신정부를 인정했다. 같은 해 5월 베네시는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회가 제정한 헌법인준을 했고 다음달 7일에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베네시가 서거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차단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벨벳혁명 이후 그에 대한 평가 작업은 본격화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그의 활동 및 치적은 복원되었다. 이에 따라 2005년 5월에 카렐 드볼작(K.Dvořák)이 제작한 베네시의 동상이 로레토 광장(Loretánské Néměstí)에 세워졌다. 그리고 이에 앞서 베네시가 생의 마지막 날들을 보낸 우스티나트라벰(Ŭstí nad Labem)에 추모기념물이 건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사용한 도로, 다리, 그리고 광장들도 다수 등장했다. 마사리크에 이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으로 활동한 베네시는 그의 재임 기간 중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국익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그러한 것은 종종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차단되었다. 베네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되기 전에 발생한 수데텐 문제를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지만, 이들 국가들은 당시 유럽에서 패권을 장악하려던 히틀러를 의식하는 자세를 보였기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는 결국 해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베네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의 도움을 받아 체코슬로바키아 재건에 나섰지만 여기서 그는 당시 스탈린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했고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게 되는 불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베네시의 정치적 행보를 통해 우리는 한 국가를 운영하고 그 운명을 책임질 위정자의 덕목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세계 및 주변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자국에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순발력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해당 국가에 위해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의 존폐적인 위기도 초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절한 국력 역시 위정자의 통치행위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러한 것이 동반되지 않을 경우 위정자가 올바른 판단을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효용성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베네시의 활동에서 입증되었다. 

1) 이 당시 이 당을 주도한 인물은 콘라드 헨라인(K.Henlein)이었다.
2) ‘제 5열’의 주된 과제는 해당 지역에서 나치 독일이 침입하는데 필요한 빌미들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3) 베네시는 1884년 5월 24일 보헤미아의 코즈란(Kozlan)에서 태어났다. 프라하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닌 베네시는 프라하 대학에서 독일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1905년부터 프랑스에서 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프랑스문화원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네시는 1907년에는 런던, 1909년에는 베를린에 머무르기도 했다. 프라하로 돌아온 베네시는 사회주의 일간지였던 ‘프라보 리두 (Pra- vo Lidu:인간의 권리)’에 근무했다. 이후 그는 일련의 사회주의적 성향의 출판사에서 활동을 펼치는 적극성도 보였다. 베네시는 1908년 디종(Dijon)대학에서 ‘오스트리아 문제와 체코논제(Le problème autrichien et la question tchèque)'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베네시는 자신의 학위논문에서 도나우 제국의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민주주의적-연방주의적인 체제로 변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러한 것은 그가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체계화시킨 팔라츠키(F.Palack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프라하로 돌아온 베네시는 1909년부터 5년제의 상업고등학교(Handelsakademie)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그는 프라하 대학 사회학과에서 교수자격취득과정을 밟았고 ’Quelques verites simples sur la federalisation de l'Autriche-Hongrie‘라는 논문으로 교수자격을 획득했다. 1912년 베네시는 프라하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후부터 그는 종종 마사리크와 더불어 오스트리아 제국 및 보헤미아 지방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논의를 하는 등의 적극성을 보였다.
4)  이 당시 베네시는 뮌헨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가 영국과 프랑스의 희생양이 되었던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5) 파르티잔(partisan)은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며,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나, 현재는 유격대원, 편의대원을 지칭한다. 따라서 에스파냐어에서 나온 게릴라(guerilla)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6) 이들 정당들은 전쟁 이전에 전체 국민의 과반수이상의 지지를 받았다.
7) 이 당시 베네시는 체코슬로바키아 단일 민족을 고집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슬로바키아의 민족적 독자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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