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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개헌 국민투표, 쿠바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정치적 의미와 전망

중남미 기타 정이나 前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現쿠바 아바나 의과 대학 연구교수/ 2019/04/11

지난 2월 24일 쿠바에서는 헌법 개정안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묻는 이른바 개헌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이후 약 1주일 뒤 발표한 쿠바 선거관리위원회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투표에 참여한 국민은 전체 유권자의 90.15%에 이르는 약 786만 명으로 나타났다. 이중 87%인 680만여 명이 개헌안에 찬성함으로써, 개헌안 반대를 선택한 유권자 비율이 9%임을 고려하더라도 이번 개헌안은 쿠바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된 셈이다.


이번 개헌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쿠바 사회주의 체제의 본질적인 변화의 가능성에 염두에 둔 관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유 재산법을 시작으로 외국인 투자 허용이나 경제활동의 제한 조치,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경제에서 국가의 역할과 기능 및 그 범위를 규정하는 내용 등은 여전히 쿠바 체제의 성격을 이루는 주요 기준들인 만큼 이에 관한 관심이 유독 높았다.


그러나 이번 쿠바의 개헌 과정에서 저자의 관심을 유독 끈 대목은 무엇보다 어느 국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국민의 높은 정치적 관심과 사회적 참여였다. 쿠바 정부의 개헌 위원회가 초안을 작성하고 이를 국민투표에 부치기에 앞서 2018년 8월 13일부터 11월 15일까지 전국 규모의 광범위한 국민 공청회가 열렸다. 약 2개월간 국민공청회는 총 133,681회가 개최되었는데, 이중 전체 국민 대상 약 79,452회, 노동조합 및 농민조직 대상 48,893회, 그리고 대학을 포함한 중등 교육 과정에 있는 학생 대상 약 4,000회의 개헌 토론회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개헌안에 대해 직접 제기된 문제와 이견 및 제안 등을 바탕으로 새롭게  의제화된 사안들이 약 80만 건에 이른다. 이는 개헌안에 사용된 각 문장의 단락, 표현, 단어 등에 대한 점검 및 이의 제기 등과 같은 아주 상세한 내용까지 포함한다. 그 결과 개헌안에 대한 수정 사항은 약 67만 건에 이르고, 추가, 삭제 및 보류 건이 각각 3만 건, 5만 건, 4만 건에 달하여 개헌안에 대한 쿠바 국민의 높은 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쿠바 선거 관리위원회에서는 해외에 체류하는 쿠바 국민을 대상으로 개헌 공청회를 실시하며 의견을 수렴했다. 그 결과 약 2만 건의 의제들이 해외 거주 쿠바인들에 의해 제출되었고, 수정 약 1,100건, 추가 약 350건, 삭제 약 400건, 그리고 보류 건이 약 200건에 이르렀다.


국내·외 개헌 국민 공청회에서 다루어진 내용과 의제 등은 최종적으로 약 10,500건(국내 9,595, 국외 978)의 의제들로 재수집·분류되는 작업을 거쳤다. 그리고 2018년 9월 28일 라울 카스트로를 수반으로 주요 기관장(19명)을 포함해 약 30명으로 구성된 개헌 특별 전담 위원회는 국민 공청회에서 수렴된 내용을 기반으로 개헌안을 최종 점검·수정하는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내 개헌 국민 공청회에서 제기된 9,595 의제 중 약 50.1%의 내용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고, 국외에서 제출된 의제 978건 중 총 391건이 수렴되면서 약 40%에 해당하는 반영률을 나타냈다. 특히 이번 개헌안에서 국민의 관심이 가장 높았던 사안은 동성 간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이른바 결혼 제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쿠바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의 선출, 임기 및 자격 요건, 그리고 노동과 임금, 지방단체장 선출 방식, 형사 소송의 법적 지위 보장 및 ‘적절한’ 주거환경 권리 등의 순으로 국민의 관심이 표출되었다.


동성 간의 결혼과 자녀에 대한 법적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문제는 전체 국민 공청회에서 다루어진 의제의 약 25%에 해당하는 만큼 국민 간에도 적지 않은 논쟁과 이견이 높았던 사안이다. 결혼에 대한 새로운 정의, 더 나아가 법적 지위 및 성적 평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한 만큼 이에 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던 내용이었다. 결국 결혼에 대한 정의를 재정립하고 성별에 의해 그 어떤 사회적 권리를 차별받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원칙에 근거하여 동성 간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개정되었다.


물론 이 조항에서 다루어지는 결혼제도라는 것은 단순히 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구성하고 그에 대한 의무와 권리가 성별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 즉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포괄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쿠바에서는 1976년 헌법이 제정될 당시 동성 결혼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 평등한 결혼제도를 전면적으로 제안한 바 있으나, 결국 헌법에는 반영하지 못한 경험이 있다. 만약 당시 쿠바 혁명에 가담했던 여성 게릴라 출신의 빌마(Vilma)의 제안이 1976년 헌법에 반영되었다면 어쩌면 쿠바는 세계 최초 동성 결혼을 인정한 국가였을 것이라는 쿠바의 한 여성 운동가의 주장은 인상적이다. 이번 동성 간 결혼을 허용하는 결혼제도 개정안에 대한 높은 관심과 기대감을 함께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처럼 쿠바 개헌에 대한 일반 국민의 관심이 일상과 밀착된 사안들에 다소 집중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따라서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이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권리이자 사회적 의무로 정의되는 노동,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임금 문제 등이 포괄적으로 다루어진 것이 당연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쿠바는 지난 2월 24일 실시된 국민투표를 마지막으로 약 40여 년 만의 개헌을 사실상 마무리가 되었다. 주지하듯이 쿠바는 사회주의 체제이다. 서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지향하는 자본주의 체제와는 기본적으로 사회의 구성과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번 쿠바의 개헌 과정을 보면서 사회주의 체제가 독재국가나 반(半)민주주의 체제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공식은 냉전의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소위 독재 정권이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착실히’ 유지했던 국가는 역사적으로도 많다. 칠레의 피노체트(Pinochet) 군부정권이 신자유주의의 선봉에 섰던 국가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쿠바 체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비추어 정치적 자유가 없는 사회로 단순히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쿠바 국민이 공유하는 사회적 가치, 규범, 질서, 규칙 들을 판단하는데 굳이 서구의 기준이나 잣대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이번 개헌 과정에서 드러난 쿠바 국민의 높은 정치적 참여는 약 2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진행된 국민 공청회를 통해 보장되었고, 이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 의제화되는 내용, 그리고 의견이 수렴되는 방식까지 모두 직접 민주주의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개헌 투표에서는 청년 유권자 수가 290만에 이르면서 전체 투표의 35%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들 중 선거 연령인 16세가 되어 생전 처음으로 투표에 참여한 사람은 약 13만 명에 이른다. 청년 유권자들의 높은 투표율은 과거 인터넷은 물론 국제사회로부터 다소 고립된 환경에 처해 있었던 세대와는 다르게 국내·외 개방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세대의 정치 참여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이러니하게도 쿠바 개헌에 대한 주변국들의 주요 관심은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 정도와 이에 따른 체제 변화 예측에 집중되어 있었다. 반면 쿠바 국민은 현재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이나 정치 제도와 같은 쿠바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요구보다 오히려 권리, 평등, 그리고 인간 중심의 사회적 정의와 가치를 더욱 공고히 하고, 이를 위한 국가의 역할과 의무를 헌법적으로 명시하는 데 집중하였다.


특히 중앙 집권화된 정치권력을 분산하고 행정기능과 절차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과거 대통령이 임명하던 도지사직을 선출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포함, 시(市)정부의 기능과 독립성을 대폭 강화하여 예산 집행은 물론 행정 결정권을 확대했다. 이는 시장을 선출하는 것은 물론 시정부의 주요 행정기능의 독립성을 보장함으로써 지방의 실질적인 권한 행사가 자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 국민의 적극적인 요구를 반영한 개정안이었다.


한편, 사회의 취약 계층과 장애인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역할, 재활환경을 제공하여 사회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하는 의무 명시 등 확대된 국가의 의무와 더불어 쿠바 국민에게 의무보다는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를 더욱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경제 분야에서는 국영기업 운영의 자율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국가 경제 운영에 있어 관리, 경영, 기획 등에 노동자 참여를 확대하고, 쿠바 경제 발전을 위한 수단이 되고 적합한 기준이 갖추어진 경우에 한하여 외국 자본의 투자를 보장하는 내용도 함께 반영되었다.


사유재산은 이미 인정되었다. 2011년 행정명령 288호는 거주하는 주택에 대한 등기권을 인정함으로써 사망, 이혼, 이민 등에 따른 소유권 이동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행정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실행된 법안이었다. 따라서 최근 개헌에 명시된 사유재산 인정은 이미 변화된 쿠바 사회의 일면을 반영한 내용이지 전혀 새로운 조항이라고 할 수 없다. 즉 쿠바에서는 이미 2011년 행정명령을 통해 주거 주택에 한정된 소유권 이전의 자유, 즉 부동산 처분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헌법 개정에서 명시된 사유 재산 인정은 실제로 쿠바 사회경제 체제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특히 이를 규정하는 데 있어 쿠바 경제의 생산수단을 구성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부가 개인에게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수정된 제30조 조항은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쿠바 체제가 이번 개헌을 통해 시장 경제화되고 있다는 일각의 전망은 다소 성급해 보인다.


현재 개헌에 따른 쿠바 사회주의 체제의 변화, 특히 사유재산 인정이라는 측면이 지나치게 부각되면서 마치 시장 경제화 되어가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이번 개헌은 헌법이라는 법들의 법(Ley de leyes), 즉 쿠바 체제가 기반을 두는 주요 법적 근거이자 지난 40여 년간 쿠바 사회가 겪은 변화와 국민의 요구를 법적으로 명문화하는 과정의 일부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쿠바 체제의 정당성과 기반을 헌법이라는 형태로 재정립하였고, 개헌 국민투표는 그 정당성을 재확인해 준 민주적 절차였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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