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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유럽연합 언어 정책과 불가리아의 언어 정체성

중동부유럽 일반 / 불가리아 이하얀 한국외국어대학교 EU연구소 책임연구원 2018/05/16


몇 년 전 유럽연합과 불가리아는 언어적인 문제, 'EURO'의 철자 표기법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불가리아는 유럽연합의 공용 화폐인 유로의 공식 표기인 ‘EYRO’ 대신 불가리아식 표기인 'EVRO’로 유지할 수 있도록 유럽연합에 요청하였다. 하지만 유럽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과 유럽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EURO'라는 단어가 표준화되어야 함을 명시하며 다른 회원국들과 발음을 통일하여 ‘EYRO’로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불가리아 정부는 'EVRO'가 이미 1995년 언어학자들에 의해 공식화되어 불가리아 언어의 일부가 되었고 불가리아어로 유럽을 의미하는 단어가 ‘EVROPA’이기 때문에 유로가 ‘EYRO’라는 단어로 도입되게 되면 이는 불가리아 언어 정체성을 흔드는 완전히 새로운 단어가 되기 때문에 불가리아의 예외적인 상황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유럽연합은 불가리아의 편을 들어주었고 2007년 리스본에서 열린 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 불가리아는 2007년 12월 13일부터 유로 표기를 불가리아의 끼릴 문자 철자법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유로의 앞면에는 라틴어 ‘EURO’, 그리스어 ‘ΕΥΡΩ’ 그리고 끼릴 문자’ЕВРО’가 함께 표기되어 있다.


불가리아 정부의 주장처럼 언어는 국가의 정체성과 일치한다. 국가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인간에게 언어는 철학이고 사상이며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언어와 정체성을 분리할 수 없다. 유럽연합은 회원국 개별국가의 언어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동시에 다중언어 구사 가능 노동력이 더 많아지길 원한다. 유럽연합은 다중언어 구사가 회원국 시민들의 교육, 직업, 경제 분야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는데 유리한 작용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하며 다중언어 정책(multilingualism)을 통해 언어 다양성을 증대시키고 다문화 간 이해도를 높이고자 한다. 본 원고에서는 유럽연합의 다중언어 정책과 실제 불가리아의 언어 사용 현황을 살펴보고 문제점을 분석해 보겠다.


유럽, 다양한 언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


유럽연합은 2007년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그리고 2013년 크로아티아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여 총 28개 국가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성 속의 통일(Unity in diversity)’을 기조로 모든 개별 회원국가의 언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였고 현재 공식 언어는 24개이다. 몇 개의 언어가 두 개 이상의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공식 언어 수보다 회원국의 숫자가 더 많다. 유럽연합 기관의 모든 결정문은 공식 언어로 번역되며, 모든 공식 언어로 유럽연합 기관에 연락이 가능하다. 유럽연합 공식 홈페이지에 방문하면 첫 페이지에 모든 공식 언어가 명시된 24개의 배너를 통해 회원국 각국의 언어로 된 유럽연합 공식 홈페이지를 만날 수 있다. 1957년 로마조약에서 ‘언어는 모든 경제활동의 매개체’임을 명시하였고 공동체 역내에서 자유롭고 제약이 없는 경제 활동이 가능하게끔 ‘초국적 경제 활동에서 자유로운 언어 사용’ 원칙을 도입하였다. 당시 공식 언어는 회원국들의 모국어인 네덜란드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총 4개였다. 회원국이 늘어남에 따라 공식 언어 숫자 또한 추가되었고 2013년 크로아티아어를 추가하여 총 24개가 되었다. 공식 언어 이외에도 유럽연합 역내 4천만 명이 사용 중인 60개가 넘는 소수민족 언어와 지방어가 존재한다. 까딸루냐어, 사미어, 바스크어, 프리슬란트어, 이디시어, 웨일스어가 여기에 포함된다. 또 유럽연합 역내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고 판단되나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로마어(집시어)와 이주민들이 사용하는 언어 등이 유럽연합의 언어 다양성을 증대시키고 있다.


유럽, 모국어 +2개 언어 정책 펼쳐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발효된 이후 경제, 정치, 사회, 문화, 교육분야에서 공동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회원국 간 교류가 증대되며 자연스럽게 다중 언어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유럽연합 회원국 시민들 간 상호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필수적이며 이는 곧 유럽통합을 공고히 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이에 유럽평의회 언어분과와 각국의 연구자들은 다중언어 교육 정책을 수립, 추진하여 회원국 시민들이 서로의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경험하며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유럽연합의 기조인 다양성 속의 단일성을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유럽연합은 각국의 언어를 존중하는 동시에 회원국 시민들이 다중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모국어+2개 언어(Mother Tongue+2)’ 정책을 펼치고 있다.


유럽연합이 회원국 시민들에게 다중 언어 학습을 장려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언어 능력의 향상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해외에서 공부하고 일할 수 있으며 더 좋은 직업 전망을 기대할 수 있다.

-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면 타 문화의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다문화, 다국어를 갖고 있는 유럽에서는 필수적이다)

- 유럽 전역에서 효과적인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다중언어를 구사하는 노동력이 필요하다.


위 정책을 장려하기 위하여 유럽 언어 개인 학습자 평가의 명확성과 국가별 언어 습득 정도를 측정할 수 있도록 유럽 언어 공통 기준(Common European Framework of Reference for Languages; CEFR)을 마련하였다.  또 에라스무스 플러스(Erasmus+, European Region Action Scheme for the Mobility of University Students)   프로그램을 통해 회원 국가 내 학생의 이동과 교류를 증진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이와 같은 유럽연합의 노력으로 다중 언어를 구사하는 회원국 시민의 숫자가 과거보다 증가하였다. 2014년 유로바로미터 통계에 의하면, 회원국 시민의 54%가 모국어 이외에 하나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답했다. 또 회원국 시민 중 25%는 두 개의 외국어로, 10%는 3개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미 다중언어 사용 정책은 유럽연합 시민들에게 낯설지 않다. 하지만 유럽연합 역내 다중 언어화자 수가 증가하는 추세 임에도 실질적으로 언어 학습이 짧은 시간 내에 결과를 도출할 수 없고 영어를 중심으로 하는 언어 습득이 이루어지고 있는 문제점이 있다. 그 결과 유럽연합 회원국 시민들 간, 그리고 유럽 집행위원회 등 유럽연합 기관 내에서도 영어가 사용되는 영어의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유럽연합은 이 현상을 인정하면서 영어가 유럽연합의 언어 다양성을 해치는 요소가 되지 않도록 언어 다양성의 새로운 방향 설정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불가리아, 다국어 사용빈도 낮고 언어 폐쇄성 높아


이제 불가리아의 실제 언어 사용 현황에 대해 살펴보자. 불가리아는 사회주의가 붕괴한 지 약 30년의 세월이 흘렀고 유럽연합에 가입한 지 10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른 국가들에 비해 다중언어 사용에 있어서 폐쇄적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2011년 통계에 따르면 불가리아의 공식 언어는 총인구의 85.1%가 사용하는 불가리아어이다. 그리고 터키어가 9.13%, 로마어(집시어)가 4.24% 그리고 러시아어, 루마니아어, 아르메니아어 등이 1.8%를 차지한다. 물론 로마인 인구 센서스 조사가 정확히 이루어지지 않는바 실제 로마어 사용 비율은 실제 수치보다 더 높을 것으로 예상한다.


다중언어 사용을 어렵게 하는 첫 번째 장애물은 불가리아어의 끼릴 문자 사용이다. 끼릴 문자는 10세기경에 고대 교회 슬라브어를 적기 위해서 초기 불가리아 제국 시대에 개발된 것으로 864년 보리스 1세가 이 문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오스만튀르크의 5세기에 걸친 지배에도 불가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지켜냈다. 불가리아인들은 고유 문자 사용이 국가를 강력하게 단결시켰고 공통된 국민 정체성을 만들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사회주의 시절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외국어인 러시아어 또한 끼릴 문자를 사용했으므로 불가리아인들 입장에서는 체제 변환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로마자 알파벳이 어색할 수밖에 없다. 시장경제 체제로의 변환, 유럽연합 가입 등으로 불가리아와 타국가들 간 인적, 물적 교류가 증대됨에 따라 2009년 2월에 로마자 표기 음역법이 채택되었다. 공공장소에서 로마자 사용의 의무화되었지만, 여전히 일부 관광지에서만 로마자를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하루에도 300명이 넘는 외국인이 찾는 불가리아 이민국에서도 조차 로마자 표기는 안내문, 서류 등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또 각종 미디어에서의 다중 언어 매체 발행은 여전히 다국어 사용에 따른 국가 정체성 일치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신문, TV방송, 라디오에서도 다중 언어 병용이 어렵다. 현재는 각종 미디어들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영어 버전으로 만들어 중요 정보들을 영어로 제공하고 있지만, 다중언어 신문 발행은 한정적이다.


오스카상 후보작이었던 불가리아 영화 ‘더 넓은 세상 속으로(The World Is Big and Salvation Lurks Around the Corner)’는 외국어 자막 제공 없이 불가리아어로만 상영 및 배포되어 영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많은 외국인 관객들의 원성을 자아냈다. 불가리아 TV 속 해외 드라마와 영화들은 대부분 불가리아어로 더빙되고 일부만 더빙 없이 불가리아어 자막을 삽입한다.이처럼 현재 불가리아에서는 불가리아어, 끼릴 문자 사용이 지배적이지만 다중 언어 사용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


니다. Eurostat의 통계에 의하면 2011년 불가리아 시민의 24%가 모국어 이외에 하나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답했다. 또 불가리아 시민의 11.7%는 두 개의 외국어로, 2.8%는 3개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세대별로 구사 가능한 외국어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55세 이상 장년층 불가리아인들은 러시아어(10.2%)를 압도적으로 사용 가능하고 독일어(3.7%), 영어(2.7%)가 뒤를 잇는다. 35세 이상 54세 이하 중년층은 러시아어(10.9%), 영어(9%), 독일어(2.4%)로 러시아어와 영어를 비슷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5~34세의 젊은 불가리아 세대들은 영어(26.7%)를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러시아어(5.2%), 독일어(4.1%) 이외에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 폴란드어 등 유럽연합의 공식 언어 사용 수치가 통계에 등장하였다. 세대별로 주 다중 언어 사용이 다른 이유는 시대, 역사적 배경에 따라 설명이 가능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불가리아는 소비에트 연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학교에서 러시아어 교육은 의무적이었다. 러시아어 이외에 다른 언어에 대한 교육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체제 변환 이후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독일어와 영어를 중심으로 다중 언어 교육을 시작하였다. 유럽연합 가입 후 유럽연합의 다중언어 교육 정책의 일환으로 공교육에서 영어, 독어, 스페인어 등 유럽연합 공식 언어뿐만 아니라 아랍어, 일본어, 한국어 등 언어 학습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어린이와 젊은 층을 대상으로 다양한 다중 언어교육 프로그램들이 운영되었고 불가리아인들 사이에서는 다중 언어 능력 향상이 해외 진출을 용이하게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져 언어 학습에 열을 올리고 있다. 공교육에서뿐만 아니라 불가리아 전역에서 사설 언어 학습 기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불가리아인들 사이에서 세대별로 제각기 다른 다중 언어가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불가리아 사회 내 언어 다양성이 증대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럽연합 가입 전보다 다중언어 구사 가능자 비율이 대폭 줄어들었으며 또 이는 유럽연합 평균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다국어 사용,  다문화 수용  및 경제력 증진시킬 수 있어   


다중언어 교육은 나와 다른 언어, 민족, 사회문화, 정체성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고 소수자에 대한 존중 등 민주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가치를 함양시킨다. 또 국경이 사라지고 무역 장벽이 낮아지는 현상이 확대된 오늘날, 불가리아 시민의 다중언어 구사 능력은 개인에게는 고용의 기회와 가치를 향상시키고 국가 차원에서는 상품의 가치와 수출 잠재력을 높여 국가 경쟁력을 강화시킬 것이다.


현재 불가리아 정부는 외국인 투자 장려법 개정 및 외국인 체류 관련법 개정 등을 통해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하며 외국인투자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또 불가리아에서는 저렴하고 숙련된 노동력 확보가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불가리아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유럽 내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반면 로마 민족을 제외한 일반 국민들의 문맹률이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교육 수준이 높다. 게다가 노동생산성은 폴란드와 체코 등 다른 중동부 유럽 국가들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본적인 언어와 의사소통 문제는 불가리아 진입장벽을 높게 만든다.


불가리아는 자신들의 언어 정체성을 고수하면서도 유럽연합의 회원국으로서 유럽연합과 기치를 함께 해야 한다. 다중 언어의 집중적인 교육과 로마자 병용은 다문화를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는 불가리아 내 다문화 수용성을 증진시키는 동시에 선주민과 이주민의 역량을 강화시켜 궁극적으로 경제를 부강하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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