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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코소보 해방군(KLA) 특수 법정 설립에 대한 세르비아-코소보 간 입장 차

세르비아 최자영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HK 부교수 2016/12/02

지난 10월 25일 네덜란드 의회는 헤이그에 '코소보 해방군(Kosovo Liberation Army)'의 전쟁 범죄를 심판하는 특수 법정의 설립을 허가했다. 세르비아 측은 이번 법정을 통해 코소보 전쟁 동안 세르비아인들에게 피해를 입힌 코소보 해방군에게 죄를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코소보 국회의원 일부는 코소보 해방군의 활동이 광명정대(Just and fair)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위와 관련하여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최자영 HK 부교수와 코소보 해방군 특수 법정 설립에 대한 세르비아-코소보 간 입장 차에 대한 인터뷰를 실시했다.

 

 

Q1. 코소보 전쟁의 발발 원인과 진행 상황, 그리고 결말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달라.
코소보 전쟁은 1998년 2월 28일부터 1999년 6월 11일까지 코소보에서 벌어진 무장투쟁을 말한다. 한편에 당시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로 구성되었으며 이 전쟁 이전 코소보를 관장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과, 다른 한편에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공군(1999년 3월 24일 이후)과 알바니아 육군의 지지를 배경으로 한 ‘코소보 해방군(KLA)’로 알려진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항거집단 간의 무력분쟁을 말한다.
양측 간 갈등은 알바니아인 저항세력이 세르비아인들에게 무력을 행사하면서 전개된 것이다. 수년간의 긴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1998년 세르비아 정부가 유래 없던 강경 조치를 취하여 군대를 코소보에 투입함으로써 전쟁이 점화되었다. 세르비아 군대는 두 달 간 이어진 NATO의 공습이 있은 다음 코소보에서 물러났다.
이 전쟁은 쿠마노보(Kumanovo)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유고슬라비아와 세르비아 군대가 코소보에서 퇴각하고 다국적 군대가 들어오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 전쟁에서 NATO가 한 공습이 문제가 되었는데, UN 안전보장이사회의 허가를 얻지 않았고, 적어도 488명의 유고슬라비아 민간인 사망자를 냈기 때문이다. 희생자에는 코소보 난민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전쟁의 원인은 20세기를 점철하여 내려오던 코소보 내 세르비아와 알바니아계 주민 간의 긴장에 있다. 1차 발칸 전쟁(1912~3), 1차 세계대전(1914~18), 2차 세계대전(1939~45)을 거치면서 양측 간 긴장은 폭력적 충돌로 분출되곤 했다.
2차 세계대전 정전 이후에는 티토(Tito) 주도하의 사회주의 정부가 유고슬라비아 내 민족주의의 징후를 완전히 불식시켰다. 특히 티토 때에는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던 세르비아의 힘을 약회시켰다. 티토 사후 유고가 해체되었다.
1989년 5월 8일 밀로세비치가 세르비아의 대통령으로 즉위했다. 그는 1997년에는(1992년 4월 이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밀로세비치 치하에서 압박이 계속되자 알바니아인들은 무장투쟁만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다.

 

Q2. 코소보 전쟁 이후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관계에 대해 간략히 알려 달라.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지속되는 갈등 속에서 코소보의 불안한 지위는 UN으로부터 자치를 승인받던 2008년까지 지속되었다. 자치를 위한 협상은 2006년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1244호에 의해 결의되었고, 노력의 결과 마침내 2008년 2월 17일 코소보는 독립 선언을 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1244호 결의의 취지와는 달리 당분간 UN의 관할로 편입되어 코소보는 ‘감독 하의 독립’ 상태로 들어갔다. 
그 후 2008년 7월에 이르기까지 미국, 영국,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유럽국가 성원들이 협의 작성한 문안은 러시아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4번이나 수정 작성되었다. 이 때 러시아는 세르비아와 코소보 양측이 모두 찬성하지 않는 문안에는 러시아도 역시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코소보의 독립에 대해 세르비아는 여전히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2008년까지 세르비아의 한 행정구역으로 여겼다. 지금도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Q3. 세르비아-코소보 양국은 과거사와 관련된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나?
세르비아-코소보 간의 화해는 당사국이 직접 나서서 추진한다기보다는 국제사회의 여론과 감시 속에서 이루어져간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밀로셰비치 치하의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KLA를 테러 집단으로 간주했으나,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발칸 반도로 Robert Gelbard를 특사로 보내어 세르비아 정부와 KLA를 모두 싸잡아 비난했다. 그리고 당시에 미국은 KLA를 테러 집단으로 정의했으나, 1997년 미국에서 발행된 테러 집단의 목록에 KLA는 들어있지 않다. 그리고 미국은 KLA와 세르비아 사이에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중재의 노력을 기울였다.

 

Q4. 또한 국제사회는 양국 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어떠한 지원을 했는가?
2001년 스위스 정치가 Dick Marty는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에 ‘코소보해방군’에 의해 자행된 범죄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의 영향으로 의 <특별검사단 (SITF: Special Investigate Taskforce)>은 ‘인도주의 및 코소보 법률에 반하는 전쟁범죄’에 관련하여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결론지었다. 법정은 검사의 요청에 따라 증인들에게 적절한 보호조치를 제공할 수 있도록 코소보 교외에 설치되어 있다.
또 <전(前)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위원회 (ICTY: The International Criminak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는 약 20년에 걸치는 갈등에서 자행된 다수의 세르비아 장교들을 재판하여 유죄 선고를 내렸으나, 전반적으로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 인종 스스로 퇴거와 학살의 희생이 된데 대한 정의는 구현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화해의 노력은 동력을 잃고 <전(前)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위원회>의 신용은 특히 세르비아에서 추락한 상태다.

 

Q5. 코소보 내전에서 코소보 해방군(KLA)는 어떤 역할을 수행했으며, 당시 세르비아인들은 어떤 피해를 입었나?
전(前)유고슬라비아 내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5천 이상의 알바니아계인이 크로아티아와 무슬림 군사동맹과 함께 연합하여 저항했다. 비폭력 저항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부 알바니아 인들이 폭력의 저항으로 선회했다.
1995년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나 사이의 Dayton 평화협정에서 코소보 문제가 제외되었을 때 코소보의 루고바 지역의 상황은 참담해졌다. 젊은 코소보 인들은 자괴감을 갖게 되고,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이 폭력과 무자비를 통해 보스니아 내의 그들 자신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코소보는 왜 폭력을 사용하지 못하나 하는 점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KLA는 1991년 마케도니아에서 처음 형성되었고, 1995년에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무장의 저항을 시작했다. 그들이 공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6년 6월, 코소보와 메토히야(코소보와 접경한 서부)의 경찰서와 경찰들에 대해 행한 일련의 폭파행위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이다. 이 폭파 사건 이후 세르비아 정부는 KLA를 테러 단체로 명명했다. 1997년 이후 KLA는 세르비아 경찰과 공직자들을 공격했다.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군사시설을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경찰순찰대를 급습하고 또 세르비아 정부에 협조하는 알바니아인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그 간 벌어진 갈등을 통해 1만 명이 사망하고 1,700명이 실종된 것으로 전한다. 유럽평의회의 보고자 Dick Marty는 유괴, 고문, 장기적출 등의 3가지 범죄를 주장하고 있다.

 

Q6. 코소보 해방군에 대한 특별 법정이 지금에야 마련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코소보 이동특수법정>의 설립은 EU와 미국의 관심과 재정지원을 통해서야 비로소 현실화하게 된 것이다.
이 법정은 유럽평의회의 <2001 보고서>가 나온 이후 약 16년에 걸친 노력 끝에 2016년 1월 코소보와 네덜란드 양국 정부 간 서명이 있었고, 마침내 같은 해 지난 10월 25일 네덜란드 의회로부터 설립 허가를 얻게 됨으로써 법정의 개정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런 결실은 실제로 EU의 특별조사단(Special Investigative Task Force)이 KLA의 범죄상에 관련된 유럽평의회의 <2001 보고서>의 주장에 대해 3년간의 조사를 거친 다음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 간 EU와 미국은 코소보 정부로 하여금 범죄 책임자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헌법과 법률 개정을 하도록 코소보 정부를 독촉했다. 기존의 코소보 법정은 전 KLA 출신으로 현직 고위관직에 있는 자를 처벌하기 어렵고, EU의 법치사무를 맡고 있는 EULEX도 그럴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특히 KLA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 가운데는 코소보 현직 고위관료들이 적지 않은 실정이어서 이들을 처벌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코소보 대통령 Hashim Thaci를 포함한 고위 코소보 정치가들이 피고로 법정에 설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Hashim Thaci는 KLA의 전직 정치적 두목이었다. 유럽평의회의 <2011 보고서>에서는 Thaci에 대해 유죄혐의를 강하게 두고 있으나, 그는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신설법정 설립을 가능하게 한 코소보 법에 따르면, “어떤 관직자도 기소의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하다. 정부의 수장 혹은 고위관료라 하더라도 범죄의 책임을 면하지 못하고 감형되지도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Q7. 위와 관련하여, 세르비아와 코소보는 코소보 혁명군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며 특수 법정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나?
세르비아인은 물론 신설되는 <코소보 이동특수법정>(KRSJI: Kosovo Relocated Specialist Judicial Institution)은 KLA 투사들이 세르비아 인을 학살, 유괴, 불법감금, 추방했다고 주장할 것이나, 코소보 알바니아계 인들 측에서는 1998-99년 전투 중은 물론 그 이후에도 이들 코소보 내 세르비아계 인들이 세르비아 정부와 KLA의 적들에게 협조한 자들로 간주한다.
네덜란드 측에서는 전쟁범죄를 재판하는 데 대해 코소보 특이 반응은 민감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으며, “코소보 사회에서는 전범 혐의자를 자유의 투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고, 또 그에 관련하여 증인으로 나서려 하는 자는 위협을 느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재판이 국외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Q8. 이번 특수 법정 설립이 양국 간 관계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코소보인들에게는 신설되는 <코소보 이동특수법정>이 KLA과 세르비아 인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된다. 
<코소보 이동특수법정>의 설립에 대해 세르비아는 물론 반대할 이유가 없겠으나, 코소보 내부에서 의견이 갈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선 정부 차원에서는 반대 세력들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특수법정 설립에 찬성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2016년 1월 네덜란드, 코소보 간 정부차원의 서명이 있던 당시 KLA 사령관들을 추앙하는 일부 코소보 국적의 알바니아인들은 그들의 사진을 들고 특수법원 설립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Q9. 이번 특수 법정의 역할은 무엇이며, 향후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는가?
헤이그에 재판소를 설치하게 된 것은 EU, 코소보, 네덜란드 간 타협의 산물이며 운영경비는 EU와 그 외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로부터 조달될 예정이며, 전체 액수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네델란드 외무장관 Bert Koenders는 “정의의 구현은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우리가 재판소를 제공하게 되어서 기쁘다”라고 했으며, 안전-정의부 장관 Ard Van der Steuer는 정의는 구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법정은 다국적 재판관들로 구성되며 코소보 법에 준하여 설립된다. 코소보 외부에 있는 코소보 국가의 법정으로 국제재판소가 아니다. 최고 국제수준의 절차법에 따라 작동된다. 유죄선고를 받는 자는 네덜란드 내에서 복역하는 것은 아니다.
헤이그 시장 Jozias van Asrtsen은 평화와 정의의 도시 헤이그에서 법정이 개설되는 것을 환영했다. 

 

Q10. 세르비아-코소보 관계는 어떻게 변화할 것으로 예상하는가?
양국 간의 해묵은 갈등은 쉽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코소보 의회는 작년, 반대자들의 항거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전(前)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위원회>의 창설을 지지했다. 코소보 내에서는 알바니아계가 90%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수 세르비아계와의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2016년 1월 초에는 세르비아계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는 것에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신설되는 <코소보 이동특수법정>은 헤이그에 본부를 두고 있으나, 코소보 국가법정으로서의 기능을 갖는 것이 될 전망이다. 그리고 KLA 중 다수가 학살을 자행하고 정부 고위직으로 진출했다는 주장은 오래 전에 제기된 것으로서 이 문제도 이 법정에서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전망은 KLA을 영웅으로 보는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다수에게는 유감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코소보 간 관계정상화를 모색하는 데 있어서 <전(前)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위원회>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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