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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태국 국왕모독죄 쟁점 분석

박은홍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2018/04/05

태국 국왕모독죄 쟁점 분석

 

타이의 영자일간지 방콕포스트는 올해 1월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활동을 해온 차녹난 루엄쌉 일명 "까뚠"이 국왕의 BBC프로필을 그녀의 페이스북 계정에 공유한 혐의로 군 법령에 의해 체포되기 전에 망명했다고 보도했다. 그녀는 그 기사를 공유한 페이스북 사용자 3,000명 가량 중 형법 112조 위반 혐의로 입건된 두 번째 사람이다. 처음 입건된 사람은 콘깬에 수감된 자투팟 분팟타라락사 일명 “파이 다오 딘”이다. 차녹난은 자신이 군주제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형법 112조에 따라 기소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타이를 떠났다고 친구들에게 알렸다. “형법 112조에 의거해 2016년 12월 BBC 기사를 공유한 혐의로 저를 기소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남을 지 떠날 지를 결정하는 데 30분도 채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기에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이전에 차녹난은 국왕모독죄로 알려져있는 형법 112조가 반대자들의 목소리를 입막음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함께 행동했다. 이들은 국제연합(UN)과 국제인권단체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형법 112조에 우호적인 온라인 신문 프라차타이는 자사 기자와 차녹난과의 인터뷰에서 그녀가 2016년 12월, 새로운 국왕에 관한 이야기를 공유한 후에 소환장을 받았을 때 처음엔 왜 경찰이 자신을 소환했는지 어리둥절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시점에 자투팟은 형법 112조를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프라차타이는 차녹난이 아시아의 한 국가로 도피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프라차타이에 정확히 자신이 어디로 피신하고 있는지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거의 모든 분들이 나에게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결정을 내린 사람은 저입니다. 제가 결정을 위해 보낸 시간은 너무 짧고 빨랐습니다. 어려운 점은 제가 이 여정 후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갔습니다. 모두가 놀랐지만 동의했습니다. 누구도 단지 BBC의 새 기사를 공유했다는 이유로 저를 5년 간 감옥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처음 날, 저는 출구를 찾지 못해서 울기만 했습니다. 모든 것이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피신한 것이 옳은 결정인지, 아니면 돌아가 형을 마친 후 평소처럼 가족과 친구를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할지 자문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돌아갈 수 없다는 답을 얻었습니다.”

 

차녹난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페이스북에 새로운 국왕 와치라롱껀 국왕의 프로필에 관한 BBC Thai기사를 공유했다는 이유로 2016년 12월에 체포된 자투팟은 태국 동북부 지역 콘깬 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 형을 선고를 받고 현재 수감 중이다. 체포되던 당시 그는 콘깬대학교 법학부 학생이었고, 이 대학 학생들 중심으로 결성된‘다오딘’ 활동가였고, 군사정부에 반대하는 전국 조직인 ‘새로운 민주주의운동’(NDM) 회원이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현 수상인 프라윳 찬오차 총리가 콘깬지방을 방문했을 때 수잔 콜린스의 작품 <헝거게임> 속 저항의 상징인 세 손가락 경례를 선사해 체포된 경력도 있다. 그는 2016년 8월에는 군부가 주도한 개헌안 반대 유인물을 살포하다 투옥되었다.


이미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진 노동운동가 솜욧 프룩사카셈숙도 국왕모독죄에 해당하는 형법112조의폐지를 주장하다가 이 법을 위반한 죄로 11년형을 선고받았다. 2015년에는 한 남성이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키우는 개를 비꼬는 글을 SNS에 게재했다는 이유로 군사재판을 받기도 했다.

 

주목을 끄는 또다른 사건으로는 국왕모독죄로 망명길을 선택한 쏨삭 찌얌티라사꾼 탐마삿대학 역사학과 교수의 페이스북 게시물을 공유한 여섯 명이 형법 112조와 컴퓨터범죄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된 사례이다. 한때 부대 내에 억류되기도 했던 이들은 보석신청을 거듭 거부당했다. 구금 84일 후 쁘라웻 쁘라파누꾼을 제외한 모두가 석방됐다. 쁘라웻 쁘라파누꾼은 페이스북 게시물과 관련 국왕모독죄인 형법 112조를 10회, 내란선동죄인 형법 116조를 3회 위반한 혐의로 기소된 중견 변호사이다. 그는 국왕의 영향권 하에 있는 법원은 정당한 판결을 내릴 것으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법원 문서에 서명하거나 다른 법적 절차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 최초의 인물이다. 지난 해 4월 이후로 그는 구금되어 있고 오는 4월에 재판이 시작될 예정이다. 

 

군사재판에서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은 길고 처벌보다 더 무겁다. 이것은 피의자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우회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국왕모독죄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인권단체인 iLaw는 군사재판에서 많은 피고인이 처음에는 무죄를 호소했지만 대부분 그들의 생각을 바꾸었다고 보도했다. 이 단체에 따르면 2014년 쿠데타 이후부터 2017년 10월 초 사이에 형법 112조 사건 중 총 90건의 사건을 추적할 수 있었는데, 이 중 38건의 재판이 군사 법정에서 다루어졌다.


쟁점분석


형법 112조와 관련된 사건의 경우 정치적 상황과 매우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지난 2006년 쿠데타의 명분 역시 국왕에 대한 명예훼손을 군이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군사정부에 대해 비판적 성향의 시민운동가, 언론인, 학자, 정치인 등이 국왕모독죄 위반 혐의를 받았다. 이후 그 대상은 평범한 시민들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주로 소셜 미디어의 역할 확대로 인한 것이었다. 대부분 페이스북 게시글과 관련이 있었고, 각 게시물을 분리해서 다룸으로써 가혹한 처벌이 적용되었다. 지금까지 적용된 가장 가혹한 처벌은 2017년 자신의 페이스북에 10개의 게시물을 올린 당사자에게 선고된 70년 형이다. 2007년에는 국가입법의회(NLA)가 형법 112조롤 수정해 왕실자문기구인 추밀원 소속 위원까지 포괄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 개정안은 최종적으로 통과되지 못했다.

 

지난 2009년에서 2010년 사이 온라인 상에서 빠르게 확산된 마녀사냥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페이스북 집단은 극우적 성향의 SS(Social Sanction)이다. 지난 2011년 타이네티즌 네트워크는 이 페이스북 운영자가 왕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생각한 40명 이상의 개인 정보를 게시했다고 발표했다. 거론된 사람 중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또 일부는 기소당했다. 온라인 마녀사냥 현상은 감소했으나 라마 9세 푸미폰 국왕이 작고한 이후 보다 악의적인 형태로 다시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다.


지난 2010년에서 2012년 사이에 타이 내에서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으며 형법 112조 개정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서명 운동을 포함해 학술적, 문화적, 사회적 캠페인이 일어났다. 특히 일명 “아꽁”으로 알려진 암폰 땅나파꾼의 죽음을 계기로 형법 112조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평범한 시민이었던 그는 2010년 아피싯 민주당정부에 저항하는 ‘레드셔츠’의 대대적인 집회와 시위가 이루어지고 있던 시점에서 국왕을 모독하는 문자 메시지를 아피싯 총리의 비서에게 보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문자 발송 방법 자체도 모른다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지만 형법 112조 위반혐의로 2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옥사했다. 아꽁 사건은 “국왕, 왕비, 왕세자를 비방하거나 위협하는 자는 3년에서 최고 15년까지 형이 선고될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는 형법 112조, 국왕모독죄가 무분별하게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형법 112조 개정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전문가 집단은 카나니띠랏이다. 이들이 작성한 개정안은 처벌의 축소, 누가 소송을 시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 유죄 면제 사유의 확대라는 중요한 세 가지 변화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개정 초안은 의회에서 검토되지 않았다. 2011년 말에는 태국진실화해위원회(TRCT)가 형법 112조의 개정을 제안했다. 하지만 정부는 수용하지 않았다.

 

2014년 5월 22일 쿠데타가 일어나자 한때 정치적 비중이 컸거나 날카로운 정치비평을 한 사람들이 대거 해외 망명을 준비했다. 동시에 유엔의 경고를 받을 정도로 형법 112조 재판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국가평화질서위원회(NCPO)라는 이름을 내건 쿠테타 주역들은 지난 10년 기간 중 가장 많이 형법 112조를 적용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들은 경찰 조사 단계에서 중단된 사건들을 재조사했고,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통상적인 법적 원칙에 반하는 방법을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형법 112조 관련 사건들은 국가기관의 공무원들에게 “뜨거운 감자”로 간주된다. 초기 설립 날짜는 알려지지 않지만, 적어도 2009년 말부터 현재까지 타이 경찰은 국왕모독죄 조사위원회를 운영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위원회에는 경찰청장, 그리고 다양한 조직의 책임자들이 포함된다. 주요 운영 목표로는 모든 지역의 경찰이 형법 112조 및 컴퓨터 범죄법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함께 사건을 상세하게 보고하는 것이다. 그 후 위원회는 해당 사건이 법의 범위 안에 있는지 그 여부를 조사한다. 모든 형법 112조 관련 사건은 빠짐없이 모두 위원회에서 검토돼야 한다.

 

지난 10년 간 재판에서 형법 112조에 대한 두 부류의 비판이 있었다. 예외적인 사례를 빼고 대부분 보석신청이 거부된다는 점, 사건이 비공개로 조사되고 형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점 등이 첫 번째 비판의 유형이다. 두 번째 유형의 비판은 판사들이 보수주의적이고 존왕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두 번째 비판과 관련하여 인권단체 iLaw의 한 활동가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나는 판사의 태도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판사에게서 보게 되는 것은 두려움이다.” “무엇을 두려워하겠나? 재판관도 사람이다. 내 생각에 그들은 사회로부터 비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정치적 문제가 되는 것, 선임 재판관으로부터 비난 받는 것, 조사위원회가 그들을 조사하는 것, 각종 비난이 그들을 향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 후 각각의 사람은 각자의 두려움을 다르게 다룬다. 몇몇은 조용하다. 몇몇은 분투한다.”

 

판사의 독립성 문제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사법부와 왕정이 오랫동안 얽혀 있는 방식으로 설립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절대군주제 시기 재판을 결정짓는 최고권력은 국왕이었다. 라마 5세 쭐라롱껀 대왕 통치 시기 강대국들의 근대식 사법부를 두라는 압박 하에서, 법무부가 1892년에 설립 되었고 모든 법원을 그 산하에 두었다. 이 과정에서 라마 5세의 14번째 아들인 끄롬 루엉 랏차부리 디렉크릿이 태국 사법제도와 법을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1932년 입헌혁명을 계기로 절대군주정은 입헌군주정으로 바뀌었고, 자연히 국왕은 헌법의 지배를 받게 됐다. 이를 계기로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선거에 의해 선출 됐다. 그러나 사법부에서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사법부가 어떤 민주적 개혁도 겪어본 적 없는 구식이라는 비판의 배경이다. 

 

전망


법조인 중에는 색다른 시각에서 형법 112조 개정 불필요론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일단 112조 사건이 비민주적 사고를 하는 재판관에 의해 다루어졌다는 시각인데, 이는 사법부의 존재 이유가 왕실 수호에 있다는 존왕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보면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들에게는 민주주의보다는 존왕주의를, 가진 것 없는 민중 중심의 역사보다는 위대한 영웅 중심의 역사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을 개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법을 해석하는 사람과 그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 어떻게 시행되는지에 달려 있다. 그것은 법원이 체제의 도구가 되는 것에 대해 말했던 것으로 되돌아간다. 당신이 법원을 바꾸길 원한다면, 당신은 정치적 변화를 만들고 스스로 요구해야 한다.” 이는 현재의 타이 정치체제가 절대군주제적 요소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형법 112조 사건은 정치적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을 비정치적이라고 볼 수 없다. 문제는 법 자체가 아니라 법이 광범위하게, 아니면 좁게 해석되는지에 있다. 형법은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할 수 있기 때문에 좁게 해석되어야 한다.” “일부 판사는 자유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현재와 같은 구조에 오래 있다보면 그들의 사고와 세계관에 변화가 있게 된다.” 

 

라마 9세 푸미폰 국왕의 신성화와  ‘타이식 민주주의’ 등과 같은 발상은 20세기 초에 타이 민족주의 이론의 초석을 깔은 라마 6세 왓치라웃 국왕의 절대군주제에 대한 정당화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서구 의회민주주의의 도입이 시기상조라고 본 왓치라웃은 타이 사회에서 국왕은 인간 사회에서의 상호 불일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무이의 절대적 존재이자 어떠한 이에 대한 도전도 불가하다는 논리를 펴면서 헌정체제의 도입을 거부하였다. 헌정체제의 도입이 유럽에서는 득이 될 수 있어도 타이 사회에는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위스콘신 대학의 타이인 역사학자 통차이 위니차꾼 교수는 푸미폰 국왕을 지칭하는 현대판 국왕의 경우 1947년 이후 군부독재와 함께 등장했고, 개발을 주도한 군부 독재 하에서 힘을 키웠으며, 1973년 군부 독재 정권이 붕괴되면서 확고하게 성공을 거뒀다고 주장한다. 현대판 국왕은 이후 왕실의 안위를 강화하고 정치 위에 군림하면서 대중에게 사랑 받는 신성한 왕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21세기 타이에서는 100년전 라마 6세가 이론화한 타이 국가 정체성으로서의 ‘국가, 종교, 국왕’ 삼위일체론에 근거한 ‘타이식 민주주의’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이것이 바로 국왕에 대한 불충은 반국가 행위라는 110년 전에 만들어진 국왕모독죄의 정당화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형법 112조가 국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작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군부와 사법부의 지지 뿐만 아니라 70년이라는 최장의 재위를 기록하면서 2016년 10월 13일에 작고한 라마 9세 푸미폰 국왕의 개인적 도덕성과 카리스마로 이루어진 문화권력의 위력도 있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따라서 새로운 국왕 라마 10세가 라마 9세가 공들여 일군 문화권력을 온전히 계승하지 못할 때 형법 112조에 대한 저항의 수위가 자연스레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곧 ‘승계의 위기’(crisis of succession)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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