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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크로아티아 관광의 꽃, 두브로브니크의 어제와 오늘

크로아티아 김철민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학대학 교수 2015/03/20

   2015년 1월 크로아티아 관광청은 2014년 한 해 크로아티아를 찾는 한국 관광객들이 약 24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비공식 발표를 하였다. 이 수치는 그 전년도인 2013년 약 7만 5천 명(처음 예상치는 6만 5천 명이었음)의 3배가 넘는 경이적인 증가 폭이라 할 수 있다. 실제, 크로아티아를 방문한 한국인 수가 지난 2007년 13,792명을 기록한 이후, 이후 크로아티아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 수는 매년 50%씩 급등해, 2012년에는 4만 5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2013년에 비해 작년인 2014년도에는 전년도 대비 300% 넘는 관광객 증가 수를 보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아시아 관광객들 중 전통적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해왔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2014년 15-16만 명, 그리고 중국 관광객들이 3-4만 명으로 추산되는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증가 속도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자그레브를 비롯해 크로아티아의 주요 관광지에는 한글로 된 안내지 및 안내판이 설치되었으며, 어디서든지 익숙한 한국어로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크로아티아인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또한, 4월부터 10월까지 해안 관광 도시들의 주요 호텔들은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로 사전 예약되어 단체 방을 구하기 어렵다는 즐거운 비명소리 마저 들리는 상황이다. 이 외에도 비수기 방문을 마다하지않는 한국 관광의 독특한 특성에 따라 1년 내내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한국 식당 및 여러 서비스 업종들이 이미 열렸거나,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한국 관광객들이 이렇게 급증한 요인에 대해, 크로아티아 관광청은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자연 유산이 그 기초가 되었다는 말과 함께, 2013년 11월 30일 첫 회 시청률 10.5%를 차지하며, 대중적 관심을 보여 왔던‘꽃보다 누나’ 프로그램의 폭발적 반응의 결과라는 점을 빼놓지 않고 있다. 현재 크로아티아 관광 산업은 크로아티아 전체 GDP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는 주요 산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급증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바라보는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한 여러 전략을 강구 중이며, 그중 하나가 올해 3월 서울에서 오픈 예정인 크로아티아 관광 사무소라 할 수 있다.

   크로아티아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장소이자, 크로아티아의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바로 아드리아 해안에 자리한 크리스트교 전통의 중세 도시인 두브로브니크(Dubrovnik)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두브로보니크는 행정구역 내 약 4만 3천 명 인구가 상주하고 있으며, 이중 세르비아 정교도인은 약 1,700명, 무슬림은 약 2,300명이 거주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의 아테네’ 혹은 라틴어로 ‘세계의 보물(Thesaurum mundi)’이란 별칭을 지니고 있는 두브로브니크는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이 유럽 곳곳을 여행하던 도중 이곳을 ‘아드리아해의 진주’라 칭송하면서 더욱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1925년 노벨 문학상을 수여 받은 아일랜드의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 1950)가 1929년 이곳을 방문한 후 그 아름다움에 감탄해 “만약 지상의 낙원을 보고 싶다면 두브로브니크로 오라!("If you want to see heaven on earth, come to Dubrovnik!")”고 극찬했을 정도로 두브로브니크는 세계적인 관광지이자 역사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이곳은 중세 고성과 그 형태를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유명한 관광지로 세계에 알려져 있으며, 따라서 연일 세계의 주요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중세 도시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두브로브니크의 매력은 중세의 여러 유적물들이 자연과 함께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대리석이 깔린 광장, 경사가 가파른 골목길, 중세 수도원과 교회 외에도 잘 보존된 성 내외부와 지중해풍의 쾌적한 기후, 그리고 푸른 숲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역사 기록에 따르자면, 고대 시절, 두브로브니크는 바위란 뜻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라우스(Laus)’혹은 ‘라구사(Ragusa)’로 불리던 작은 돌섬에 불과했다. 고대 시절, 두브로브니크에서 남쪽 해안을 따라 약 15km 떨어진 오늘날 짜브타트(Cavtat) 지역에 로마 제국의 주요 해양 도시였던 에피다우룸(Epidaurum/ Epidurus)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피다우룸이 아바르 족과 슬라브족의 공격을 받고 파괴되자, 이를 피해 달아난 로마 시민들이 작은 돌섬인 라구사에 정착하였고, 이후로 도시 발달의 기초가 다져지게 된다. 8세기를 전후로 한동안, 이곳을 점령한 비잔틴 제국은 사라센 제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성벽을 쌓고 초기 문화와 도시 발전을 진행해 나갔다. 하지만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온 이후 십자군에 의해 ‘라틴 제국’이 수립되자, 두브로브니크는 1205년부터 약 150년 동안 베네치아 공국의 영토 하로 편입되어야만 했다.
 
   1358년, 헝가리 왕국과 베네치아 공국 간에 맺은 자다르 협약(Treaty of Zadar)을 통해 두브로브니크는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비록 헝가리 왕국 하에서였지만 고도의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다. 14세기에 들어와 라구사 공국은 금과 은 수출 및 다양한 물건들의 중개무역을 통해 부를 확대해 갔으며, 이를 통해 아드리아해 연안들로 그 세력을 확장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오스만 터키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던 베네치아 공국과 달리, 라구사 공국은 1440년부터 1804년까지 긴 기간 동안 안전을 담보로 터키에게 해당 무역을 통해 얻은 이득 중 일부를 제공하였고, 이를 통해 오스만 터키의 암묵적 보호 속에 계속적으로 상업 무역을 유지하는 수완을 발휘해 부를 축적해 갈 수 있었다.

   그 결과, 15-16세기 동안 자체 대규모 선단을 바탕으로 해상 무역을 본격화하면서 베네치아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해양 무역 공국(Maritime Republic)’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자면 16세기, 라구사 공국은 약 180개의 대형 선박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용적만도 36,000 카르(kars) (1kar는 2/3톤에 해당)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규모는 당시 베네치아 공국이 보유하고 있던 함선의 규모와 맞먹을 정도였다. 라구사 공국의 대형 선단들은 고도의 외교술에 힘입어 이탈리아 반도는 물론 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연안 지역, 스페인, 프랑스 남부 지중해 지역, 그리고 터키 본토까지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었다. 일부 기록에는 당시 인도와 아메리카 지역까지 항해하여 무역 거래를 하였다고 알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라구사 공국은 17세기에 들어와 보다 확대된 신대륙 발견과 새로운 항로 개발로 고전해야 했으며, 특히 1667년 일어난 대규모 지진으로 당시 인구의 1/5이 사망하고, 성내 건물의 3/4이 파괴되면서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806년 프랑스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공국은 1808년 독립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맺어진 1815년 비엔나 회의 결과, 두브로브니크는 다른 연안 도시들처럼 오스트리아의 직접적인 지배 하로 들어가야 했다. 오스트리아는 라구사에 새겨진 과거 베네치아 및 이탈리아의 흔적들을 지우고자 했으며, 그 일환으로 1909년 도시의 행정 이름을 두브로브니크로 변경하였다. 당시 이 도시 명은 ‘참나무 숲(Oak Grove)’을 의미하는 ‘두브라바(Dubrava/ 두브(Dub)는 참나무(Oak)란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국이 되자, 두브로브니크는 최초의 남슬라브족 통합국가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 하로 편입되게 된다. 이후로, 제2차 세계대전 결과 수립된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하에서, 티토는 두브로브니크를 지정학적 어려움과 당내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크로아티아 공화국으로 편입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결정은 연방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이 과거 자신의 영토였음을 주장해 왔던 세르비아와의 여러 갈등을 불러오게 된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와 두브로브니크는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중세의 웅장한 건축물들을 보존한 채 점차 그 명성을 다시 한 번 확대시켜 갈 수 있었다. 특히 아직까지도 성내에 거주민들이 생활하면서 중세 도시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두브로브니크는 1979년 구시가지 전체가 UNESCO에 지정(1994년 성 밖 일부 지역까지 범위 확장)된 이후로 ‘역사의 보물 창고’란 찬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는 슬로베니아와 함께 세르비아가 주도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독립을 선언하였고, 이후 3개월 유예기간 동안 진행된 협상이 결렬되자, 유고 내전 발발과 함께 두브로브니크의 시련은 재현되었다. 1991년 10월부터 1992년 5월 해방 때까지 약 7개월간 이어진 세르비아군 및 민병대의 포위와 포격으로 두브로브니크는 도시 건물의 약 56%가 파괴되게 된다. 당시 유럽 문명과 예술의 상징적 도시인 아름다운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가 파괴되는 것을 가슴 아파하던 수많은 전 세계 예술가와 문학인들의 폭격 반대와 당시 프랑스 학술 원장이던 장 도르메송(Jean D'Ormesson)을 중심으로 한 범선을 띠운 인간 사슬 시위가 이어지기는 등 국제 사회는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와 재건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이러한 지지와 결실들이 모아져 오늘날 두브로브니크는 과거의 파괴 흔적들이 상당수 치유될 수 있었으며, 세계적인 여러 관광 협회들에서 모두 인정하는 21세기 세계 최고 관광지 중 하나로 다시 한 번 급부상할 수 있게 되었다. 아드리아해의 진주이자, 세계적 보물 창고인 이곳 두브로브니크를 지키고 보호하며 후대에 그 유산을 남겨주는 것은, 어쩌면 현재 크로아티아인들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숙제이자, 인류 전체의 고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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