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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인터뷰) 부탄 난민 문제와 네팔 정부의 입장

부탄 Biswo Kallyan Parajuli Tribhvan University Professor 2016/06/30

부탄에서 강제 추방당해 현재 네팔의 난민 캠프에서 임시 거주하고 있는 난민들은 “난민의 본국 송환 문제는 인도의 협력 없이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네팔과 인도 정부가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해 논의를 진행해 줄 것을 촉구했다.

위와 관련하여, Tribhvan University의 Biswo Kallyan Parajuli 교수에게 부탄 난민 문제에 대한 네팔 정부의 계획과 전망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Q1. 롯샴파(Lhotshampas) 족(族)이 부탄으로 이주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 세계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인간이 무리를 이루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주하는 현상이 매우 보편적임을 알 수 있다. 네팔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옛 문헌들 중에 “롯샴파(Lhotshampas)”라는 용어는 부탄의 남부에 위치한 두아스(Duars) 지역에 거주하는 네팔인들을 의미한다고 나오기도 하지만, 실제 이 용어는 네팔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롯샴파”의 어원은 “두아스에 거주하는 사람” 이며, 두아스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네팔인인 관계로 “롯샴파”가 네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인식되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두아스에는 네팔인을 제외하고도 최소 3개의 집단이 포함된 됐다고 생각한다. 롯샴파인이 부탄으로 이주한 사유를 정리해 보자면 크게 다음과 같다.

 

1) 문헌상 최초의 이주는 6~7세기 초에 있었다. 당시 이주민들은 손챈감포(Songtsen Gampo) 왕권에서 이주한 건축 장인들로, 파로(Paro)에 있는 키츄 라캉(Kyichu Lhakhang) 사원과 붐탕(Bumthang)에 있는 잠베이 라캉(Jambay Lhakhang) 사원을 비롯한 가장 오래된 사찰들을 건축하기 위해 이주했다.

2) 17세기에는 공예장인들과 무역상들이 주로 이주했으며, 이들의 수는 추후 19~20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수가 훨씬 더 많아져 정점에 달했다.

3) 그 이후에는, 사회기반시설 개발활동이 시행되면서 이와 관련한 건설부문의 인력 시장이 활성화되었고, 많은 인력들이 일거리를 목적으로 이주했다.

 

부탄으로 이주를 간 사유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롯샴파인의 출신성분은 실제로 다양하다.

현대 네팔은 1768년에 현재 네팔 지역을 통일한 왕정국가에서 시작되었다. 네팔 왕국은 인도동부회사(영국)와 분쟁을 벌였다. 1814년부터 1816년까지 네팔은 영국과 전쟁(Anglo-Nepal War)을 치른 후, 수가울리 조약(Sugauli Treaty)을 통해 국경선을 다시 획정하였다.

네팔-앵글로 전쟁으로 조성된 불안감으로 인해 일부 네팔인들 안전한 주거환경을 찾아 피난을 떠났고, 그 중 일부는 부탄으로 향했다.


피난민 중 일부는 수공예품 장인, 토목 기능공, 무역상으로서 부탄의 왕에게 발탁되었고, 나머지 난민들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노동자 생활을 택하였다.

필자의 전문적인 소견으로는, 현재 롯샴파인 중에서 피난 당시의 1세대 네팔인 난민들을 찾아보기란 극히 드물 것이라 본다. 지금의 롯샴파인 대부분은 부탄에서 태어난 2세대 혹은 3세대로, 더 이상 네팔인이라 부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네팔인을 포함한 다른 이방인들이 부탄으로 이주한 사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다.

 

1) 네팔-앵글로 전쟁으로 난민들이 생겨나기 이전에 이미 네팔 군주와 부탄 군주 사이에 무역상, 수공예 장인, 토목 기능공을 교환하자는 관심 의사와 협의가 사전에 있었고, 이들은 실제 전쟁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부탄으로 이주하여 롯샴파인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2) 네팔-앵글로 전쟁과 무관하게, 당시의 네팔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방인들 역시, 보다 나은 생계 수단을 목적으로 일거리가 많은 부탄으로 이주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3) 초기 정착민들은 200년 전인 1816년 당시, 수가울리 조약(Sugauli Treaty)으로 인해 기존의 국적과 무관하게 이미 부탄인으로 변경되어 버려, 누가 어디 출신이며 왜 왔는지를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수가울리 조약이 맺어진 원인과 롯샴파인 중 네팔인이 가장 많이 유입된 이유는 1814~1816년에 발생했던 네팔-앵글로 전쟁을 빼 놓을 수 없다.

 

Q2. 부탄 정부가 롯샴파를 업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억압, 착취, 경시는 항상 인권에 반하는 것이지만, 한 나라가 그들의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주민을 억압해야 하는 경우가 간혹  발생한다.

부탄은 작고, 바다와 접하지 않고 국가들 사이에 둘러싸인 개발도상국으로 국제무대에 많이 노출되지 않은 나라이다. 부탄은 1971년에 UN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부탄 거주자들의 언어적 특성과 문화적 특성을 구분하자면 남과 북, 두 가지 공동체로 나눌 수 있다. 부탄 북쪽에는 대다수가 불교인이고 티벳 종카어를 사용하는 반면, 남쪽에는 대다수가 롯샴파인이고, 인도-아리아 계열의 언어인 네팔어를 사용하고 있다.

부탄 정부는 1975년에 발생한 인도의 시킴 주(Sikkim) 합병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고, 네팔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다르질링(Darjeeling) 지역의 ‘고르카랜드(Gorkhaland) 운동’에 대해 더욱 우려했다.

네팔은 문화개방 정책을 채택하면서 복수정당 민주주의(multiparty democracy) 체계로 개혁한 후, 1990년대에 민주화 운동(democratic movement) 이후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으로 변화했다.

네팔의 입헌군주제 도입으로 인해 부탄 왕실은 위협을 느꼈다. 네팔인이 다수 거주하는 몇몇 지역에서는 급진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radical group)이 나서서 “위대한 네팔”이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는 부탄 왕실이 지향하는 사상적 단결에 위협으로 작용했다.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20세기 초인 1980년대 초반까지 네팔과 부탄 양국 사이에는 어떠한 민족적인 충돌도 발생하지 않았었고,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격차나 억압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분야의 사람들은 번영하고, 현대적인 부탄을 건설하기 위해 통함 하고 참여했다.

하지만 부탄은 민주화 운동에 성공한 네팔과, 네팔의 민주화 운동을 기뻐하고 지지하는 다르질링(Darjeeling) 지역 롯샴파인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르카랜드(Gorkhaland) 캠페인 활동이 점점 활발해지자 우려하기 시작했다. 부탄 왕실 입장에서는 군주제(Monarchy)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이 군주제는 당연한 것이며 왕실을 따라야 한다는 인식이 변하지 않아야만 했다.

부탄 정부는 1980년에 부탄의 문화 정체성 확립을 명분으로 “1 국가, 1 민족” 정책을 지시하고 반포했다. 부탄 정부는 “1 국가, 1 민족” 정책을 내세우며 국민들에게 전통 의상을 착용하는 것을 강요하고, 에티켓을 지킬 것과, 부탄의 공식어를 종카어로 공포하고 강요했다.

정부는 학교에서 네팔어 수업을 금지했고, 롯샴파인의 고르카랜드 운동에 반대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부탄 정부의 이와 같은 행동과 정책이 부탄에 거주하는 롯샴파인을 억압했다.
 
1985년에 제정된 “시민권 법률” 또한 롯샴파인을 차별하는 정책들로 이루어져 있다. 부탄 정부는 종카어의 보존과, 부탄 왕실을 민주화로부터 보호하고, 부탄의 민족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롯샴파인을 억압했던 것이다.


Q3. 현 부탄의 문화적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문화는 사회의 산물이다. 부탄 사회 또한 현대화와 세계화 과정에 매우 큰 영향을 받고 있다. 1990년대 초 부탄 정부는 모국어로 종카어 사용을 강요했고, ‘1 국가, 1 민족’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고(Gho)와 키라(Kira)와 같은 부탄의 전통의상 착용을 강요했다.

이러한 부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개의 국가가 현대화, 서양화, 세계화와 같은 국제적 대세의 흐름을 멈출 수는 없었다. 현대 교육 시스템을 통해 부탄은 극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있으며, 현재는 네팔어 대신에 영어와 서양 문화가 부탄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많은 부탄 청년들은 서양 국가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영어를 배우며, 네팔의 민속춤을 배우기 보다는 서양의 춤을 배우고 싶어한다.

변화는 부탄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회문화적 삶의 일부이다. 부탄 자체가 다문화국가이기 때문에 애초의 롯샴파족의 문화와 언어를 포용하고 이제까지 유지해 올 수 있었지만, 부탄이 부탄화 정책(Bhutanization policy)을 시행하게 되면서 롯샴파인들의 문화와 언어는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됐다.

필자는 정부와 국민들이 함께 부탄의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고 이를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탄 정부는 국민들과 힘을 합쳐 민족과 역사를 보존해야 한다, 왜냐하면 민족과 문화는 국민들이 만든 크나큰 자산이기 때문이다.

현 부탄 정부의 문화적 정책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롯샴파인들이 대다수 과거의 네팔출신이었지만, 지금은 부탄의 국민이다. 부탄 정부는 부탄화 정책을 강압적으로 강요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문화와 역사를 포용하여 부탄의 다문화국가의 특성을 국민들과 함께 지키고, 유지하며,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부탄의 다문화적인 특성을 이어 갈 수 있게 해야 한다. 부탄 정부는 한 국가에게 있어 국민들과 그들의 문화는 크나큰 자산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국민들의 편에서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부탄 국민들이 외국 이민을 떠나고 싶도록 하는 잘못된 방향의 문화적 정책보다는, 부탄 내부의 다양한 문화들을 서로 받아드리게 하는 문화적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부탄 정부에서 애초에 원했던 진정한 국민들의 문화적 단합, 부탄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Q4. 부탄의 난민 문제에 대한 네팔 정부의 입장은 무엇인가?

▲ 네팔과 부탄 모두 남아시아 국가이지만,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 국가는 아니다. 1990년대 초, 부탄정부의 부탄화 정책과 탄압으로 롯샴파인들 난민들은 인도 영토를 통해 네팔로 이주했다. 1990년  12월 12일, 부탄인 60명은 네팔 동부에 위치한 자파(Jhapa) 지역으로 망명을 신청하여 최초로 이주하였는데,  그 이후 망명자의 수가 10만명이 넘어섰다.

UNHCR(유엔난민기구)의 협조로 네팔 정부는 10만명이 넘는 난민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Humanitarian aids)을 제공했다. 몇 년 후, 망명자들 중 3만 6천여명은 네팔에 남게 되었고, 나머지 망명자들은 다른 국가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 일부 망명자들은 인도-네팔 국경에서 부탄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고, 인도 영토를 통해 네팔에서부터 부탄까지 긴 행진을 하며 본국인 부탄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인도 경찰들에 의해 탄압을 받으며 저지당했다.

인도 정부는 부탄 정부가 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국경을 지키며 불법으로 부탄에 밀입국하려는 무리들을 통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부분은 인도가 네팔에 있는 부탄 시민들의 문제를 도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네팔은 난민들을 3년 동안 수용했고, 1993년 부탄 왕과 네팔 총리(GP Koirala) 사이에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며, 그 후 4월 25일에 네팔 정부는 부탄에 정식 서신을 보내 난민 문제의 해결을 요청했다.

첫 회담에서 네팔의 Deupa 총리와 부탄 Dago Tchring 총리가 참석하 여 난민을 네 가지 유형로 나누는데 합의했다.

양국 간 공식적인 회담은 형식적으로 매우 느리게 진행되어 9년 동안 13차례만 진행되었고, 15번째 회의가 되어서야 난민 분류와 검증 방식에 대한 협의가 이루어졌다.

네팔 정부는 네팔에 상주하고 있는 모든 난민들을 네팔 동부 2개 지역에 위치한 7개 난민캠프로 이주시켰다. 2008년부터 국제이주기구(IOM)와 유엔난민기구(UNHCR)는 미국, 호주, 캐나다, 노르웨이, 네덜란드, 뉴질랜드를 포함한 여러 나라에 난민 재정착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현재까지 미국으로 75,000명의 난민이 보내졌고, 다른 국가에도 13,770명의 난민이 재정착했지만, 난민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재정착 프로그램은 망명 신청자의 수를 감소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들이 몇 대째 삶의 터전이었던 본국인 부탄으로의 귀환은 돕지 못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네팔의 외교정책은 문제를 해 결하기보다 오히려 국제사회에 난민 문제를 떠넘겼다고 생각한다.

1990년부터 현재까지 네팔 정부는 소극적인 모습으로 부탄과 긍정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네팔 동부지역에 위치한 난민 캠프는 그 지역 현지인들에게 오랫동안 아주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영향은 난민들이 귀향하거나 재정착을 하더라도 수년 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Q5. 부탄 이주 난민들의 정착을 위한 네팔 정부의 지원책 은 무엇이 있는가?

▲ 네팔은 다문화 국가로, 이들 대부분은 인도-아리아어 계열인 네팔어를 사용한다. 롯샴파인들은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네팔인들과 가깝기 때문에, 1990년대 부탄에서 추방되었을 때에 네팔을 망명지로 선택한 것이다.  이들은 망명 당시에 네팔 정부가 추후 자신들을 본국인 부탄으로 귀향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네팔로 이주했다.

네팔 정부가 해당 건과 관련하여 도움을 주고자 부탄 정부와 16차례에 걸쳐 회담을 기지기도 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롯샴파인의 부탄 송환에 대한 협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국 송환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돌아갈 곳을 잃은 롯샴파 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제3국에 정착하기 위해 이주되었다.

재정착을 할 수 있는 국가가 생겨난 것만으로는 결코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귀향에 대한 희망의 조짐이 없어지자, 재정착한 난민들 중 자살을 시도하는 몇몇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것은 그 동안 그들의 망명문제가 얼마나 힘들고 끔찍했는지에 대한 심정의 한편을 보여주는 것이다.

네팔 정부, 현지인, 인권 운동가 및 국제사회는 부탄 이주 난민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계속해서 제공하고 있다. 인권 운동가들은 난민들의 본국 송환 프로그램에 굳건한 지지를 표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음식, 의류, 의약품 등이 난민들에게 제공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네팔 정부는 네팔에 남아있는 난민들이 네팔에서 재정착할 수 있도록 주거지를 제공하고, 인도주의적 지원을 확장하고 있으며, 부탄 정부와 회담을 통해 협의된 데로 난민들을 분류하고 검증 하는 과정만 돕고, 나머지는 국제사회에 남겨둔 상태이다.

해외로 부탄 난민들을 재정착시키는 것은 본국 송환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에게는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필자 개인적으로 난민발생 문제의 근원지인 부탄에서 롯샴파인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네팔을 포함한 현 난민 수용 국가들이 그들이 송환할 수 있도록 외교적으로 도왔으면 한다.

※ 본 답변은 정식으로 인증되지 않았으며, 네팔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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