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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독립선언 10년, 코소보(Kosovo) 현황과 평화 정착을 향한 정치적 과제

중동부유럽 기타 김철민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학대학 교수 2018/04/02

독립 선언 10년, 코소보 민족 갈등의 어제와 오늘

 

올해 2월 17일, 발칸 반도의 대표적 분쟁 지역이자 신생 국가인 코소보(Kosovo)의 수도 프리쉬티나(Prishtina/ Priština)에선 수 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2008년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 선언 10년을 맞이한 기념행사가 치러졌다. 이날 행사에는 코소보 디아스포라(Diaspora)를 상징하는 영국 팝스타 리타 오라(Rita Ora, 1990- , 1991년 영국 이주) 등이 참여한 대형 콘서트와 함께 코소보를 국가로 인정한 나라 숫자를 의미하는 115그루 나무들을 심는 퍼포먼스가 열리는 등 독립 선언을 기념하였다. 한편 이날 행사를 거부하는 세르비아의 입장은 단호하다. 실제 행사 당일 이비차 다치치(Ivica Dačić, 1966- , 장관 2014- ) 세르비아 외무장관은 “코소보 독립 문제는 세르비아 동의 없이는 결론이 날 수 없음”을 강조하기도 했으며, 세르비아계가 다수인 코소보 북부 곳곳에도 ‘코소보는 세르비아(Kosovo je Srbija)’라는 포스터가 휘날리는 등 독립에 대해 세르비아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러한 상이한 반응처럼 현재 코소보는 UN등 국제 사회로부터 아직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등 여러 난제를 안고 있는 상황이다.

 

유럽 내 첨예한 ‘종교-문화적 단절’지역이자 ‘발칸유럽 민족 갈등의 십자로’에 자리한 코소보는 오랜 동안 세르비아인에겐 ‘역사 속 아픔’으로, 알바니아인에게는 ‘민족적 비극’으로 자리해 왔다. 그 배경의 시작은 15세기 오스만 터키가 세르비아 왕국을 몰락시키고, 이 지역에 이슬람으로 전향한 상당수 알바니아인들을 대거 이주시킨 뒤부터 시작된다. 6-7세기경 발칸유럽에 정착한 세르비아 민족은 코소보 지역을 중심으로 중세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217년 스테판 네마니치(Stefan Nemanjić, 1165-1228, 대족장 1196-1217, 왕 1217-1228) 시대에 들어와 비잔틴 제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왕국을 건설한 세르비아는 그의 동생인 성 사바(St. Sava, 1174-1236)의 노력으로 1219년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이때 이후로 세르비아인에게 코소보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과 맞먹는 성스러운 장소로  자리하게 된다. 그 배경은 세르비아 민족주의 원천인 중세 왕국 중심이 코소보에 자리했던 점과 함께 세르비아인의 정신적 구심점인 독립 정교회의 첫 번째 교구 개설 장소(페치, Peć) 또한 바로 코소보였던 이유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14세기 오스만 터키의 유럽 원정 가속화 속에 1389년 6월 코소보 평원에서 가진 세르비아 중심의 기독교 연합군과 오스만 터키 군과의 전투에서 세르비아 패전은 중세 왕국 몰락으로 이어졌고, 이때 이후로 세르비아인에게 있어 코소보는 민족 위기 때마다 민족 정체성을 일깨우는 ‘역사 속 아픔’으로 자리하게 된다.   


반면 알바니아인에게 있어 역사 속 코소보는 ‘민족적 비극’을 안겨준 곳이라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이 발칸을 장악하기 이전의 원주민인 일리리아(Iliria)인을 조상으로 여기는 알바니아인은 19세기 터키로부터의 독립을 추진하기 위해 수리된 프리즈렌(Prizren) 연맹을 이곳 코소보에서 시작하였고, 이것은 훗날 민족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후로 양차 세계대전 동안 세르비아 영향력 하에 편입된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수차례 독립 봉기를 시도하였지만 매번 세르비아 무력 진압에 의해 그 뜻을 이루지 못해왔다. 20세기 이후로 넘어오면서 코소보 민족분쟁이 국제사회에 알려진 계기는 사회주의 시절 동안 세르비아 한 자치주로 인정받아 온 코소보 자치권이 1989년 세르비아에 의해 강제로 상실한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세르비아에 의한 자치권 폐지는 1998년부터 확대된 코소보 내 알바니아인들의 시위와 저항, 그리고 이에 대한 세르비아 경찰들의 무력 진압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알바니아계 주민 1만명을 포함 약 1만 3천여명의 희생, 78만명의 난민을 낳게 된다. 이후 국제 사회의 관심 증대와 함께 마침내 1999년 3월 미국과 NATO군의 개입에 따른 코소보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20세기 마지막 국제 전쟁인 코소보 전쟁(1999. 03-1999. 06, 78일간)은 1999년 6월 10일 UN 안전보장이사회 평화안인 ‘SCR 1244 결의(Security Council Resolution 1244)’를 기초로 그 끝을 맺게 된다. 이후 코소보는 UN 결의에 따라 행정 분야에는 ‘코소보 UN 임시행정임무(UNMIK: The UN Interim Administration Mission in Kosovo)’ 부서가, 그리고 치안과 국방 분야에는 NATO가 주도하는 ‘코소보 평화유지군(KFOR: Kosovo Force)’이 각자 역할을 분담하여 코소보 평화 정착을 조금씩 실현해 나갔었다. 하지만, 2008년 2월 코소보 알바니아계의 독립 선언이후 이 지역을 둘러싼 국제 사회 분열 양상이 확대됨으로써 코소보는 다시 한 번 국제 사회의 주요 갈등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UN의 ‘SCR 1244’ 결의에 따른 제도적 조치들과 평화유지군의 역할이 비록 외적 평화를 가져오기는 했으나, 중세 오스만 터키 지배이후로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민족 간의 내적 아픔과 지난 코소보 분쟁 당시 겪어야 했던 고통의 상처들이 쉽게 치유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코소보 평화 정착 논쟁과 냉전 2.0 도래      

 

1999년 6월 NATO와 세르비아 간 코소보 전쟁이 종결된 이후 유럽 평화에 있어 코소보의 영구적 평화 구축 중요성을 EU, UN 등 국제 사회가 이해하고 이를 적극 지원함에도 불구하고, 2008년 독립 선언이후 코소보를 둘러싼 양 민족 간 평화 정착을 위한 ‘역사 화해 및 과거 청산’ 문제는 그리 큰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실정이다. 실제, 양측 간 첨예한 갈등 속에 2007년 12월 UN은 코소보 문제 해결 포기를 선언해야 했고, 곧 이어 2008년 2월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세르비아와 합의되지 않은 코소보의 일방적 독립 선언은 곧 바로 코소보 독립 인정을 둘러싼 국제 사회의 분열과 갈등으로 이어졌다.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 동안 이 지역 내 평화 정착과 민족 간 갈등 해결이 풀리지 않는 배경에는 ‘코소보 독립 문제와 그 미래를 바라보는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민족 간 조화의 단절’그리고 이로 인한 양측 간‘소통에 따른 합의 도출 실패’을 들 수 있다. 실제, 코소보 독립 문제에 대한 국제 사회의 반응은 크게 엇갈리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코소보 미래를 둘러싼 논의 및 합의점에 있어 국제 사회의 분열 양상을 낳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EU내 상당 국가들은 코소보의 독립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완전한 독립 국가로서 미래 코소보를 UN과 국제 사회가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역사적 이유와 민족적 정서로 인해 코소보를 포기하기 어려운 세르비아는 물론 소수 민족문제를 안고 있는 스페인, 그리스 등 유럽 일부 국가들 외에도 미국과 EU의 발칸유럽 영향력 확대를 견제중인 러시아 그리고 서구식 민주주의 확산에 따른 국가 주권 침해를 우려하는 중국 등은 미국 주도의 코소보 독립 움직임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2018년 코소보 독립 선언 이후 10년 동안 이 지역을 둘러싼 갈등은 마치 과거 냉전(Cold War)하 국제 역학 구도와 유사한 면을 지니며, 국제 사회 구성원들 간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중이다.  
 
국제 사회 구성원들 간에 코소보 독립 문제가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하는 배경은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역사 추론적 관점’에서 상반된 역사 인식에서 비롯된 민족 간 단절을 들 수 있다. 세르비아에게 이곳은 중세 왕국의 발원지이자 독립 정교회 발산지가 자리한 성지로 민족의 시련 시기마다 민족의식과 정체성을 고취시키던 장소였다. 반면 알바니아에게 코소보는 로마 제국의 지배 이전 이곳의 원주민인 일리리아(Iliria)인의 터전이자 고대 민족 기원의 중요 상징성을 지니는 곳이다. 둘째, ‘지전략적 관점’에서 신냉전(The New Cold War, 냉전 2.0)하에서 미국과 러시아 간 이해 영역(Interest Sphere) 확대의 새로운 각축장이 된 발칸유럽의 한 축 안에 코소보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문화적 민족주의 관점’에서 코소보 독립이 불러 올 대(大)알바니아주의 확산과 이에 따른 발칸 지역의 영토 갈등 재현, 그리고 유럽내 이슬람 문화권 확대와 분리주의 움직임 증대에 대한 국제 사회의 부정적 반응을 들 수 있다.    

 

단절의 역사를 화합의 미래로: 과제와 시사점

 

국제 사회의 바람과 달리 지난 2008년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한 10년 동안 이 지역을 둘러싼 단절과 갈등의 역사는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와 2020년 EU 가입을 국가적 전략 목표로 내걸고 있는 세르비아와 정치, 경제, 사회 분야 등 여러 어려운 현실 속에서 국제 사회의 지원이 절실한 코소보 알바니아 민족 간의 전략적 의견이 합치되면서 독립 문제 및 미래를 둘러싼 양측 간 소통 움직임들이 보다 가속화되는 것도 사실이다.

 

코소보내 민족 간 소통 확대와 사회 통합을 막는 가장 큰 요인은 앞선 양 민족 간 단절된 역사 인식에서 비롯된 다. 알바니아인들은 20세기 코소보 독립 운동들에 대한 세르비아의 탄압과 역사적 그늘을 여전히 잊지 못하는 반면에 세르비아인들은 2008년 독립 선언 이후 확대되는 코소보 정부의 세르비아 소수 민족에 대한 역보복 문제를 그저 바라만 봐야하는 고통 또한 자리해 왔다. 이런 가운데 국제 사회의 계속 된 관심과 EU 가입의 공동 목표를 가지고 양 민족 간 소통과 사회 통합 움직임은 비록 느리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상황이다.

 

현재 EU는 코소보의 영구적 평화 정착을 ‘EU 가입의 필수 조건(Sine-qua-non condition for the EU membership)’으로 내걸고 있으며, 이를 위한 노력들을 양쪽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다. 지난 2013년 4월 양측 간 관계정상화 구축을 위한 ‘브뤼셀 합의(Brussels Agreement)’이후 동년 6월 유럽 의회는 세르비아 EU 가입 협상 시작을 승인해 주었다. 이에 고무된 세르비아 정부는 “과거 굴레를 잊고, 미래를 보며 전진해 나가자”며 2008년 코소보 독립 선언 이래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아왔던 코소보 총선(2014년 6월)에 코소보내 세르비아계의 참여를 호소하는 등 현재까지도 양측 간 소통을 향한 여러 노력을 보이는 중이다. 더불어 2015년 8월 세르비아와 코소보 정부는 EU 중재 속에 관계 정상화를 위한 쟁점 합의에 도달하는 성과를 이를 수 있었다. 합의에 따르자면 코소보 정부는 코소보 인구 중 약 6%(13만명)의 세르비아계 주민이 다수 거주중인 미트로비짜(Mitrovića) 지역 등 코소보 북부 지역에 그 동안 반대해왔던 세르비아 언어 교육과 재정 자치권을 인정해주고, 그 대가로 코소보는 통신 주권의 상징인 국제전화통화 번호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세르비아의 이러한 노력들은 2018년 2월 독일 메르켈 총리의 언급처럼 세르비아의 EU가입에 긍정적 신호로 인정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코소보 정부의 외교적 변화로도 이어지는 중이다. 특히 코소보 정부는 제 4대 대통령인 아티페테 야햐가(Atifete Jahjaga, 1975- , 재임 2011-2016)이후 극단적 이슬람주의와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국제 사회 일원에 맞는 노력들을 진행 중이며, 부패 척결과 세르비아 등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국제 사회의 진정한 일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전히 양측 간 소통 정상화를 위한 난제들이 다수 자리하는 것 이 현실이다. 지난 1월 16일 코소보 세르비아계 정치인으로 온건파였던 올리베르 이바노비치(Oliver Ivanović, 1953-2018)가 괴한 총격에 의한 암살에서 보듯 여전히 코소보 독립을 강력한 부정해야 하는 세르비아의 정치적 현실, 그리고 계속된 경제 악화로 코소보 자립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속에서 코소보 독립 인정이 어쩌면 양측 모두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와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이 미래 평화 정착을 향해 과거 단절의 역사들을 하나 둘 치유해 나갈 수 있을지 그리고 민족 간 소통 작업과 사회 통합을 바라는 국제 사회의 노력들이 지속될 수 있을지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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