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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환기의 쿠바를 가다

중남미 기타 최명호 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2015/03/18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의 『날개』중에서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쿠바를 갈 때마다 이상의 『날개』가 연상되곤 했다. 천재가 되어버린 박제인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인지 구분이 가진 않지만, 근현대사의 한 부분이 마치 박제가 된 것 같은 기분, 과거의 어느 한 부분, 너무 빨리 사라져버린 1950년 혹은 1960년대의 한 부분이 조각조각 발견되는 것 같은 쿠바, 슬퍼서 유쾌하고 유쾌해서 슬픈 쿠바는 예전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이전 체념이라는 기본 정서에 경쾌한 음악과 함께 춤추고 노래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던 쿠바가 아니라 어떤 희망과 기대 그리고 분노를 함께 내포하고 있는 쿠바가 바로 2015년의 쿠바였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다시 날개가 돋길 기대하듯 말이다.

2015년 현재 쿠바의 마리엘 신항구의 1차 공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2차 공사도 어렵지 않게 시작할 것으로 보였다. 브라질의 투자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현재 중국계 자본이 투입되면서 작업의 활력이 더해졌다. 또한, 오바마 대통령의 국교 정상화 발언으로 혁명 이후 고착된 쿠바 사회가 변할 것이란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라울 카스트로의 관타나모 반환 등의 주장으로 쿠바 인민들은 점점 더 불만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라울 카스트로의 전술은 외교적 관점으로 봤을 때 지극히 일반적인 것으로 중국계 자본의 쿠바 진출 등을 염려한 미국의 선택이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쿠바 정부가 미국 정부에 비해 유리한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관타나모의 반환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조건들을 내세우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쿠바 안에서는 약간 다르게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일부러 회담에 딴지를 걸어 현 체제를 유지하려 함, 다시 말하면 수구적인 움직임으로 이해되어 변화를 거부하는 현 정부에 대한 거부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계속 외부와 접촉이 있는 관광지, 마리엘 항구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젊은 층의 반정부 정서는 생각보다 광범위했다.

꽤 많은 이들과 인터뷰를 했지만 다들 자신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을 꺼렸다. 결국, 설문조사가 아닌 심층 인터뷰가 진행되기는 했지만, 굳이 각 개인의 정보를 공개할 필요성을 느끼질 못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모든 것은 피델과 라울 때문이라는 것이고 그 빌어먹을 혁명은 무엇을 혁명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오히려 혁명세대가 바로 혁명대상이라는 것이다. 출신 성분에 따라 주거지역이 결정되고 직업이 결정되고 있는 현실은 어쩌면 그들이 개혁하려 하던 바티스타 정권과 너무 닮은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전이 되고, 절수가 되어도 그 모든 것이 피델과 라울 때문이다. 마치 농담처럼 국가 최고원수 혹은 전설적 독재자를 욕하는 것이 하나의 유희처럼 된 느낌이다. 이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 또한 어떤 애정의 표현으로 보였다. 물론 곳곳마다 동상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45세 에밀리오는 이렇게 말했다. “인민들이 혁명을 위해 지금까지 견디고 참았다. 이제 당이 인민을 위해 양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현실 정치는 상당히 복잡하다. 한국 그것도 대한민국, 그들에게 어쩌면 남조선으로 더 알려졌던 국가의 국민인 내가 쿠바 정부를 변호하고, 쿠바인들이 쿠바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체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베니모레

체게바라는 이제는 신화이다. 수많은 이들이 산따 끌라라의 체게바라의 기념관1)을 방문하고 비단 쿠바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체게바라의 모습이 인쇄된 옷을 구매할 수 있다. 자본주의와 대결하던 전설적인 게릴라이자 정치가였던 체게바라가 하나의 패션 아이콘이 된 현실을 체게바라가 목격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의문이다.

알려진 것처럼 체게바라는 쿠바혁명 당시 최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우던 전사, 마르크시즘 사상가 그리고 현실 정치인이었다. 산업성장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토지개혁의 준비에 참가하였다. 1959년 11월∼1961년 2월 쿠바국립은행총재, 1961년 2월부터 쿠바 산업부장관도 함께하였으며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일하여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다. 1965년까지 독자적인 사회주의와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에 대한 평가가 체게바라의 진실이라는 설도 있고 프로파간다라는 설도 있으나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 산업화 4개년 계획 등이 실시되었고 결과적으로 실패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탕수수 농업과 관광수입에 의존적인 쿠바경제가 짧은 기간 동안 체질을 개선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봐도 그리 무리는 아니다. 현재의 관점으로 본다면 공산주의 근본주의자에 가까운 체게바라에게 경제와 산업을 맡겼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면서도 동시에 그가 ‘쿠바의 두뇌’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1962년 미사일 위기를 거치면서 더 견고한 냉전체제로 접어 들어가고 있을 때, 소련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거나 소련과 미국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자립적이며 독립적인 체제를 만들려는 노력 자체는 지극히 옳으면서도 지극히 위험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체게바라는 레닌의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 ; NEP)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그의 급진적인 사상은 러시아 내전 동안의 전시공산주의(War Communism)와 흡사했으며 그것은 그가 최전선에서 활동하던 전사였다거나 게릴라 운동을 주도한 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리 특이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체게바라의 사상과 그가 추구한 경제정책은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소련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며 견고한 냉전체제 안에서 쿠바 정부에게도 힘들었을 것이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2) 

역설적으로 1991년 12월 25일, 소련의 붕괴 이후 시작된 “고난의 행군”은 체게바라가 쿠바를 떠날 때 이미 예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89년까지 연평균 3.1%정도의 안정적 성장을 구가하던 쿠바경제는 솔직히 말하면 소련과 공산주의 진영에 기대고 있던 종속적 상황이었다. 어쩌면 피델 카스트로로 대표되는 쿠바 혁명정부의 진정한 역량은 아마도 1991년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 이후로 봐야 할 것이다. 물론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등장과 중국이 G2로 성장하는 등 국제 상황의 변화가 있었지만, 그런 다각화된 국제관계를 주도적으로 조정하고 최종적으로 미국과 국교 정상화를 이루어낼 것으로 보이고 현재까지 유지된 엠바고 특히 금융에 대한 엠바고가 풀리는 상황까지 이끌어낸다면 쿠바 혁명정부는 상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역사의 가정은 없다지만 체게바라가 급진적으로 쿠바의 경제 개혁을 이끌어왔다면 “고난의 행군”의 양상은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쿠바혁명의 상징, 쿠바 정신의 상징은 피델 카스트로이다. 미국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소련 붕괴 이후에도 굴복하지 않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인간 의지의 상징으로 이것은 쉽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어떻게 쿠바 역사와 세계 역사에 자리매김할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나 그가 쿠바 정신의 상징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쿠바 육체의 상징은 누구일까? 바로 쿠바 음악의 아버지 베니모레(Benny Moré)이다.

우리나라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태어난 베니 모레는 쿠바 대중음악 불멸의 전설이다. 그의 위상은 미국 팝 음악의 프랭크 시나트라 혹은 네킹 콜에 견줄 만하다. 그러나 쿠바를 여행한 사람들이나 쿠바 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알 수 있을 텐데, 네킹 콜이나 프랭크 시나트라가 그저 대중적인 스타 정도에 머물러 있다면, 베니 모레는 많은 쿠바인들과 쿠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상이다. 죽은 지 40여 년이 흘렀으나 현재까지도 베니 모레의 위상을 위협하는 가수는 없으며, 아마 이후로도 한동안 베니 모레의 아성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듯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봐도 이렇게 지속적인 숭배를 받는 가수는 정말 몇 안 될 것이다. 베니 모레가 이런 숭배와 명성을 얻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쿠바의 근대적인 음악을 시작한 최초의 뮤지션이기 때문이다. 베니 모레는 다양하게 존재했던 쿠바 음악,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면 아프리카적인 요소를 많이 가진 음악과 스페인적인 요소를 가진 음악 특히 플라멩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쿠바의 지방 음악인 과히로(guajiro)를 하나로 통합하여 말 그대로 쿠바 전체를 대변하는 근대적인 쿠바 음악을 탄생시켰다. 그러므로 처음 소개하는 라틴 뮤지션으로 베니 모레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베니 모레는 아프리카적인 요소와 스페인 및 유럽적인 요소 모두를 능숙하게 다루어낼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다양한 음악적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라틴 음악에서의 발라드라고 할 수 있는 볼레로와 댄스 뮤직인 맘보, 룸바에서 모두 괄목한 만한 결실을 맺었다. 그런데 베니 모레는 악보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두 곡의 음악을 작곡했다. 그냥 작곡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두 곡의 음악은 지금까지 많은 가수들과 밴드에 의해 불리고 있고 연주되고 있다. 「Bonito Y Sabroso」와 「Que Bueno Baila Usted」이 바로 그 곡들이다. 살사 음악에 관심이 좀 있거나 라틴음악을 좀 들어본 사람이라면 알 만한 곡이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멤버들이 한창 활동하던 40-50년대 쿠바 음악 최고의 스타가 바로 베니 모레이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는 1945년 미구엘 마타모로(Miguel Matamoro) 밴드의 일원으로 멕시코로 가게 되면서 시작된다. 당시 멕시코에서는 영화 산업이 각광을 받고 있었고 특히 많은 쿠바의 뮤지션과 배우들이 멕시코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쿠바혁명으로 1959년에 혁명 세력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그 세력을 펼치기 시작했고, 1961년 미국의 대륙 봉쇄령 이후 쿠바는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문화적으로 미국, 멕시코 및 기타 중남미 지역은 물론 기타 카리브해 도서 지역과도 단절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쿠바의 음악과 문화는 많이 변한다. 그 이전까지 쿠바의 이미지는 ‘미국의 카지노’, ‘카리브해의 라스베가스’ 정도였다. 그만큼 교류도 많이 있었고 나쁜 면도 있었지만, 음악과 춤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장점도 있었다. 이런 시기에 바로 베니 모레가 활동한 것이다. 「Bonito Y Sabroso」, 「San Fernando」, 「Dónde Estabas Tú」 같은 음악들이 이 시기에 발표된 곡들이다. 하지만 베니 모레의 대표곡은 앞에서 언급한 「Qué Bueno Baila Usted」, 「Cómo fue」이다. 이 가운데 「Como fue」는 여러 뮤지션들에 의해 리메이크될 정도로 유명한 곡이다. 1953년 베니 모레는 쿠바로 돌아와 그의 빅 밴드와 함께 그가 생을 마칠 때까지 활동했으며, 「Francisco Guayabal」과 같은 춤추기 좋은 곡도 녹음했으나 빠른 곡보다는 아름다운 볼레로에 좀 더 비중을 두어 활동했다. 특히 저음에서 순간 고음으로의 변화라는 그만의 독특한 발성, 드라마틱한 창법은 그의 볼레로를 더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이 또한 라틴 음악의 전통이 되었다. 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그는 쿠바의 국민 가수로 꾸준한 활동을 했다. 1963년 2월 19일, 럼을 지독히 즐기던 베니 모레는 결국 간에 문제가 생겨 사망했다. 물론 혁명이 일어난 후 미국과 단절을 하고 쿠바가 점점 공산주의로 향해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혹이 남는다.

그는 흥청망청, 럼과 사랑과 춤 그리고 음악으로 상징되는 쿠바 문화의 상징으로 쉽게 쿠바의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과 사상 그리고 체제로 대표되는 쿠바가 있다면 바로 그 이면에 너무나 자유분방한 쿠바가 있다. 음악을 가만히 들을 수 없는 사람들, 단 하룻밤이라 해도 뜨거운 열정이 이끄는 데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바로 베니 모레인 것이다. 현재도 그의 음악은 사랑받고 있다. 다시 말해 쿠바의 육체는 바로 베니인 것이다.

쿠바가 개혁/개방 정책을 쓴다고 해도 민간과 민간이 거래하게 되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쿠바가 중국의 과정을 거칠지 카리브 해의 물류 중심지가 될지는 계속 주목해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춤과 음악의 쿠바는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혁명의 상징이자 신화도 사라지고 쿠바의 정신이 사라져도 쿠바의 육체는 불멸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현지조사에서 가장 큰 감명을 준 것은 바로 이 쿠바의 육체에서 비롯된 공동체이다. 라틴아메리카 다른 도시, 특히 고산도시처럼 헤아릴 수 없는 별 무리 아래서 저녁을 먹고 난 쿠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이들은 커피를, 어떤 이들은 럼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하루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달걀을 빌려주기도 하고, 닭고기를 빌리기도 했고, 아이들은 모여 숙제를 하거나 간이 야구를 하며 놀기도 했다.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낯선 장면이었다. 우리에게 있었던 것, 그리고 현재는 부재한 공동체가 개념이 아닌 하나의 실체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어떤 사상이나 체제보다 강력한 감흥이 있었다.
 
땅에 선을 그어 자신의 소유를 표현하고 거대한 구조물을 지어 그 안에 스스로 들어가고 경비를 세워 자신의 소유를 지키며 자신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쇼핑몰에서 쇼핑하는 것은 어쩌면 굉장히 호화롭게 보일 수 있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골목마다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입구에 경비를 세우고 곳곳에 초소가 있고 정기적으로 순찰을 도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부촌은 어찌 보면 뒤집어진 교도소이다. 감옥의 감시망이 스스로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삶의 터전에서 재현될 때 부유한 죄수의 삶이 시작되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킨다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소외되는 것, 정서적으로 소외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역설, 부유한 죄수의 역설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쿠바에서 어떤 비전을 찾거나 현대 사회의 어떤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관타나모를 돌려달라는 라울 카스트로의 주장이 묘한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가 현명하게 다시 날아오르기를, 물질적 풍요가 정서적 공동체와 대체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1) 1997년 산따 끌라라로 체게베라의 시신이 돌아와 매장되었다. 산따 끌라라 전투 뒤 39년, 콩고혁명을 위해 쿠바를 떠난 지 32년 만의 일이다.
2)
그가 전 세계적인 아이콘 혹은 신화가 되기 시작한 것은 68년 혁명과 관련이 있다. 68년 혁명 주체들에게 체게바라는 다분히 상징성이 있는 혹은 68년 혁명의 낭만적 분위기에 최적화된 인물이 바로 체게바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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