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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파라과이 선거제도 개정과 그 의미

파라과이 구경모 부산외국어대학교대 중남미지역원 조교수 2019/06/07

파라과이식 정당명부제 철폐 요구


필자는 지난 4월 중순경 파라과이를 일주일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 기간 동안 파라과이 언론은 연일 선거제도 개정을 둘러싼 문제를 대서특필하였다. 그리고 그 갈등은 4월 25일에 최고조로 달아올랐다. 이 날은 파라과이 상원에서 파라과이식 정당명부제인 리스타 사바나(Lista Sabana) 철폐에 관한 법안 심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선거법 개정을 바라며 전국에서 모인 파라 과이 국민들은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국회를 압박하기 위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에 참여한 파라과이 국민들은 리스타 사바나(Lista Sabana) 철폐와 정치권의 부정부패 척결을 요구하였다.


리스타 사바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파라과이 이외에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도 존재하는 선거방식이다. 파라과이의 리스타 사바나 선거제는 구속식 정당명부제와 유사하면서도 더 폐쇄 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제도의 특징은 유권자가 각 정당을 대표하는 후보를 제외한 나머지 후보를 모른 채 투표한다는 점이다. 상원의원 선거를 예로 들어보면, 각 당에서 기호를 부여받은 한 명만 후보로 노출된다. 각 당은 득표수 만큼의 상원의원의 지분을 가지게 되는데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는 유권자가 모른 채로 당선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스템은 경선 때부터 적용되며, 상원을 비롯한 하원과 다른 지방의회 선거에도 적용된다. 리스타 사바나는 각 당의 경선에 승리한 계파 수장 혹은 계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후보를 중심으로 상〮하원과 지방의원, 자치단체장 후보를 한꺼번에 결정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에 유권자는 각 당에서 기호를 얻은 대표 후보만을 보고 투표하는, 즉 나머지 후보들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표를 던지는 것이다. 이렇듯 리스타 사바나는 한 사람을 선택하면 나머지 후보들이 ‘패키지’로 줄줄이 당선되는 형태라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특성 때문에 리스타 사바나는 파라과이와 남미에서 우두머리(까시께) 정치 혹은 족벌정치의 대명사로 불린다. 이 같은 선거 제도의 특징으로 인해 파라과이에서는 리스타 사바 나가 부정부패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이미 십여 년 전부터 국회에서는 리스타 사바나 철폐를 위한 안건이 상정됐으나 번번이 부결되었다. 리스타 사바나 철폐를 위한 사회적 공감대가 이전부터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대규모 시위로 촉발된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리스타 사바나 철폐가 파라과이 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선거제도 개정 논의와 결과


이번 선거법 개편의 핵심인 리스타 사바나 철폐는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부터 꾸준하게 제기되었다. 파라과이의 보수 정당인 콜로라도당은 번번이 리스타 사바나 철폐에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타 사바나 철폐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는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국민의 요구로 인해 2012년 국회에서 리스타 사바나 철폐에 대한 안건이 심의되었다. 그러나 당시 여당이었던 콜로라도당이 반대해 실패하였다. 


올해 리스타 사바나 철폐 움직임이 새로이 촉발된 것은 상원의원인 파라과요 쿠바스(Paraguayo Cubas)가 파라과이 국회에서 벌어지는 부패 행위를 국민들에게 폭로하면서 시작되었다. 파라과요 쿠바스는 소수 정당인 국가개혁당(Movimiento Cruzada Naci onal) 내의 유일한 상원의원으로서 국회의 여러 부정한 행태를 국민에게 낱낱이 고하였다. 그는 다수의 상원의원들이 국회에 출석하지 않고 보좌관을 시켜 수당을 받는 행위를 포함하여 다양한 부정 행위를 고발하였다. 특히 파라과요 쿠바스는 오랜 기간 상원의원으로 재직한 후안 카를로스 갈라베르나(Juan Carlos Galaverna)를 직접적으로 겨냥하였다. 갈라베르나는 여배우와 섹스비디오 스캔들을 비롯하여 군사독재 시절부터 축적한 권력을 이용한 각종 부패 혐의에 연루됐지만 30년 동안 상원의원 직을 유지하고 있다. 파라과요 쿠바스는 국회의 부패 문제가 유권자가 직접 정치인을 심판할 수 없는 리스타 사바나 제도에서 기인한다고 판단하였다.


파라과요 쿠바스는 지난 4월 2일 리스타 사바나 철폐 법안을 상 원에서 심의하기 위해 대체 법안을 발의하였다. 파라과요 쿠바스가 제안한 것 이외에도 리스타 사바나 철폐와 그 제도를 대체할 관련 법안은 2개 더 발의되었다. 리스타 사바나 대체  법안은 총 3개가 발의되었고 4월 25일 상원에서 심의하였다.


리스타 사바나를 대체할 법안은 파트리아 께리다 정당(Partido Patria Querida, PPQ), 파라과요 쿠바스, 그리고 국회 선거개혁 위원회에 의해 발의되었다. 파트리아 께리다 정당은 동트식에 기반한 구속식(폐쇄형) 정당명부제를 제안하였고, 파라과요 쿠바스는 비 구속식(개방형) 정당명부제를 내놓았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이 두 안을 절충한 대안적 정당명부제를 제시했으나 기본적으로는 동트식에 가까운 안을 제안하였다. 파라과요 쿠바스의 안은 유권자가 명부에 기재된 후보에 대한 선호도 표시가 가능하게 허용하자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파트리아 께리다 정당의 안은 명부는 개방하되 해당 정당의 선호도 투표만 가능케 하자는 것이었다.


상원은 3개의 법안 중에서 파트리아 께리다 정당의 안을 선택하였다. 상원에서 채택한 법안은 4월 26일 하원에서 심의하여 승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다시 2주간의 숙고 후 상〮하원을 거쳐 5월에 구속식 정당명부제와 전자 투표제가 함께 비준되었다. 그 법안은 5월 24일 행정부의 수장인 마리오 압도 베니테스(Mario Abdo Benitez) 대통령에 의해 공표되었다. 개정된 선거 제도는 2020년 실시될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리스타 사바나 철폐에 따른 전망과 의미


리스타 사바나는 파라과이의 고질적인 병폐이자 부패의 근원인 족벌주의를 상징하는 정치제도였다. 이를 반영하듯 파라과이 국회는 오랫동안 거대 양당이 지배해 왔다. 그 가운데서도 콜로라도당은 60년 이상 정권을 유지하였고, 리스타 사바나 철폐를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상원 의석의 과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콜로라도당은 이번에도 하원에서 결의한 내용인 리스타 사바나와 연계된 전자투표제를 반대하면서 마지막까지 버티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민 여론을 거스르기에 리스타 사바나에 의한 문제가 너무나도 많이 노출되었다. 부정부패의 ‘아이콘’인 콜로라도당의 갈라 베르나가 30년간 상원의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리스타 사바나 제도 덕분이었다.


리스타 사바나가 철폐되고 그것을 대체할 선거제도를 마련한 것은 파라과이 정치사에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일부 정당과 그 소속 의원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사례가 점차 줄어들 것이다. 또한 양대 정당 구도에서 파트리아 께리다와 프렌테 과수(Frente Guasu) 등의 소수 정당들이 약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특히 내년에 치러질 지방자치단체 선거는 이번 선거법 개정이 파라과이 정치 지형에 미칠 영향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현재 상황에서 구속식 정당명부제는 파라과요 쿠바스가 제안한 비구속식 정당명부제의 차선책일 뿐 파라과이 족벌정치나 계파정치를 깔끔하게 청산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번 선거법 개정은 큰 변화를 위한 하나의 발걸음을 내디뎠다는데 그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특히 계파정치와 족벌정치의 상징이었던 리스타 사바나를 없애는데 시민들의 힘이 변수가 되었다는 점은 향후 파라과이 정치 지형 변화에 있어 시민사회의 역할과 비중이 커질 것을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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